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정부, 대량학살에 ‘석연찮은 침묵’
스리랑카 북서 해안의 무투르 지역에서 반군단체인 ‘타밀호랑이’와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던 2006년 8월 4일 프랑스 ‘기아대책기구’(ACF) 소속 17명이 차례로 목덜미에 총알을 맞고 살해되었다. 이 범죄는 고의로 자행되었다. 20~40살의 여성 4명과 남성 13명은 교전이 벌어지던 순간에도 인도주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폭격하고 기관총을 발사하는 상황에서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흔하게 발생한다. 때로는 10여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무투르 지역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기아대책기구는 이 사고가 치열한 전투의 결과라고 결코 믿지 않았고, 우연이나 오발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베일에 가려진 구호단체 학살
이 구호단체는 ‘냉정한’ 처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말한다. 구호단체는 희생된 17명이 무투르 지역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이고 ‘인도주의 봉사자임이 확실히 판명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 단체는 초기에 정부 당국과 협력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경찰과 군대가 기아대책기구와 국제적십자위원회에 범행 장소를 방문하도록 허락해준 시점은 이미 사흘이 지난 뒤였다. 하여튼 전투는 중단되었다. 늘 그렇듯이, 스리랑카 당국은 타밀 ‘테러리스트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주장이 먹혀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몇몇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전쟁범죄’를 언급하며 수사를 요구했다.
무투르의 학살은 그때까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여론에 충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사진에서 보는 이국적인 스리랑카 사람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스리랑카인들이 일상적으로 폭력·고문·납치·즉결처분·실종, 그 밖의 잔혹행위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제적인 반발이 확산되었는데, 그중 유럽연합과 비정부기구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러 가지 조사 절차가 단번에 마련되었다. 2006년 8월 15일에 법정에서 최초 심리가 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해 11월에 라자팍세 대통령은 8월의 학살과 다른 15가지의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할 9명의 스리랑카 인사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 안을 받아들였다. 콜롬보 주재 외국 대사들의 압력을 받은 대통령은 ‘국제저명인사그룹’(IIGEP)(1)에 속하는 다양한 분야의 ‘저명인사 11명’에게 학살 조사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기아대책기구와 저명인사그룹이 짐을 싸서 떠난 지금, 국제 공동체는 이 방법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하고, 스리랑카 정부가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프랑스 비정부기구의 한 보고서는 그러한 점을 이렇게 명백히 밝히고 있다. “기아대책기구는 무투르의 참사 발생 후 만들어진 조사 절차를 통해 18개월 이상 세 사건을 추적했지만, 전쟁범죄의 직접 책임자와 명령계통 상의 책임자를 공식적으로 찾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있다.”(2) 보고서는 또한 스리랑카 당국이 사건을 둘러싼 상황들을 명시적으로 은폐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상당수의 사법적 그리고 수사상 절차 오류, 법적 절차의 불투명성과 효과적인 수사가 불가능했던 점 때문에 “우리 회원들의 살해범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정부의 소극적인 진상조사
기아대책기구의 말을 들어보자. “군대도, 경찰도 필요한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학살이 발생한 시점과 2006년 8월 7일 범죄 현장에 최초로 공식 접근한 시점은 2일 내지 3일의 차이가 있다. 희생자 주검 수습이 진행되는 도중에 당국은 범죄현장을 보존할 의지도, 검시를 하기 위해 주검들을 운반할 의지도 전혀 없었다. 경찰은 반군들이 학살의 책임자라고 선언함으로써 편파성을 드러냈다. 그 지역의 총체적인 불안한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짧은 조사 기한과 당국의 무책임한 행동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3)
‘희생자들의 인권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사실’을 용인할 수 없었던 기아대책기구는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고 국제적인 학살 조사를 요구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은 국제조사위원회와 수많은 법률가와 노련한 조사원들을 거느린 저명인사그룹의 협력에 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전망은 밝지 않았다.
