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의 해방적 파국이란
기후 변화는 전 세계의 사람들과 정부들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과연 기후변화는 전 세계의 정치 및 사회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게 나의 대답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고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일 것이다. 변화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 있다. 우리들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기후 변화의 시대에서 근대화는 진보에 관한 것도 아니며, 대재앙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근대화는 단지 잘못된 대안일 뿐이다. 우리는 보편적이며, 과학적인 새로운 어휘를 필요로 한다. 나는 전 세계의 탈바꿈 또는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할 ‘탈바꿈(Verwandlung)’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현재까지의 기후 변화에 관한 모든 논의는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우리가 그것을 중지시키거나 포함시키거나 또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시간에 매우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실은 해결책에만 집중하였던 우리의 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기후 변화가 이미 세상을, 세상에서 존재하는 우리의 방법을, 세상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그리고 우리의 상상 및 정치 행위 방법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변화에 관한 이러한 조건 및 인식의 변화를 나는 ‘탈바꿈’이라고 정의한다. 탈바꿈은 사회적 변화, 진화, 개선, 개혁, 위기,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의 방법을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은 부작용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 세상에 관한 사고방식, 그리고 상상 및 정치행위의 방법에 도전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방법론적 민족주의’에서 ‘방법론적 코스모폴리탄주의’로의 과학적 개혁(토마스 쿤이 인식한 것처럼)을 요구한다.
글로벌 위험에 숨어 있는 해방적 부작용
우선, 나는 글로벌 위험에 숨어 있는 해방적 부작용이라는 탈바꿈의 한 중심적인 방법 또는 변화의 모양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글로벌 위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공동 생산 및 공동 배분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나는 나쁜 것에 관한 논의가 “공통의 좋은 것”을 생산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좋은 것의 부정적인 부작용이 아니라 나쁜 것의 긍정적인 부작용에 관한 것이다. 이로써 공통의 좋은 것의 규범적 지평이 만들어진다.
기후변화나 금융 위기와 같은 글로벌 위험들은 우리에게 21세기의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방향 또는 새로운 나침반을 제공하였다. 예컨대, 기후 변화는 단지 기후 변화만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더욱 중요하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고방식, 생활방식 및 소비자의 소비습관, 법률, 경제, 과학 및 정치의 개혁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기후 변화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예상하지 못한 글로벌 위험의 해방적 부작용의 극적인 위력에 관한 것이며, 이미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존재, 세계의 전망과 상상 및 정치 행위를 이미 바꿔 놓았다.
글로벌 기후 위험은 근대화의 재탄생을 예고할 수 있다. 기후 과학자들은 자멸적이며 자연 파괴적인 자본주의의 개혁을 도모했으나 최근엔 시기가 한참 늦었지만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개혁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이 국제무역에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 거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늘날 이미 반대자들과의 공진화(Co-evolution)의 사례가 되고 있지 않는가? 아마도, 모든 핵발전소가 일본보다 안전한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핵발전소를 가동 중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태양 에너지 및 풍력 에너지의 재개는 의미 있는 근대화의 재개라 할 수 있다.
