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노동운동을 막을 수 있을까?

2014-08-26     무스타파 바슈니

생활 필수품에 대한 정부지원이 줄어드는 가운데 최근 물가까지 오르자 이집트 국민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라마단 기간이 끝나는 시기와 맞물려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하젬 엘 베블라위 총리 내각의 퇴진으로 귀결된 2014년 2월의 파업 물결은 이집트 노동운동사의 큰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무슬림형제단의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이 축출된 2013년 7월 3일 이후 처음으로 섬유, 방적, 교통, 도시청결, 우편, 보건, 사법 분야 등 공공서비스와 국영산업 전반에 걸쳐 대규모 파업이 실시되었다. 여기에 민간분야에서도 10여 건의 파업과 여러 차례의 의견발의가 이루어졌다. 2014년 2월 한 달 동안 1만1천여 건의 연좌데모, 작업중단이 발생했으며, 또한 시위에 25만여 명이 참여했다고 엘 마흐루사(El‐Mahrusa) 사회경제개발 센터는 집계했다. 이는 1월 50건, 3월 400건 미만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시위물결이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그 규모 때문만이 아니라 흐름의 변화 때문이다. 2013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수십만 명이 참가했지만, 모르시 대통령의 몰락 이후에는 규모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이때부터는 산발적인 소요만이 뜸하게 일어났지만 그마저도 2013년 7월 3일 쿠데타로 집권한 새로운 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공권력은 집단적 움직임을 방해했고, 파업에 참가한 이들과 그 주동세력은 무슬림형제단의 일원으로 몰려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협박은 효과를 발휘했다. 대선과 총선에 이은 새로운 헌법 채택을 골자로 한 ‘로드맵’이 발표되자, 정부 산하의 이집트노조총연맹(ETUF)과 두 주요 독립노조-2011년 1월 혁명 당시 탄생한 이집트독립노조연맹(EFITU)과 민주노동회의(EDLC)-는 새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하고 새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업을 포기하겠다는 공식성명에 서명했다. EFITU 연맹회장 카멜 아부 에이타의 노동부 장관 임명은 상당한 내부적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그는 사실상 당국의 파업 억압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국가와 무슬림 형제단의 양극 구도를 넘어선 노동운동

2014년 2월 노동운동의 투지가 되살아난 것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계는 “한쪽에는 국가, 다른 한쪽에는 무슬림형제단”이라는 양극화 구도를 있는 힘을 다해 결국 타파한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무슬림형제단과 무관하게 정부를 향한 민중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권력당국은 시위가 무슬림형제단이 주동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반기를 든 곳은 2012년과 2013년 반모르시 파업이 촉발되었던 섬유, 교통, 보건 분야 등이었다. 이로써 노동운동은 새로운 정부의 사회경제적 정책 실패를 밝혀냈을 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들먹이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부의 시도까지 백일하에 드러냈다.

주요 요구사항은 최저임금의 완전한 보장이었다. 최저임금은 진작 도입되긴 했지만 노동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모욕적 도전으로 받아들일 만큼 불완전하고 편향적인 상태였다. 2013년 9월, 최저임금은 2008년부터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대로 1,200이집트파운드(1)로 정해졌다. 하지만 최저임금의 혜택은 대략 600만 명의 공무원에게 주어졌고, 중앙통계청에 따르면 이중 3분의 2는 이전부터 최저임금의 혜택을 받아왔으므로 최저임금의 신규 수혜대상은 그만큼 적었다. 정부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와 철도, 우편, 교통 등 국가산하기관 직원들을 합해 2천 4백만 명의 공공노동자 중 극히 일부였던 셈이다.

한편 민간분야의 노동자들은 그들대로 급여가 삭감되어 평균 주급이 최대 300파운드 이하로 한정되었다. 대부분 노동자들의 수입은 노조가 요구한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쳤다. 결국 이처럼 편향된 최저임금의 도입은 물가상승의 빌미만 제공했고, 급여가 오르지 못한 이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노동운동은 주목할 만했지만 그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엘 베블라위 정부를 대신해 들어선 내각은 이전 정권의 장관들이 꽉 잡고 있었다. 이브라힘 메흘렙 신임 총리는 카이로 북부의 대규모 산업도시 마할라흐를 방문했지만 “우리에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마법의 지팡이가 없습니다”(2)라며 노동자들이 무조건 참을 것을 요구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 정권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나헤드 알 아슈리 노동부 장관은 수에즈 노조가 밝혔듯 항상 고용주의 편을 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이로 북부의 슈브라‐엘‐케이마에서 1,4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 크리스탈(Crystal)의 노동자들도 2014년 5월 파업 당시 자신들에 대한 그녀의 편향된 태도를 비난하며, 지난해 11월 전임 노동부 장관 당시 서명한 협약의 이행을 촉구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파업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여러 노조간부가 ‘공공질서 혼탁화’, ‘폭력행위 유발’ 및 ‘국가안전 위협’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국가안전 위협'이란 미명 아래 노조탄압

