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빌라르는 왜 연극을 공공서비스라고 했나

2014-07-28     브뤼노 부사골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은 곧잘 우아한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지난 몇 세기에 걸쳐 모든 사람이 연극이라는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많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이 있어왔다. 이것이 바로 30여 년 전부터 쓰여 온 지리적 ‘지방분권’과는 다른, 예술의 ‘지방분산화’라는 개념이다.

 

“우선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좋은 연극을 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장 빌라르, 전 국립민중극장 총감독)

 

1981년부터 5년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장관직을 지낸 가스통 데페르가 1982년 행정 관할을 지방 도시로 이전하는 지방분권 정책을 시행하면서, ‘지방분산화(decentralization)’라는 표현은 오늘날까지도 주로 지리적인 개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1) 그러나 이 단어는 그 전까지는 완전히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연극인이자 예술 감독인 장 빌라르는 지방분산화에 대해 “지금까지 엘리트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

바로 이 지방분산화는 문화, 특히 연극의 지방분산에 대한 개념으로, 1946년 교육부에서 공연예술 및 음악 담당 부국장으로 임명된 잔느 로랑이 처음 제시했다. 잔느 로랑은 인민전선(FP)과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CNR) 등의 우파적 노선에 따라 지방분산화 정책을 수립했다.(3) 그리고 같은 해, 최초의 국립연극센터(CDN)가 콜마르 지역에 문을 열었다. 1959년부터는 드골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은 대문호 앙드레 말로가 정부의 의지를 실현해 ‘문화의 집’을 설립하였다. ‘비종교적 성지’와도 같은 이 문화의 집은 ‘민중과 문화’, ‘노동과 문화’, ‘대중연극협회’ 등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비롯한 사회교육기관 조직에 기반을 두고 있는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1951년 출범한 국립민중극장(TNP)의 총감독을 맡은 장 빌라르는 “연극이 전기, 가스 등과 같은 공공서비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예술과 문화로 민중을 해방하자는 의지가 오늘날은 어떻게 남아있는가? 지금까지 공공서비스였던 많은 부분이 이미 민영화되었거나 현재 민영화가 되는 중이고, 국민 대부분이 예술 기관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오늘 이 시점에 말이다.

1930~50년대로부터 현재 사이의 괴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동적인 시대 흐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국민전선(FN)은 유급 휴가제도 실시와 노동시간 축소, 나아가 예술 활동 및 작품을 상징적・경제적으로 인정해주면서 이 분야에 놀라울 만큼 큰 기여를 했다. 또 당시에는 불르바드 연극(통속극) 외에도 오페라 공연이 프랑스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서커스, 카바레 클럽, 뮤직홀, 버라이어티 쇼, 야외 무도회, 순회연극, 환락가 무대(에디트 피아프는 전쟁 중 매춘업소 ‘원투투’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지방 유랑극단, 장터 축제, 라이브 카페, 교회 강당, ‘민중의 집’, 공원 정자, 군악대 행진, 카지노, 온천, 각종 국가・종교・계절 행사, 영화관(1950년 한 해 동안 총 관객 수 4억 명) 등, 수많은 예술 공연들이 프랑스 전체를 뒤흔들었던 시기였다.

이 거대한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서는 수십만 명의 ‘광대’들이 필요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가난한 노동자였고, 사실상 대부분 사회권도 없이 고용주의 덕이나 운에 기대어 지내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사회생활 곳곳에 산재하는 아마추어 연극은 사회교육기관이 바라는 이상에 부응할 수 있었다. 결국,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공연예술은 이미 대중 한가운데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종전 후 15년 동안 정치, 교육, 종교, 노조, 산업계의 모든 권력층이 나서서 이러한 예술 활동의 장을 바꾸어갔다. 눈에 보이는 개선책, 나아가 대격변을 일으킬 만한 방안들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특히 사회권 쟁취와 연결해 공연 예술의 ‘전문화’라는 방향을 잡았다. 그 때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분업의 개념을 제시했으며, 수많은 곳이 치안, 위생, 규정 위반 등을 문제로 문을 닫기도 했다.

동시에 레오 라그랑주 청소년 연맹, 청소년 문화의 집, 유스호스텔, 스카우트 등의 각종 연맹 체제와 활동연맹(FOL)과 같은 국립교육기관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성인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문화의 장을 열었다. 덕분에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1960년 사이에는 진정한 이데올로기 전쟁이 펼쳐졌다. 동네에서부터 지역구, 공장, 학교, 시청, 나아가 전 국민에게 와 닿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전투적인 교육법과 지적인 여가생활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산업계 역시 문화의 장을 점령하기 시작해, 문화를 점차 정착시킨 후 CD, 포켓북, 텔레비전, 라디오 등의 다양한 매체로 재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연극은 함께 할 때 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광범위한 해방 운동의 첫 번째 상징으로 아비뇽을 꼽을 수 있다. 1947년, 35세의 청년이었던 장 빌라르는 시인 르네 샤르의 요청에 따라 아비뇽의 교황청 한복판에서 연극 축제를 열었다. 4년이 지난 1951년, 그는 파리 샤이오궁의 국립민중극장 총감독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이렇게 연극, 문학, 권력, 교육 사이의 상징적 동맹은 프랑스 연극 창작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갔고 곧 엄청난 성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빌라르가 민중극장 총감독이 되고 12년 동안 샤이오 민중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가 약 52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독일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펼친 전략인 ‘생소화 효과’와는 다른, 오히려 그 반대 전략의 결과였다. 장 빌라르는 “연극예술은 모두를 모으고 함께하게 할 때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64년, 아비뇽에서 처음으로 예술가, 지식인, 정치인 등이 모여 문화 정책에 대한 연구소를 출범했다. 예술에 대한 정치의 간섭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1970년까지 시기에, 지방분산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장 다스테가 노동자 주거단지와 시골 한복판에 생테티엔느 국립연극센터를 설립한 것이 지방분산화의 유일한 사례였다.