글로벌 기후 위험은 지구 종말적 대재앙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지금까지는 일종의 ‘해방적 파국(emancipatory catastrophe)’이다. 세계 위험 사회의 해악의 해방적 부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의 변화는 3가지의 개념적 렌즈를 통해서 파악되고 분석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세계적인 대재앙의 예상은 인간의 존재 및 문명에 대한 (성문화되지 않은) 신성한 기준을 침범하고, 그로 인해서 두 번째는 인류학적 충격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는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남긴 ‘규범적 지평의 지구화’
인류학적 충격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식에 지울 수 없는 표식을 남길 정도로 끔찍한 사건에 처해 있다고 느낄 때, 그 사건의 기억을 영구적으로 가질 때, 취소 불가능한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를 변경시키게 될 때에 발생한다. 인류학적 충격은 세상에서 존재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가져온 인류학적 충격은 유용한 사례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숨겨져 있는 해방적 부작용은 허리케인이 2005년 8월 29일에 루이지애나 해안을 강타했을 때 드러났다. 카트리나에 관한 담론의 분석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분명히 보여주며, 실제로 환경 보호의 과제 및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의 역사라는 두 개의 담론이 하나로 합쳐지는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보여주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까지는 홍수는 환경 정의(Justice)의 문제로 자리매김이 되어 있지 않았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인종적 홍수”라는 대중 및 학계 모두의 성찰을 통해서 강력한 노예제도의 인류세(Anthropocene),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다시 불러왔고, 그것을 홍수와 연결시키게 되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을 연결시키는 이러한 종류의 연결은 해악의 코스모폴리탄 부작용이 실제로 발생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부작용의 불가시성이 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미국의 학계 및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적”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위험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사이의 차이점들을 연결시켜야만 하였다. 아직은 적지만 점점 증가하고 있는 다수의 문헌 자료들이 현재 미국 및 다른 장소의 홍수 위험을 환경적 불평등 및 불공정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1)
다시 말해 글로벌 정의의 프레임인 새로운 규범적 지평을 등장하게 만든 것, 특히 해악의 부작용으로 공통의 좋은 것을 생산한 것은 사회적 카타르시스였다. 카트리나는 기후적 재난과 인종적 불평등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후 변화와 글로벌사회 정의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분명하게 만들었다. 잊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 경험은 관련 없는 것들로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연결돼 있는 것으로 만드는 성찰의 과정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홍수가 글로벌 정의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인종적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듯이, 나는 여기에서 ‘사회적 카타르시스(social catharsis)’를 찾고 싶다. 그러나 사회적 카타르시스는 자동적으로 발생하거나 사건 자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오인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한 활동가들의 ‘의미 작업(meaning-work)’, ‘문화적 작업’, 그리고 변화를 도모하는 참여자들의 ‘변혁 작업’이 가져오는 집단적 결과물이다.(2)
먼저, ‘의미 작업’은 다음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노력이다. 위협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 건강, 경제적 파산, 도덕적 황폐함인가? 희생자들은 누구인가? 그것들은 참여하는 대중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하게는, 그것들이 현재 어디에 있든 관계없이, 글로벌 공동체 및 개인들, 공동체 및 기관들은 이에 대응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화적 작업’은 단순히 사건의 표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는 사건이 대재앙의 상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인식될 수 있는 상징적인 환경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적 작업은 기후 문제에서 또는 기후 미학(climate aesthetics)에서, 그리고 만화, 블록버스터 영화, 공상 과학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 곧잘 표현된다. 특히 “‘예술행위를 통해 위험한’ 코스모폴리탄주의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기후 문제 및 그 우려에 대해 미적 음향과 ‘가시성’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로써 코스모폴리탄적 미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3) 이어 ‘변혁 작업’에선 정의가 주장되며, 정의담론이 표현되는 공간-문화적 그리고 제도적 맥락이 지구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 같은 ‘변혁 작업’의 사례는 고든 워커(Gordon Walker)가 연구를 통해 환경 정의 프레임이 다양한 주제, 배경 및 대륙에 걸쳐 어떻게 확산되고 분산되었는지 실증하였다.(4)
21세기를 향한 나침반은?
탈바꿈 혹은 세계의 탈바꿈은 의도적이지 않고, 목표 지향적이지 않으며, (당 또는 국가 사이의) 이념적 투쟁의 결과물도 아니다. 그것은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관한 사례 연구를 통해서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과 같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 속에서 잠재적으로 진행 중인 가능성이다. 그것은 국가 및 국제 법률과 사회과학적 지식의 생산과정을 통해 “자연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입증되는” 것으로 구축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대재앙의 인류학적 충격이 “코스모폴리탄적 계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순간에, 제도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부작용의 마음의 벽이 붕괴되고 있으며, 우리는 코스모폴리탄적 지평이 어떻게 등장하고 지구화되는지 문화적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기후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가 포함시켜야 할 대상은 현재 생존하고 있지 않은 미래 세대이며, 이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된다. 아직 생존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는 국민의 삶의 조건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의의 지평을 어떻게 다루고 설명할 것인가? 기후 변화 위험에 의해 불공정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종종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그들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조치도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속 이론’과 ‘코스모폴리탄화 이론’ 사이의 차이점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식민지 역사의 불리한 쪽에 있었으며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개인, 공동체 및 국가들을 지목함으로써 기후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글로벌 기후 위험에 의해 강제되는 코스모폴리탄화가 정확히 그러한 사실에 관해 성찰하고 있다는 표시다.
