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용광로, 가자지구

2014-07-28     알랭 그레쉬



지난달 8일,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은 700명 이상을 몰살시켰다(7월 24일 기준). 1945년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에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된 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시작되었고, 1956년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Fatah)이 창설된 뒤 지금까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신의 없는 여인 데릴라의 배신으로 머리칼이 잘려버린 히브리인 삼손은 결국 ‘블레셋’ 혹은 ‘필리스틴’이라 불리는 종족의 손에 붙잡혀 눈이 뽑혔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은 바로 이 필리스틴으로부터 유래한다. 어느 날 이들은 재미 삼아 삼손을 조롱했다. 삼손은 신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을 더듬어서 찾아 두 팔로 무너뜨려 버렸다. 삼손이 “필리스틴인들과 함께 죽기를 바라노라”라고 외치면서 온 힘을 다해 기둥을 잡아당기자 신전이 사람들과 압제자들 위로 무너져 내렸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의 숫자가 그가 살았을 때 죽인 숫자보다 많았다”고 성서는 기록했다. 이 에피소드가 바로 히브리인의 적인 팔레스타인의 수도 가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삼손의 최후 전설에 등장했던 가자

 

예전부터 가자지구는 유럽과 아시아, 근동과 아프리카의 상업로 상에 위치한 교차로였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이 도시와 이 지역은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에서 로마를 거쳐,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까지 당시 강대국들의 경쟁구도에서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모함마드(혹은 마호메트)가 죽기 2년 전인 서기 634년,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였던 이슬람이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가자는 세계 제1차 대전 때까지, 중간에 몽고족의 침입이나 프랑스 나폴레옹의 점령과 같은 길고 짧은 휴지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이슬람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장 피에르 필리위는 이 지역에 관해 심도 있게 집필한 자신의 저서에서 “탈취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지적한 것처럼,(1) 영국 장군인 에드먼드 앨런비가 1917년 11월 9일 오스만제국으로부터 가자의 관문을 빼앗아 그해 12월 11일 입성했다.

영국으로서는 이것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한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쓰러뜨리는 것만 아니라, 오스만제국의 동맹이자 영국과 인도 제국의 원활한 교통로였던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요충지를 통제하는 목적에도 부합했다.

영국은 이 성지에 대한 프랑스의 야욕을 물리쳤다. 영국은 1922년 국제연맹으로부터 이 지역을 관리하는 위임권을 받아내 차후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가자는 팔레스타인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또한 ‘밸푸어 선언’, 즉 유태 민족주의인 시온주의자들의 이주를 부추겨 유태인 국가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의 일환이기도 했다.(2) 실제로 영국은 1939년까지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는 했다.

가자와 그 인근 지역들은 팔레스타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의 투쟁뿐만 아니라 시온파 식민지와 영국의 진주에 반대하는 싸움에 개입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발생했던 이 봉기는 결국 영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패배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랫동안 모든 정치권력의 지도부에서 축출되었고, 결국 아랍 정부나 유태인 정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게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의 국가 선언 다음 날, 아랍군대가 공격을 해왔다. 이것이 이스라엘과의 첫 번째 전쟁이자 아랍의 첫 번째 패배이기도 했다. 당초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정된 분할 계획에 따라 팔레스타인 국가에 할애되었던 지역이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분할되었다. 이스라엘이 갈릴리 지역을 포함한 일부 지역을 병합하고 요르단은 소위 ‘시스요르단’이라 불리는 요르단 강안 서쪽 지역을 차지했다. 가자, 칸 유니스, 라파를 포함한 총 360㎢의 가자지구는 이집트 군대가 관리하게 되었다. 이곳은 어떤 외국의 주권도 미치지 않는 유일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원래부터 거주하고 있던 토착 주민 8만 명에,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서 쫓겨난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더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수많은 피난민과 이 지역의 독특한 위상으로 인해 가자는 팔레스타인 정치가 인정받고자 하는 주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1952년 7월 23일 이집트에서 쿠데타로 군주제를 무너뜨린 가말 압델 나세르와 ‘자유 장교단’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자발적으로 결집하여 이스라엘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피난민들을 가자에 영구히 붙잡아두려는 모든 시도에 대항했다. 이스라엘의 강한 압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 아직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청년 장교 아리엘 샤론(2001~2006년 이스라엘 총리 역임-편주)이 혹독한 조치로 이미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아랍연맹에서 해방의 길 모색

