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언론의 우크라이나 사태 독해법

2014-08-26     마티아 레몽

지난 7월 17일,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세력이 통제하고 있는 지역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피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러시아 언론은 각종 근거 없는 편 가르기식 정보들을 퍼뜨려 갈등을 부추겼다. 분별력과 정확성을 잃은 언론의 이러한 행태에 프랑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2010년 2월 우크라이나 대선,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결선 투표에서 상대 후보인 율리아 티모셴코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며 승리했다. 이 대선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조아오 소아레스 의장이 “민주주의의 놀라운 증거”라고 평가할 정도로 흠 없는 선거이기도 했다.(1) 그런데 개표 결과는 우크라이나가 둘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동부와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반면, 율리아 티모셴코는 서부와 수도 키예프가 포함된 중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사실, 프랑스 언론은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의 선거나 국민의 일상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지난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오렌지색은 2004년 대선 때 야당을 상징하는 색으로, 친러시아적인 여당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결국 재선거를 치르게 했던 시민 혁명-역주)이 실패로 끝나자, 프랑스 언론의 실망은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러던 프랑스 언론이 작년 11월 말부터 시작된 반정부 민중 시위의 진앙지인 마이단(독립) 광장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내 전문가와 대부분의 언론은 우크라이나 갈등을 놓고 왜곡에 가까운 자의적 해석으로 일관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에 대해 우호적인 ‘몇몇’ 우크라이나 국민은 어느새 ‘모든’ 국민으로 둔갑했고, 경찰 병력을 남용하는 부패한 정권에 반대하는 ‘몇몇’ 국민은 4년 전 대선에서 뽑힌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2012년 총선으로 구성된 그의 정부를 축출하자고 외치는 ‘모든’ 국민으로 바뀌었다.

우크라이나 갈등 놓고 자의적 해석 난무

크림 반도의 러시아 귀속 찬반여부 주민투표가 준비되면서부터 우크라이나 역사의 모호성과 함께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국민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이 드러났다.

‘좋은’ 친유럽연합파와 ‘나쁜’ 친러시아파 간의 대립 구도 설정은 금세 촌극과도 같은 상황들을 빚었다. <르몽드>지는 “이와 같은 유럽을 향한 사랑 고백은 도대체 얼마 만에 보게 되는가?”(2013년 11월 25일자)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법치국가의 덕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곳 국민들에게 유럽이란 자유·민주주의·현대화의 희망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2013년 우크라이나의 시위대는 개혁을 원하고 순수하고 민주적인 국가, 즉 유럽국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12월 2일자)라며 수많은 친유럽주의 사설들을 쏟아내며 우크라이나의 친유럽 운동을 지원 사격했다. 이러한 열정적인 ‘친유럽 합창’에는 이런 ‘곡조’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리베라시옹>지의 논설가 프랑수아 세르장은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국가도 있다”(12월 12일자)며 감탄했고, 프랑스 아르테(Arte) 채널의 시사 토론방송 ‘28미뉘트’에서는 마이단 반정부 시위에 도취된 게스트들의 발언만이 이어지기도 했다.(2)

 

그로부터 두 달 뒤, 주간지 <마리안느>의 논설위원인 자크 줄리아르는 “현대 역사의 총애를 받는 축복받은 자녀인 유럽 국민이 자신들의 공동의 집인 유럽에 대해 까다롭게 트집을 잡는 동안,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자유를 부르짖던 투쟁가들은 유럽 국기 아래, 유럽의 이름 아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2014년 1월 31일자)고 꼬집었다. 그러나 1999년 코소보 전쟁의 경우처럼, 냉전에 대한 이런 수사학적 표현들이 모든 프랑스 언론을 이념적으로 통일시켜 버린 것은 아니었다. 좌로 <뤼마니테>, 우로 <피가로>와 <발뢰르 악튜엘> 등의 언론사들은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춤사’'에 합류하지 않았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지난 2월 9일 마이단 시위대 앞에서 “진정한 유럽국민이 모인 곳은 바로 여기, 마이단 광장이다!”라고 소리친 인물이다. 그 영향은 곧장 프랑스 신문과 방송에까지 퍼져나갔다.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글을 모방해 우크라이나 군중 앞에서 외쳤고, 그 내용을 온라인 뉴스미디어 허핑턴포스트 프랑스판(3월 5일자)에도 실었다. 글뤽스만은 “우리는 붉은색, 또는 검은색으로 물든 전체주의 흔적에 맞서기 위해 뭉쳤다. 굳건히 버티라,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당신들의 용기에 달려있다. 너, 마이단의 아들과 딸이여, 너는 유럽연합 깃발에 수놓인 별이다”라고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많은 서구 언론인들처럼, 글뤽스만도 마이단 광장에서 휘날리고 있는 검정과 빨강 줄무늬의 깃발이 ‘나치독일’과 손을 잡기도 했던 극우 반공 세력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OUN)’의 군대 ‘우크라이나 반란군(UPA)’의 깃발이라는 것은 몰랐던 듯하다.(3)

