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타밀 해법 ‘반군 격퇴’만이 능사 아니다

2009-05-05     에릭 폴 메이에르 | 동양학 교수, 프랑스 국립동양언?

                   타밀호랑이, ‘테러단체’ 낙인 이후 급속 힘 잃어
                 경제위기와 다른 과격세력들이 향후 정국 변수

 
  스리랑카 정부군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지난 25년간 계속된 타밀 반군과의 내전 양상이 급변하고 있다. 과격 분리주의 반군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의 고위급 장교 등 무장 대원 3천여 명이 4월 22일 무더기로 스리랑카 정부군에 투항했다. 수천 명의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투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또 타밀반군 장악 지역에 갇혀 있던 민간인 탈출자도 10만 명에 이르고 있어 스리랑카 내전 종료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유엔 등 국제기구는 아직도 7만여 명의 민간인이 교전 지역에 갇혀 식량과 의약품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타밀호랑이 반군은 1983년 이래 소수 민족 타밀족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해왔으며 그간 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타밀 지역의 전문가 메이에르 교수가 타밀 분쟁의 진상과 그 해결책을 진단한다.<편집자>


  과격 분리주의 반군단체인 타밀호랑이가 점령한 영토는 푸투쿠디이루푸(PTK) 도시 근처의 150㎢에 불과한 ‘조그마한’ 해안지역으로 축소됐다.
이 지역에 정부 추정 10만 명, 적십자 추정 25만 명의 주민이 밀집해 살고 있다. 1월 1일~2월 5일 이 단체는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주요 기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단체의 비밀 본부인 킬리노츠치, 요충지인 자프나 반도로 향하는 주요 길목인 엘리펀트 패스, 이 단체의 공격 초계정들과 병참선이 활동하는 항구인 물라이티부와 찰라이,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정글 속에 건설된 활주로, 반군 지도자인 벨루필라이 프라브하카란이 작전 지휘하는 벙커들이 하나둘 스리랑카 군대로 넘어갔다.

   

 

                              

 타밀 반군, 전략 실패와 내분으로 위축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 중 하나로 명성 높은 단체인 타밀분리단체에 의해서 4반세기 동안 궁지에 몰렸던 스리랑카 군대가 어떻게 주요 보루들을 그처럼 빨리 점령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 대부분 2004~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유 중에는 일명 ‘카루나’라고 불리는 동부 지역 반군 지도자인 비나야가무르트히 무랄리트하란의 변절, 타밀 분리단체의 명령에 의해 타밀 유권자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함으로써 2005년 11월 17일 마힌다 라자팍세가 당선된 사실, 2004년 12월 쓰나미의 영향(1)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분리단체의 최고 전략가인 안톤 발라싱함이 2006년 12월 런던에서 사망한 것도 타밀 세력의 위축을 가중했다. 처음에 타밀 전략가들은 이런 변화들의 영향을 과소평가했다. 전략가들은 휴전협정(2)을 깨고 대결을 벌였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열세에 몰렸다.

 더욱이 동북 지역의 카루나가 2004년부터 반군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 프라브하카란이 통제하는 북부 기지들에 신병 공급을 거절해 타밀 세력의 위축을 부채질했다. 게다가 타밀의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반군의 저지 압력에도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렸다. 전체적으로 10만~15만 명에 그친 반군 병력과 10만 명에서 17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난 정부군 병력 간의 불균형이 심화됨으로써, 정부군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점차적으로 영토를 다시 탈환하게 됐다.
 스리랑카 콜롬보부대의 훈련·무장·지휘는 더욱 강력해졌다. 반군세력의 군수품을 고갈시키기 위한 해안 통제 전략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2008년 반군세력의 무기 수송선 7척이 파괴됐고, 섬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기지들도 제압됐다. 반군세력은 자신들이 예견한 전략을 썼음에도 공군 전투력과 공중수송 전력을 복원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퇴역 장교이며 대통령의 동생인 고타브하야 라자팍세가 국방장관에 임명됨으로써 반군세력은 더욱더 밀려나게 됐다. 군 정보국은 카루나와 그의 측근들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반군 사령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스리랑카 콜롬보부대는 특히 해상 분야에서 인도 정보국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군세력의 정확한 전력과 위치를 알았고, 이들 세력을 박멸하려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첨단 장비를 도입했다. 이런 군사적 측면 외에도 정치적 요인들이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스리랑카인들은 라자팍세 대통령의 선동 정책에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야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반면 스리랑카 극좌 민족주의 정당인 인민해방전선(JVP)은 전적으로 정부 편을 들었다. 스리랑카 정부의 능숙한 선전 조작에 힘입어, 한때 반군단체를 ‘배신’했던 카루나와 예전 전사들이 지역 단위에서 대표적인 지위는 아닐지라도 다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됐다.
 