 

1955년 2월 28일, 이스라엘군의 샤론은 가자지구 공습을 지휘하여 이집트 측에서는 민간인 2명을 포함한 36명, 이스라엘 측에서는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해 3월 1일, 이 지역에서 이집트 측의 소극적인 대응을 규탄하는 큰 시위들이 일어났다. 이것이 당시 이집트의 새로운 권력자였던 나세르로 하여금 외교정책을 바꾸게 했다. 그때까지 국민들에게 친미파로 인식되었던 나세르가 냉전 체제 한 가운데서 모스크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른바 제3세계의 탄생으로 기록될,(3) 1955년 3월 반둥 회의에서 나세르는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었던 저우언라이(1949~1976년 중국 공산당 총리 역임-편주)를 만나 소련이 이집트에 무기를 공급해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1955년 9월 30일,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이 소련으로부터 왔다. 이렇게 해서 소련이 중동 지역에서 서방의 무기판매 독점을 종식시키고 진입하게 되었다.

나세르는 또한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전사 단체로 조직될 수 있도록 좀 더 자유를 부여했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국가수반인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의 삼국 동맹이 곧바로 이집트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결국 삼국동맹 측이 시나이 반도와 가자를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고, 이후 가자는 1957년 3월까지 이스라엘의 수중에 있었다. 이스라엘 점령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인적 손실은 심각했다. 칸 유니스에서는 10여 명의 민간인들이 벽에 일렬로 세워져 기관총으로 살해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권총으로 살해당했다. 대략 260~500명이 이런 식으로 학살된 것으로 추산되었다.(5)

이후 이스라엘이 미국의 압력으로 시나이와 가자에서 철수하자,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인기는 정점에 달했고 아랍의 민족주의도 고조되었다. 가자 지구 내 캠프에서 팔레스타인의 젊은 세대는 1948~49년의 패배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이들은 다양한 나세르파 운동이나 바스 당, 조지 하바치가 창설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 같은 조직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들에게는 아랍과의 연합이 팔레스타인 해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라파트의 ‘파타’당이 PLO 장악

 

소수의 젊은이들은 가자의 경험으로부터 반대되는 교훈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대항하면서도 동시에, 아랍의 지지가 얼마나 조건부였나를 따졌다. 이미 이집트에서 옥고를 치렀던 일부 청년투사들에게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팔레스타인 자신의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미 1948년부터 가자에 피신해 있던 야세르 아라파트를 축으로 모여 1959년 아랍어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머리글자를 거꾸로 딴 ‘파타(Fatha)’당을 세웠다. 비교적 초창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 이 운동의 주도자 역할을 하던 가자 출신 인물 중에는 사라 칼라프, 아부 지하드로 불렸던 카릴 엘-와지르가 있었다. 특히 와지르는 파타당의 제2인자였다가 1988년 튀니지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당했다. 또 1973년 베이루트에서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살해당한 카말 아드완도 가자 출신 지도자에 포함된다.

1959년과 1964년 사이에 베이루트에서 발간된 그들의 잡지인 <팔리스티누나>(‘우리들의 팔레스타인’이라는 뜻)에서 이들은 “우리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당신들(아랍체제)이 일종의 방어용 벨트로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우리와 유태인의 전투를 구경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아랍체제)이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는 것입니다”라고 요구했다.(6) 나세르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시대에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처럼 이단아와 같은 발언을 서슴없이 한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 노력(1958~61)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더불어 새로운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1962년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 모델 역할을 했다. 1965년 1월, ‘파타’당은 이스라엘에 대한 첫 공격을 감행했다. 곧이어, 아랍의 통일을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여타 다른 조직에서도 투사들이 나타나 봉기를 시작했다.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 패배로 파타가 하나의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고, 나세르의 후원 아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장악했다. 1969년 2월, 아라파트가 PLO의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지역 정치의 주요한 주인공으로 재등장하게 되고, 가자는 이 새로운 흐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가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서도, 수많은 기구에서 군사적인 저항이 있었다. 유일하게 ‘무슬림형제단’만이 사회 운동에 전념했다. 이스라엘 점령군에 대한 첫 공격은 1967년 6월 11일에 발생했다. 이날은 이집트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휴전을 개시한 다음 날이었다. 1971년까지 크고 작은 공격들이 되풀이되었다. 이스라엘의 샤론 장군이 이끈 전차부대의 무자비한 진압, 비합법적인 수많은 공습이 되풀이되었다. 군사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지만 정치적인 시도는 계속되었다, 특히 1967년까지는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스요르단과의 접촉도 시도되었다. 이후 팔레스타인 엘리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한 대표”라고 인정받은 PLO에 가입했고, 오직 무슬림형제단만이 이를 거부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사회조직망, 그리고 PLO를 견제할 가능성을 엿본 이스라엘 점령군의 관대한 태도 덕분에 따로 뿌리를 내렸다. 1973년 족장 아흐메드 야신이 창설한 무자마이슬라미야(이슬람 센터)는 점령군으로부터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저항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된 시점에서 이 소극적 기회주의는 형제단 내부에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고, 결국 1980년대 초 한 분파가 떨어져 나와 이슬람 지하드(이슬람 성전)가 되었다.