피에르 부르디외, “문화적 불평등은 줄어들 수 없어”

그리고 5월 혁명이 일어난 1968년, 프랑스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가 합의한 것 같았던 기존의 상황을 뒤흔들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먼저 비판한 것처럼, 예술 행위도 사회적 요소로부터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부르디외는 “문화의 집에서 사회교육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화적 불평등을 일시적으로 감출 뿐이다. 직접적인 예술 행위의 기법은 교양 있는 태도를 가르치는 곳인 학교 내에서 불평등이 지속되는 되는 한, 문화적 불평등은 실제적·지속적으로 줄어들 수 없다.”(4)

1968년에는 5월 21일부터 6월 11일까지 여러 연극 센터 및 문화의 집 대표들이 모여 ‘문화 전국 회의’를 진행해 이른바 ‘빌뢰르반 선언’을 발표했다. 로제 플랑숑, 파트리스 쉐로 등 연출가들도 참여한 이 선언문의 골자는 전문가들을 감독기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온전한 권리를 지닌 예술가”라고 칭했으며, “예술 연극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관객이 되는 대중이 아닌, 연극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소위 ‘사회문화’라는 분야에 대중과 연극 간 관계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상황에서, 공연예술 연출가들은 도리어 자신들을 위해 주택 및 재정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1969년, 연기자들은 실업보험제도 대상으로 포함되었고, ‘경영자’들은 1971년 문화예술전국노조(SYNDEAC)를 만들어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실상 국립연극센터들은 외부 개입 없이 공연을 센터끼리 사고팔아 서로 프로그램을 짜주며 운영되고 있었다.

이때 락 콘서트에서 연극, 영화에서 무용, 악단에서 길거리 공연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나타나 노동자, 농민, 복역자, 광인(狂人), 아이들 등의 계층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새로운 대중에게 새로운 형태로 새로운 주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아비뇽의 앙드레 베네데토, 그르노블의 액션 테아트르, 뱅센 지역의 아쿠아리움 극장, 카르투슈리(탄약제조창) 극장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또 다른 지방분산화’가 진행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정치권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여전히 이러한 문화가 가진 인류적·예술적·정치적 중요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나은 것은, 1981년, 자크 랑 문화부 장관이 취임해 예술인들의 수호성인처럼 문화 정책을 이원 구조로 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문가 계층만큼이나 대중 역시 차별화하는 효과로 이어졌다. 민중극장장 재신임 과정은 의자 뺏기 게임처럼 진행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으며,(5) 아비뇽 축제는 해마다 점차 유럽인 위주로 굳어져가는 대중 앞에 설 한 두 편의 유럽 작품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역(逆)지방분산화처럼 독일의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이탈리아의 로메오 카스텔루치 등 품격 있는 연출가들을 기념하며 진행했다. 하지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프랑스어 자막을 단 채 독일어로 상연하는 것이 중국인 관광객에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동일하게, 각각의 국립연극센터와 주요 연극 축제들은 관객, 후원, 언론 스폰서, 특별공연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러한 특별공연은 정해진 날짜에만 상연하고 티켓 값도 무척 비싸지만 언제나 만원사례를 이루는 결과를 보여준다. 낭트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제 ‘라 폴 주르네’처럼 대규모 대중 행사들 역시 프랜차이즈화되어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반면 독립기업들은 공연할 장소를 찾아 끝없이 헤매고 있는 상황이다. 해당 분야 독립기업의 시장점유율은 84%에 달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상연 장소는 전체의 16%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소외를 불러오는 시스템과 이데올로기의 평균화는 문화부 장관이 자크 랑과 같은 좌파든, 앙드레 말로와 같은 우파든 상관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국가가 점차 지역정부와 민간 파트너에게 재정 마련책, 공연 예술 상연에 대한 경영권 및 명목상 책임 등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천 개의 회사들이 경쟁 입찰, 주거, 주식 등 예술 및 문화 활동 시장의 각종 치열한 경쟁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품질 보증마크인 라벨 루즈(label rouge)를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정부의 일이며, 이를 위해 정부 측에서 작품들을 직접 선택, 지원, 상연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검열의 영향도 미칠 수 있다. 2014년 재정 법안에 따르면 문화부에서 지방분산화에 투자하는 예산 규모가 2억 8천 370만 유로인데, 그중 회사를 비롯한 비협정 기관, 즉 법적 절차로 인정받지 못한 기관들을 향해 할애되고 있는 금액은 고작 17%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집단적 움직임으로 바뀌어갈, 프랑스 모든 국민이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전국 회의’가 과연 다시 한 번 해방주의적 지방분산화에 대해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글·브뤼노 부사골 Bruno Boussagol

브뤼 드 베통 프로덕션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Francois Cusset, ‘La foire aux fief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5월호

(2) Jean Vilar, ‘Le petit manifeste de Suresnes (1951)’, <Theatre, service public>, Gallimard, 1971

(3) 프랑크 르파주, ‘문화를 대중의 품에 돌려주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6월호

(4) Pierre Bourdieu, ‘L’Ecole conservatrice. Les inegalites devant l’ecole et devant la culture’, <Revue francaise de sociologie>, 파리, 1966년

(5) 설문조사 결과 참조, <La lettre du spectacle>, 340호, 낭트, 2014년 5월 16일자

 

(6) 공연・고용・교육을 위한 국립위원회(CPNEFSV)의 2013년 분석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