나는 비판적 관점의 경험적 세계화에 근거해 우리가 기후변화를 국가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길들이고, 또한 ‘녹색 경제’에 관한 탈정치적 합의, 기술 혁신 등을 비판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본질적으로 기후 변화와 관련한 코스모폴리탄적 관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탈정치적 유럽의 ‘합의’를 존중하지 않는 새로운 글로벌 지형을 포함하고 동원할 수 있다. 이것은 국제적인 권력 관계의 탈바꿈의 핵심적인 요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탈바꿈은 위협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과거가 다시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 (정책적) 결정을 이끌었던 규범 및 책무가 다시 평가되고 있으며, 위협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로부터 자본주의, 법률, 소비자 중심주의, 과학 등에 대한 대안적 아이디어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탈바꿈은 일상의 규범 생성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접근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수동 칫솔 대신에 전동 칫솔은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구원 개념에서는 낙원에 우유와 꿀이 흐르고 있지만, 지상에서 흐르는 우유는 곧장 환경적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기후 살인자’ 젖소는 우유 1리터당 거의 1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수백 리터의 메탄가스를 매일 방출한다! 지금부터는, 심지어 이혼도 신 앞에서뿐만 아니라 환경 앞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이유는? 기혼 가구는 독신 가구보다 환경적으로 더 건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따질 경우, 기후 변화 위험은 이산화탄소 측정치 및 공해 방출 이상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인식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글로벌 기후 위험은 세상에서 존재하고, 보고, 듣고 활동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성하고 있다. 매우 모순되고 상반되며 열려 있으며 예측이 가능한 어떠한 결과도 있을 수 없지만, 21세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적인 “무엇이든 좋다”와는 다른 것이며, 잘못된 보편주의와도 다르다. 이것은 비판 이론의 새로운 변종으로서 그 자체로는 규범의 지평을 설정하지 않지만 경험적 분석으로부터 기준을 설정한다. 그것은 자아비판적인 세계 위험 사회의 규범적 지평에 대한 경험적 분석이다.
세대의 탈바꿈
글로벌 위험 세대가 있는가? 전 세계의 ‘탈바꿈’은 세대 간 단절에서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상상을 하고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사회적 세대 사이에 서로 어떻게 다른가? 세상의 탈바꿈은 세대 간의 서로 다른 개념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현존하는 미래의 글로벌 위험에 직면하여 세대 간에 서로 다른 자아인식이 있는가?
칼 만하임에 의해 제기된 세대 간의 문제점 논의에 근거하여, 나는 만하임이 상상하고 있는 동적 역사사회학이 코스모폴리탄적 전환이라는 생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묻고 싶다. 만하임은 사회적 계층화 양식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세대에 초점을 맞추고, 계급과 대비되는 세대를 강조했다. 만하임은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질서(계급)의 재생산이론에서 세대의 변화이론을 이끌어냈다. 만하임은 선형과 연대순의 아이디어를 벗어나는 역사적 시간의 사회학을 개발한다. 이러한 사고의 중심에는, “시간 세계(time worlds)”라고 불릴 수 있는 공존의 사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동일한 시점(same time)”에 살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종의 동시성(homogenous simultaneity)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하임은 “동시적인 것의 비동시적 혼재”라는 역사학자 핀터(Pinter)의 견해, 탈바꿈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핀터는 예술과 양식의 시대개념을 반대한다. 그는 모든 시점에서 예술의 역사적 시대와 양식은 동시에 그리고 서로 근접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별개의 폐쇄된 역사적 단위로 잘못 인식되지 않아야 한다. 핀터는 진화 또는 진보의 논리에 따라 하나의 시대가 다른 시대에 의해 교체된다는 시간 및 역사의 개념을 반박하고 있다. 예술 역사학자로서, 그는 신낭만주의적인 비전의 탈바꿈을 주장한다. 예술적 창의성에 의해 삶과 죽음이 극복될 수 있는 신화적 아이디어인 ‘활력(entelechy)’의 개념을 아울러 소개한다.
만하임은 자신의 사회학적 세대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 핀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세대를 구성하는 것은 실증주의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의 패턴 또는 세상의 탈바꿈의 패턴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만하임에 있어서, 세대의 개념은 변화 및 탈바꿈의 동의어이다. 만하임의 관점에서는, 세대 간에 상당한 차이와 분열이 있으며, 실제로 ‘월가를 점령하라’, ‘아랍의 봄’, 디지털 세대, 남부 유럽의 실직자 세대 및 ‘자생적(home-grown)’ 근본주의자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세대 간의 차이는 서로 다른 인식 지평 및 세계관 사이의 상호작용 및 충돌을 보여준다.