2007년 2월에 만들어진 저명인사그룹은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라자팍세 대통령은 이 그룹의 역할을 축소해버렸다. 그룹 멤버들은 조사위원회가 배타적으로 실시한 조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인권 분야의 국제 규범과 절차들을 조사원들이 엄격히 존중하고 있는지 확인할 뿐이었다.
대통령 관저의 예산을 써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만든 조사위원회는 별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실질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모든 조사 절차에 참가하는 법무장관과 법무팀이 조사위원회를 공개적으로 조정했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곳곳에 존재했다. 게다가 조사위원회는 사법부에 서류 심리와 심문 지도를 위임했다. 이런 파행, 이해 대립, 중립성 부재를 목격한 저명인사그룹은 당국에 여러 번 이의를 제기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의 이중 플레이
10개월 동안 거의 80번의 비공개 심문을 실시했지만 불만의 목소리는 높아갔다. 저명인사그룹이 일을 진행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느꼈고, 그들의 말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증인들을 경찰, 군인들과 대면시킬 때는 신분이 보호되어야 함에도,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2007년 말 저명인사그룹은 국외에 피난처를 마련한 증인들의 증언을 화상회의를 통해 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정부는 곧바로 거부했다.
처음의 약속과 달리 스리랑카 당국은 조사의 원만한 진행을 방해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군인, 경찰, 법관과 공무원들은 국가안보를 들먹이며,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조사위원회를 만든 고위 당국자들은 위원회가 저명인사 그룹과 협력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수단을 결코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방해 작전에 직면한 11명의 멤버들은,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몇 달 전 기아대책기구가 그랬던 것처럼, 2008년 3월(위원회 설치 후 꼭 1년 만에) 스리랑카에서의 활동을 포기했다.
이 그룹은 조사 절차가 ‘결코 투명하지 않았으며 국제 규범에 맞지도 않았다는’ 성명을 당시 발표했다. 그들은 해결 절차의 가장 결정적인 결점들을 계속 지적했다. 조사받는 모든 계급 간의 이해 대립이 심화된 점, 잘못된 심문 일정, 최고위층이 조사에 충실히 협력하지 않은 점, 효과적이고 철저한 증인 보호 시스템의 부재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근본적인 장애물들 때문에 저명인사그룹은 조사를 잘 이끌어갈 정치적, 제도적 의지가 스리랑카 당국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냈다.
그들은 떠났지만, 사건 발생 2년 뒤에도 여전히 무투르 학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의 이름과 소속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눈앞에 다가온 콜롬보 당국의 군사적 승리는 스리랑카가 인권을 존중하는 인권국가로 돌아오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인가? 군사적 승리가 수많은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할 것인가? 경찰과 군인이 연루된 사건에서는 특히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데, 이 경우가 그런 듯하다.
글/롤랑 피에르 파랭고 Roland-Pierre Paringaux
번역/고광식
<각주>
(1) ‘국제저명인사그룹’(IIGEP)은 11명으로 구성돼 있다. 브하그와티(인도가 추천함), 마루키 다루스만(인도네시아), 아더 드웨이(미국), 파세르 교수(네덜란드), 칼말 후세인 박사(방글라데시, 인권고등판무관이 추천함), 베르나르 쿠쉬네르(장피레르 코트로로 교체됨. 프랑스와 유럽연합이 추천함), 부르스 매튜스 교수(캐나다가 추천함), 안드레아스 마브로마티스(키프로스, 스리랑카 정부가 추천함), 나이겔 로드리 경(영국), 이반 쉬어러 교수(오스트레일리아), 요조 요코타 교수(일본).
(2) 연구 보고서 ‘스리랑카 무투르 지역의 학살: 정의를 위한 전투’(Sri Lanka. Le massacre de Muttur: un combat pour la justice), 2008년 6월. www.actioncontrelafaim.org.
(3) 기아대책기구는 스리랑카 인권위원회 지역 사무국에도 제소했지만 여지없이 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