경찰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우편당국이었다. 우편노조 대표들은 시위 초기부터 체포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국민민주당(NDP) 전 의원이 소유한 도자기 기업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안전당국은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협박하여 간부 25명을 사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점을 찍은 사건은 아무래도 포트사이드에서 이집트 프로필렌&폴리프로필렌 공사(EPPC) 노동자 3명을 체포한 일이다. 직원 대표인 이들은 근로여건 개선과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하기로 하고, 관련법에 따라 시위 사전신고를 위해 경찰서를 방문했다. 그런데 경찰이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5월 1일 노동절을 불과 며칠 남겨둔 시점이었다. 4일간의 구금 후 풀려난 이들은 동료들이 조직한 체포 항의 파업에 즉각 동참했다.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그 성과의 미미함 사이의 극명한 대비는 새로울 것이 없다.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혁명적 과정을 진전시키지만,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판도를 완전히 뒤집지는 못한다. 2011년 1월 민중봉기 이전에 노동운동은 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당시 총 2백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파업에 동참했다. 무바라크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점거시위를 확대하고, 정부 간부를 인질로 삼고, 총파업을 촉구했던 노동계였다. 하지만 무바라크 정권이 퇴진하자마자 파업은 혁명을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준엄한 심판에 직면해야 했다. 2011년 2월 정권을 잡은 이집트군최고위원회(SCAF)는 파업을 금지하고 파업 주동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법을 정했다. 이 조치는 나중에 모르시 정권에서도 반복되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로 나타났다.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져 간 것이다. 이집트사회경제정의센터(ECESR)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1년 동안 발생한 파업 건수가 혁명 전 10년 동안 발생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국제개발센터의 조사 결과, 이듬해인 2013년 첫 5개월 동안의 파업횟수가 2012년 1년 동안보다도 더 많았다.

권력의 억압 말고도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노동조합 내부의 갈등이었다. 노동조합은 밑바닥에서부터의 요구사항을 위로 전달하기보다는 파업의 강경기조를 억누르는 데 더 바빴다. 1957년 이래 상황의 주도권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창립한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이 쥐고 있었다. 국가에 완전히 종속된 ETUF는 노동운동의 발전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업과 시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2008년 독립노조들이 만들어지면서 ETUF의 독점 시대가 막을 내렸다. 서로 대립하던 노동자위원회 간에 힘을 합쳐 만든 새 노조들은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한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고, 대규모의 시위대를 동원할 수도 있었다. 또한 2011년 혁명의 진원지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을 창립장소로 택한 것도 이집트독립노조연맹(EFITU)에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독립노조 열풍은 거세게 일어났지만 그 희망은 얼마 안 가 사라지고 말았다. 연맹 창립 직후부터 간부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 민주노동회의(EDLC)가 창설되면서 연맹은 분열되었다. 단체들 사이에서는 국제사회에서나 정부와의 협상에서 이집트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자리를 독점하기 위한 경쟁이 점점 더 격화되었다. 결국 2013년 7월 3일 이후 일각에서 압델 파타흐 시시 총사령관 세력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노동계는 또다시 내부분열을 겪었다.

새로운 물결을 이룰 노동운동의 조짐

공식 노조총연맹은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에 힘입어 세력을 더욱 확고히 했다. 대중교통, 우편, 철도업계나 마할라흐의 현장에서 연맹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동안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쪽은 주로 독립노조, 간혹 공식노조의 지역지부들이었다. 연맹 본부는 관료제적 정체와 분파 대립이 심해지며, 2013년 7월 3일 이후 새로 들어선 권력과 손잡고 파업을 거부하면서 어용의 길로 들어섰다. 공식 노조총연맹 동료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처럼 취약한 노조 조직의 모습은 크게 보면 혁명 이후 이집트 정치권의 변화를 설명한다. 튀니지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명확하다. 튀니지 노총(UGTT)은 민중봉기가 일어난 초기에는 주저했지만 밑에서부터의 요구에 힘입어 정치에 적극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집트는 달랐다. 대규모 노동자 시위대가 혁명 전에도 그 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퇴진한 정권과 다른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지난 6월 8일 압델 파타흐 알-시시 총사령관의 대통령 취임 이후 정부는 노동자들의 근로여건 개선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냈다. 일찍 일어나 더 열심히 일하고, ‘추상적인’ 요구는 잊으라는 수사만을 늘어놓으며 국민들을 독려하면서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과감한 긴축정책을 단행했다. 공공부채 감축, 에너지 분야 보조금 삭감, 세목 신설을 골자로 한 예산안 재검토 지시가 내려졌다. 연료가격이 치솟았지만, 분야마다 그 상승폭이 달랐다. 대중교통 차량에 필요한 천연가스 가격은 175% 상승한 반면 소비량이 많은 공장용 연료는 30~40% 상승에 그쳤다. 마찬가지로 택시와 소형차용 휘발유 가격은 75% 상승했지만 고급휘발유 가격은 40%만 상승했다. 결과적으로 교통비는 걷잡을 수 없이 올랐고 전국적으로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노동운동에도 새로운 물결이 일어날 조짐이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택시기사들이 영업을 중단하고 시위대를 조직하고 있다.

 

글·무스타파 바슈니 Moustafa Bassiouni

카이로 주재 언론인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집트파운드 시세는 불안정한 가운데 하락세를 보였다. 2014년 5월 말 기준 환율은 100이집트파운드=10.27유로이다.

(2) A‐Masry al‐Youm, 카이로, 2014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