 국제사회, 분리단체 외면하고 돌아서 
 국제적 차원에서는 2006년 5월 유럽연합이 타밀반군 단체를 테러조직에 포함시켰다. 이 조처 이후 반군 주둔 지역에 체류했던 인권단체들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정부군과 반군세력의 휴전을 지지했던 서방국가들조차도 자금 모집과 송금, 무기거래 같은 반군단체의 활동에 제재를 가했다.
 분리주의자들은 인도 남부에 위치한 타밀나두주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2004년부터 인도국민회의파가 이끄는 뉴델리 정부가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결국 타밀 반군세력은 휴전 기간에 보여주려던 책임 있는 교섭 당사자의 이미지를 잃고 말았다.

 반면 해외 거주 타밀인들은 정치적·재정적으로 분리주의 운동을 계속 지지했다. 쓰나미 발생 후, 분리주의 반군단체가 통제하는 타밀재건기구(ORT)는 캐나다·영국·프랑스 같은 국가들의 자금 송출 저지 노력에도, 해외 거주 동족들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았다. 반군단체의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타밀인들은 해외 거주 국가에서 시의원으로 선출되거나 문화·스포츠 결연을 맺음으로써 세력을 확대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스리랑카에는 적으면 10만 명, 많으면 25만 명으로 추산되는 주민이 반군세력의 통제력에 놓인 푸투쿠디이루푸 지역에 묶여 있는 상황이다. 이곳 주민들은 2008년 12월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두 보고서가 우려한 것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3)

 이들은 분리단체의 방해 때문에 이 지역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단체의 전사나 노동자로 모집돼 ‘인간 방패’로 이용된다. 분리단체의 남녀 조직원들은 평상시엔 제복을 벗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 섞여 활동한다. 이에 맞서 정부군은 공중 폭격을 계속하고 박격포를 쏘아대고 있다. 주민들은 분리단체 조직원들의 잠입이 두려워 스리랑카 정부가 통제하는 수용소로 도망하기도 한다. 수용소에서는 밀고와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수용소로 모여들고 있다.
 이런 참사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스리랑카의 미래가 일정 부분 달라질 것이다. 재정적·정치적으로 휴전을 지지했던 나라들(유럽연합·미국·일본·노르웨이)은 교전 당사자들에게 시민들을 풀어주라고 호소하면서 분리단체 전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분리단체의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한다.

 민간인 속에 섞인 수만 명의 반군 전사들은 치열한 전투를 준비하거나 비밀 지하운동을 다시 할 채비를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관측통은 반군세력의 아지트 격인 푸투쿠디이루푸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엄청난 유혈사태를 부르지 않을지, 정부군이 저지른 폭력이 타밀 소수민족을 자극하지 않을지, 이러한 폭력이 인도타밀족 거주민들의 결집을 강화하지 않을지, 그리고 해외에서 스리랑카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을지 걱정한다. 외국의 관측통과 언론이 이 지역의 접근을 금지당한 사실이 이런 우려를 더욱 부채질한다.
 
 정국 안정까지는 난관 아직 많아 
 만약 타밀 분리주의 단체가 패배한다면 스리랑카 정부는 평화를 얻겠지만, 이는 쉽지 않다. 독자적인 타밀 협상 당사자들은 2006년 ‘관용과 비폭력 증진 유네스코상’을 받은 타밀연합해방전선 지도자인 베라싱함 아난다상가레를 제외하면, 그 대부분이 분리단체에 의해 제거됐다. 카루나 같은 협상 당사자들은 스리랑카 정부에 협력한 사실 때문에 많은 타밀인들에게 신뢰를 잃었고 ‘타밀국가동맹’(TNA) 의원들은 현 상황을 중재하기엔 분리단체의 노선에 너무 가깝다.
 스리랑카 콜롬보부대가 완전하게 승리할 경우, 이를 계기로 어떤 정치적 양보도 거부할 가능성을 보이는 스리랑카 극우 민족주의의 오만이 심해질 우려도 있다. 이들의 압력을 격퇴할 것이라는 라자팍세 대통령의 불분명한 약속은 확실히 믿을 게 못 된다.