 

이스라엘, 2007년 이후 대규모 봉쇄 조치

 

1987년 12월, 점령군에게 돌을 던져 저항하는 이른바 첫 ‘인티파타’가 일어났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슬람 저항운동(하마스)을 창설해 그들의 전략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들은 인티파타에는 참여하나 다른 조직과의 연합전선은 거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PLO의 아라파트가 이 저항을 이용해서 1993년 9월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총리 라빈과 협상을 했다. 결국 아라파트는 1994년 7월 1일 가자에 팔레스타인 ‘권력기구’를 설립했다.

그 이후는 잘 알려진 대로 이스라엘과의 협상 실패, 식민지화의 가속, 2000년 9월 두 번째 인티파타, 2006년 첫 민주 선거에서 하마스의 승리 등으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새로운 정부에 대한 서방 세계의 인정 거부, 이것을 끝내기 위해서 미국과 파타 과격파들의 연합 등이 발생했다. 2007년 가자에서 하마스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이스라엘은 150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봉쇄조치를 가했다.

가자지구는 지상, 해양, 영공 등 모든 접근 통로가 여전히 이스라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영토의 상당 부분(농업이 가능한 면적의 30%)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바다로는 6마일 이상(올해 7월 작전이 개시된 후로는 3마일로 축소)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팔레스타인인들의 주민 등록을 관리하고 있다. 2007년부터 이스라엘이 가한 봉쇄는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만장일치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팔레스타인 주민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2008년 12월, 2009년 1월, 2012년 11월, 올해 7월에도 가자 지구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연이어 실시했다. 봉쇄가 해제되지 않는 한,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독립적인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하는 한, 새로운 휴전은 일시적인 소강상태일 뿐이다. 프랑스 드골 장군이 1967년 11월 27일자 언론과의 회견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의 그 이후를 일찍이 예측한 바 있다. “점령은 억압과 압제와 축출 없이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이 테러라고 판단하는 저항을 낳는다.”

 

글·알랭 그레쉬 Alain Gresh

언론인. 블로그 ‘누벨 도리앙(Nouvelles d'Orient)’ 운영자

번역·이진홍

에세이스트.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한국외국어대 강사. 저서에 <앙리 미쇼와 존재의 문제>, <여행이야기>, <자살> 등이 있다.

 

(1) 장-피에르 필리위, ‘가자의 역사’, 파야르, 파리. 2012년, 혹은 ‘모든 것이 가자에서 시작되고 가자에서 끝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4월호

(2)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영국 유태인 사회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여왕 폐하의 정부는 유태 민족을 위해서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설립하는 데 우호적으로 임한다”고 발표했다.

(3) ‘제3세계의 탄생과 죽음’, <마니에르 드 부아>, 87호, 6~7월, 2006년

http://boutique.monde-diplomatique.fr

(4) 이 에피소드에 관해서는 모함메드 하이칼(Mohammed Heikal), ‘호랑이 꼬리를 자르다. 이집트인의 눈으로 본 수에즈’, 앙드레 도이치, 런던, 1986년

(5) 장-피에르 필리위, ‘앞의 책’, p.111, ‘1956년 가자에서 화가 조 사코(Joe Sacco)의 놀라운 조사, 역사의 변두리에서’, 퓌튀로폴리스, 파리, 2009년

 

(6)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역사와 전략. 팔레스타인 국가를 항하여’, 스파그-파피루스, 파리,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