한편 지난 3월 22일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많은 논설과 비평들이 열정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당시 마드리드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 수십 만 명은 유럽연합이 제시한 긴축재정안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언론은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시 몇 안 되는 신문들만이 시위 행렬 변두리에 있는 다양한 군중에 대해서만 다룰 뿐이었다.(4)

그런데 지난 2월 말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크림 반도 주민투표가 준비되고, 곧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는 등 언론을 들썩이게 할 상황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마이단에서처럼 곳곳에 모인 군중은 (그들의 눈에 부당하다 여기는)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모여 연좌시위를 열고 기동대에 화염병까지 투척하면서 자유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럽이 선택했던 정부가 비방의 대상이 되었고, 대중은 푸틴을 찬양하고 있었다.

같은 원인이 늘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최근 상황들로 인해 언론은 포화처럼 기사를 쏟아냈다. 특히 <르몽드>에서는 ‘러시아 vs 마이단’(2월 21일자), ‘끝없는 원조, 러시아 개입의 핑계일 뿐’(3월 7일자),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고자 뭉친 우크라이나 국민’(3월 8일자), ‘크림 반도, 불명예스러운 주민투표’(3월 14일자), ‘푸틴과 원초적 본능’(3월 14일자) 등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에 대한 비판 기사가 점점 많아졌다.

각종 탄원서도 줄을 이었다. <리베라시옹>은 크림 반도 주민투표에 대해 “러시아가 능숙하게 이끌어간 정치적, 군사적 폭동”이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례없는 아주 위험한 예”(3월 16일자)라고 보았다. 이번 사태의 선례로 1974년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 1975년 모로코의 서사하라 점령, 같은 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무력 합병, 1948년 이래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5) 등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 어울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국제 사회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눈에 가장 적절한 하나의 비교 대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르푸앙>을 통해 “히틀러는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략을 위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수데텐 지역의 독일 합병을 요구했다. 이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가?”(3월 6일자)라며 비꼬았다. <마리안느>의 논설위원 자크 줄리아르도 같은 날 “푸틴의 러시아는 1939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할 때 사용한 방법과 완전히 동일한 논리를 쓰고 있다. 당시 히틀러도 수데튼 지역 거주 독일인들을 보호하겠다고 체코슬로바키아에 들어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에스트 프랑스>지 역시 며칠 후 비교적 침착한 어조로 “이번 상황은 1938년 히틀러의 수데튼 합병을 떠올리게 한다”(3월 16일자)라고 분석했다.

 

한편 <르몽드>는 또 다른 접근법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뜨렸던 루마니아 내전”(2월 25일자)을 비교 대상으로 꺼내든 것이다. 언론이 이 정도 규모의 분쟁들을 언급하는 것은, 요약하자면 온갖 미덕으로 포장된 주체(유럽, 아메리카 등)와 정신 분석이 필요한 개인 간의 대립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담 후세인, 무아마르 카다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있었고, 이제는 러시아 대통령 차례인 것이다. 프랑스의 문화 잡지 <텔레라마>는 “푸틴의 광기는 어디까지인가?”(3월 19일자)라는 질문을 던졌고, <르파리지앙>지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당신에게 블라디미르 푸틴은 두려운 존재입니까?”(3월 2일 게시)라는 설문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기자 카롤린 푸레가 라디오 채널 ‘프랑스 퀼튀르’를 통해 -사실과 다르긴 했지만- “무장 분리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 공무원 세 명의 눈을 칼로 파냈다”(2014년 5월 6일 방송)고 비난하는 것을 들은 청취자들이라면 그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푸틴에 대한 언론의 과도한 비판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아주 흥미진진한 연구 주제가 되기도 한다. 독일 언론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월 20일 마이단 광장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낳은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특히 사망자 대부분이 시위대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날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독일 방송 아에르데 채널(ARD)이 조사를 실시했다. ARD는 조사를 통해 시위대가 점거한 건물에서도 총탄이 발포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며 시위대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다는 확신에 제동을 걸었다.(6) 또한 이튿날인 2월 21일 분명히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과 반대파 사이에 합의가 체결되었는데, 밤새 결렬되고 만 배경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많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거의 없지만 러시아 정권의 영향이 있었다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서구권의 영향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독일 일간지 <빌트(Bild)>는 우크라이나가 과거 이라크전에서의 만행으로 유명해진 미국 민간 용병회사 ‘아카데미’(구 ‘블랙워터’)의 요원들을 기용했다고 주장했다(5월 4일자). 뿐만 아니라 도네트츠크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도 밝혔다. 15년 전 코소보해방군(UCK)이 그러했던 것처럼, ‘착한’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그들에게 주어진 착한 가면 아래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프랑스 언론이 오래전부터 친범대서양주의와 반범대서양주의로 나누어왔던 이념적 기준선도 흔들렸다. <르몽드>, <리베라시옹>과 라디오 채널 <프랑스 앵테르> 등이 모든 책임을 러시아로 돌리자 <뤼마니테> 등 언제나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언론의 반박이 터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러시아를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연장선상이 아닌 신보수주의의 장으로 여기고 있는 논설위원들 역시 나서기 시작했다.(7) 정치 논객 에릭 제무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는 올랑드가 이끄는 프랑스에 대한 일종의 안티 세력이 되었다. 러시아는 다문화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게이로비’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이슬람주의와 맞서 싸우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적 뿌리를 부정하는 ‘정교회’를 부활시켰다. 심지어는 공산주의 혁명가인 레닌을 비난하고 스탈린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프랑스의 지식인층이 수십 년 전부터 해온 것들과 정반대의 모습이다”라고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프랑스의 마지막 드골주의자, 주권주의자들에게 푸틴은 쇠퇴하는 서구권의 그늘로부터 나라를 수호해낸 장본인”이라고 덧붙였다.(8)