 권력이 용인해주고 심지어 권력이 음양으로 부추긴 무장그룹들이 자행하는 심각한 인권침해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벌어졌던 참혹한 장면들을 연상시킨다.(4) 한편 정부군이 최초로 승리한 직후인 2009년 1월 초 주요 민영방송인 <시자라TV>의 스튜디오가 약탈당했으며, 라자팍세 대통령 형제들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비판한 라산타 비크라마툰즈 기자가 백주대낮에 살해됐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여사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1994~2005) 검토한 바 있는, 북부와 동부 소수민족의 요구를 충족해 줄 연방제 형식의 해결책은 실현할 수 있을까? 북부와 동부를 통합하자는 타밀반군의 요구는 더 이상 누구도 경청할 가능성이 없다. 이런 요구 대신에 한편으로 북부 지역(대부분 타밀민족)의 소수민족 권리를, 또 한편으론 동부 지역(이슬람인, 힌두와 기독교 타밀인, 불교 스리랑카 민족이 거주한다)의 소수민족 권리를 보장하는 형식으로, 중앙정부 아래서 특별 대표권을 지닌 자치지역의 지위를 부여하는 건 실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형태의 권리 부여도 권위적 대통령제 유지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정치적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분리주의 투쟁이 재현될 가능성은 상존할 것이다. 강력한 반군 지도자 프라브하카란이 활동하는 한, 게릴라가 다시 행동에 돌입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다 해도 반군의 모든 잠재력이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2009년 1월 30일 반군단체는 일명 ‘KP’라 불리는 셀바라자흐 파트흐마나트한에게 국외에서 조직을 대표할 사실상의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영구 평화 위한 정치적 결단 필요 
 1955년 자프나반도 북부의 전통적인 게릴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마드라에서 1980년대 초 타밀호랑이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인도 마피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83년의 폭력 때문에 엄청난 이주민들이 발생했는데, 그는 이주민들이 정착한 모든 지역에 분리단체 조직을 만들어 자금을 모으고 무기와 탄약 공급 루트를 개발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캄보디아에서 국제 무기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는 분리단체의 공동 대변인인 안톤 바라싱함(1938~2006)과 수파야 파라무(1967~2007)가 사망한 후 세상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정부 처지에서 볼 때는, 최근 몇 년간 모집한 약 20만 명의 젊은 병사들과 보충병들의 미래도 문제가 된다. 이들의 해체는 지속된 분쟁과 세계경제 위기로 흔들리는 국내 경제 상황에서 불완전 고용을 확대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무장 마피아의 성장을 재촉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젊은이들은 분쟁으로 초토화된 지역의 재건사업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화해 작업과 재건이 병행될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대부분이 불교신자인 이들이 뼛속 깊이 분쟁을 겪은 후에도, 소수 근본주의 승려들의 자극적 호소를 외면하고 부처가 가르치는 동정·관용·지성의 길을 다시 찾길 바랄 수 있을까?

글/에릭 폴 메이에르 Eric Paul Meyer
번역/김광식

<각주>

(1) ‘스리랑카 타밀분리주의의 원동력’(Ressorts du separatisme tamoul au Sri Lanka),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4월.
(2) 노르웨이의 후원을 받아 2002년 2월 맺어진 휴전협정이 2008년 1월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타밀호랑이가 2005년 8월 라크쉬만 카디르가마르 외교장관을 암살함으로써 휴전협정에 치명상을 입혔다.
(3) www.hrw.org/en/reports/2008/12/15/trapped-and-mistreated
  www.hrw.org/en/reports/2008/12/22/besieged-displaced-and-detained
(4)1983년 7월 무장 세력이 타밀인들에게 폭력을 자행했다. 그 이후 민병대들이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인민해방전선에 협조한다고 의심되는 스리랑카인을, 이어서 동부지역 타밀인을 각각 공포에 떨게 했다. 수만 명이 행방불명되고 대량 학살당하면서 모든 지역 공동체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