만하임은 3가지 개념의 도움을 통해 세대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세대 위치(generation location)” 개념으로, 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먼저 세대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세대는 용이하게 일반화될 수 없는 역사적인 시점에서의 실제적인 위치에 견주어 이해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세대 연합(generation association)” 개념으로, 세대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형성하고, 각자의 감각을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공동의 운명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개념은 “현실적인 세대(actual generation)”로, 세대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핀터와 함께,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만하임이 “활력(entelechy)”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하임은 공동의 문제의식이 공동의 대응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이와 동일하지도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는 서로 다른 세대 간의 위치 및 연합 때문이다. 이 개념은 세대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행위자들이라는 점을 추가로 의미한다. 그들의 통일성은 그들의 행위로부터 발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대는 정치적이다. 그들의 변화의 원동력은 그들이 저항에 대항하여 공유하고 있는 이상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위험은 인류의 존재에 관한 것이므로, 반이상향적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글로벌 위험은 이념과 정치적 프로그램을 벗어나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글로벌 위험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핵심은 나쁜 것이 공통의 좋은 것의 규범적 지평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만하임이 주장하는 세대 분열의 아이디어가 급진화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글로벌 위험은 코스모폴리탄화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코스모폴리탄화는 세계의 대립과 적대감이 외면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코스모폴리탄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세대를 함께 유지하는 것은 글로벌 위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성찰과 반성이다. 이러한 성찰과 반성은 예를 들어, 인류의 존재 위협과 같은 글로벌 위험에 직면하여 만하임이 “활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코스모폴리탄적 전환”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21세기에 대한 사회학을 어떻게 다시 만들 수 있는가? 사회학의 코스모폴리탄적 전환의 중심에는, 즉 글로벌 위험 및 코스모폴리탄 상황이 어떻게 사회학의 기본적 개념에서의 의미의 변화로 들어가는지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계층에서부터 위험 계층, 위험 국가, 위험 지역으로, 국가로부터 코스모폴리탄적 국가로, 세대로부터 글로벌 위험세대로, 파국으로부터 해방적 파국으로, 합리적 자본주의로부터 자멸적 자본주의 등으로- 세상의 탈바꿈 과정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북반구와 남반구의 패러다임, ‘서구’와 ‘나머지 지역’의 신자유주의적 주장에 더 이상 매몰되어 있지 않고, 알려져 있지 않은 국경관계에서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글로벌 타자들도 동시에 포함하는 탈바꿈 과정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구조적 형태의 코스모폴리탄 연구에서 (진단적, 중간 범위의) 코스모폴리탄적 이론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프로젝트에서 코스모폴리탄적 이론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
글·울리히 벡 Ulrich Beck
세계적인 석학이자 저명한 사회학자인 그는 1944년 독일 포메른 주의 슈톨프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을 수학했다. 1972년 뮌헨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뮌스터 대학교와 밤베르크 대학교 교수, 독일 바이에른 및 작센 자유주 미래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09년에 은퇴한 후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연구 및 집필을 하고 있다.
현재 뮌헨 대학교 사회학 교수, 사회학 연구소 소장, 런던경제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위험사회>, <성찰적 근대화>,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 세계>, <사랑은 지독한 혼란>(공저), <장거리 사랑>(공저) 등이 있다.
이 글은 지난달 8일, 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이사장 한상진)과 국회기후변화포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기후변화센터의 주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한 울리히 벡의 원고이며, 주최 측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요약, 게재한다.
(1) Gordon Walker 및 Kate Burningham(2011), ‘홍수 위험: 취약성 및 환경적 정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불평등의 증거 및 평가’, 31(2): 217
(2) Fuyuki Kurasawa(2007), <글로벌 정의의 작업? 규범으로서의 인권>, Cambridge 대학출판부; Fuyuki Kurasawa(2004):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탄주의: 대안적 세계화 그리고 구속력이 없는 연대의 생성>, 유럽 사회학 기록보관소 45(2): 233-255
(3) Line Marie Thorsen(2014), <예술 및 기후변화: 미학의 세계화/세계화의 미학?> 미발표 논문, Kiyomitsu Yui(2013),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기후변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부터 “이것은 후쿠시마가 아니다”까지>, FMSH-Working-Paper-20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