결국, 반란으로 세워진 새 정부와 긴밀히 연결된 극우 세력의 각종 폭력 행위들, 크림 반도의 주민투표 시행,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 발발 등으로 인해 언론의 일방주의적인 논조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모든 분쟁에서 그러하듯 각종 선전 활동이 맹위를 떨쳤지만, 대중이 이를 빠르게 이해하면서 선악구도의 허상은 상업적으로 힘을 잃게 됐다.

우선, 서구의 ‘러시아 사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렉스프레스>의 크리스토프 바르비에 편집장은 방송을 통해 “크림 반도가 완전한 러시아 귀속을 결정한다고 해도, 이는 이상할 것 없는 결정이다”(프랑스 앵테르, 3월 22일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렉스프레스>, 3월 26일자)와 철학자 뤼크 페리(<르피가로>, 3월 20일자) 역시 이와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심지어 프랑스 국영방송 테에프앙(TF1)은 지난 6월 4일자 저녁 8시 뉴스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며 푸틴 대통령의 발언을 내보냈다.

더 이상 이미지만으로 우크라이나의 시위대를 지지하고 변호하기가 어렵게 됐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16일, <프랑스 2> 뉴스를 통해 동우크라이나 주민들이 무장해제한 채 전차를 마주보고 서있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사실을 왜곡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5월 2일에는 남부 지역인 오데사의 노동조합 건물에 화재가 났다. 극우 민족주의 단체 ‘프라비섹토르(Right Sector)’의 당원과 공모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시작된 불로 인해 ‘반(反)마이단’ 세력 30여 명이 불에 타 숨졌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AFP통신이 우크라이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 비밀경찰의 도발”(7)이라고 발표했는데, 휴대폰으로 오고간 수많은 증거 영상 덕분에 참극의 원인이 드러났다. 다만 만일 희생자들이 우크라이나의 새 정권을 반대하는 대신 유럽 깃발을 흔들다 쓰러졌다면 더 큰 분노의 향연이 펼쳐졌을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글․마티아 레몽 Mathias Reymond

몽펠리에 대학교 조교수, 언론비평단체 아크리메드(Acrimed) 소속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피가로>, 2010년 2월 8일자

(2) 2014년 2월 20일 ‘데일리모션(www.dailymotion.com)’에 게재된 영상 ‘Ukraine: l'Europe peut-elle enrayer la violence?(우크라이나: 유럽이 폭력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3) 엠마뉘엘 드레퓌스, ‘우크라이나의 극우 민족주의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0월호

(4) Blaise Magnin, ‘Médias de France, loin de l’Espagne et des mobilisation sociales contre l’austérité’, Acrimed.org, 2014년 3월 27일

(5) Susan Watkins, ‘Annexations’, <New Left Review>, 2014년 3-4월

(6) Philipp Jahn, Olga Sviridenko, Stephane Stuchlik, ‘Todesschüsse auf dem Maidan’, ‘Monitor’, ARD, 2014년 4월 10일, www.ardmediathhek.de

Gabriel Gatehouse, Jack Garkland, ‘Under Sniper fire in Ukraine uprising’, ‘BBC Newsnight’, 2014년 2월 28일, www.bbc.com

(7) AFP통신 속보, 2014년 5월 2일 저녁 10시 28분, 이후 여러 언론사 사이트로 퍼져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