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의 분노가 들끓는 스리랑카

2014-08-27     세드릭 구베르뇌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의 게릴라군을 붕괴시킨 지 5년이 지나 스리랑카 정부와 군은 전투지역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여러 도시는 정상적인 삶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리랑카는 진정한 화해나 정치개혁도 없이 다수민족인 싱할리족과 소수민족인 타밀족 사이에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소수민족이 위치한 북부 지역의 불만과 분노가 들끓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군이 2009년 1월에 장악한 스리랑카 북부의 킬리노치치는 20년 동안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군의 ‘수도’였다.(1) 킬리노치치는 이제 내전의 승자에 의해서 전시성 도시로 활용되고 있다. LTTE군을 분쇄한 군대의 수장 마인다 라자팍세 대통령은 이 도시를 공식적으로 ‘테러에서 해방된’ 스리랑카 북부의 시범도시로 만들고자 한다. 영자 문구 간판은 ‘평화, 희망, 조화의 도시 킬리노치치 방문 환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여기저기 탄흔 구멍이 있는 파괴된 건물들이 아직도 보이지만 외견상으로는 평온한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았다. A9번 고속도로는 새로 건설된 것처럼 깨끗하고, 20년 동안 끊겼던 철도는 대도시 바부니야를 30분 거리로 연결해 준다. 대부분의 검문소와 지뢰밭은 없어졌다. 상점과 호텔들도 생겨났다. 최후의 격전에서 파괴된 저수탑만이 유일하게 땅에 쓰러진 채로 있었다. 엄청난 전쟁의 잔해가 증인이 된 듯 폐허 근처 간판에서 ‘더 이상 파괴는 없다’를 읽을 수 있었다.

한 공수부대 소령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우리를 어린이 놀이터와 분수로 꾸며진 4층 건물로 데리고 갔다. “하모니 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타밀 디아스포라’가 선전하는 것과는 반대로 킬리노치치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면 알 거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타밀 디아스포라’는 주로 유럽과 캐나다에 거주하는데 그 수가 대략 75만 명에 이른다.

1층에는 수십 명의 타밀 소녀들이 제복을 입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타밀호랑이군에 복무했었다. 정부군이 취업 자리를 마련해 줬다고 소령이 알려줬다. 그런 다음 LTTE군 중령으로 20년 동안 싸웠던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나는 150명의 병사를 내 지휘하에 두고 있었다. 우리 장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프라바카란을 만나 지시사항을 하달 받았다”고 설명하는 37세의 낙스파단은 한 발을 의족에 의존하고 자기 성을 밝히기 꺼려했다. 그는 2009년 초 포위당했을 무렵, 타밀호랑이 전사가 생포될 경우 삼켜야할 청산가리 캡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항복했어, 지긋지긋했지. 포로수용소에서 군이 나에게 목공 직업 교육을 제안했지. 지금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 현재는 과거 타밀호랑이군 때보다 형편이 더 좋아. 가까운 일가친지들은 내 선택을 이해 못 하지. 하지만 먹여 살려야할 애들이 세 명이야.”

건물 위층에는 창구에 근무하는 사복 군인들이 사진과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주민들에게 어떻게 직업교육을 하고, 어업용 그물, 젖소, 야자나무 묘목을 어떻게 나눠 주는지 상세히 설명해 줬다. 한 창구에서는 걸프 연안 국가 해외 취업 지원자들을 받고 있다. 그 걸프 지역에는 이미 2백만 명의 스리랑카인들이 취업하고 있다. 또 다른 창구에서는 재판을 하지 않고 처형된 희생자들인 ‘실종자들’과 관련한 진정서를 취급한다. “실종자 가족들은 경찰서보다 여기 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사복의 한 젊은 중위가 주장했다. 신빙성 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국방부 산하 하모니 센터는 실종자 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돈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설문의 형식은 진정자들을 으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LTTE 반군이 귀하의 자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단정할 수 있나? 귀하의 아들 아니면 딸이 정부군에 의해서 납치됐다고 단정할 수 있나? 귀하의 자식을 잡아간 군인들을 식별할 수 있나” 등이 그것들이다.

방문 안내는 계속된다. 우리는 도시 초입에 있는 센치촐라이 고아원까지 따라갔다. 100여 명의 소녀들이 홀에서 얌전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파란만장한 경력의 쿠마란 파트마나탄 고아원장이 도착했다. 왕년에 ‘KP’라는 이름을 가졌던 전사, 목소리와 눈길이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이 60대 인물은 전 세계에서 주요한 지명수배 대상자로 꼽혔던 사람이었다. 1976년 타밀일람해방호랑이 공동 설립자로 30년 동안 무기조달의 책임자였으며, 1991년 라지브 간디 인도 수상의 생명을 앗아간 자살폭탄 공격에 연루됐다고 의심받기까지 했다. KP는 2009년 8월 말레이시아에서 검거되어 스리랑카로 인도되었다. 2012년 10월 석방된 후, 수도 콜롬보의 중앙정부의 비호 아래 전쟁의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마련된 이 고아원을 경영해 왔다. 소령은 예전의 적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우리를 남겨두고 떠났다.

자발적이든 강압에 의한 것이든 디아스포라의 자금지원,(2) 화물선단, 동남아에 있는 확고한 연줄에 힘입어 KP는 반정부 시절 LTTE군을 무장시키는 데 매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2007년 3월, 정부군 부대들이 타밀호랑이 색깔의 전투기에 폭격당해 혼비백산하기까지 했다. 타밀호랑이군은 공군력을 보유한 최초의 게릴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곡예와 같이 어려운 일을 성사시켰는지 전 군수참모에게 던진 질문에, “우리는 전투기들을 컨테이너에 넣어 수송하기 위해 분해했다”며 겸허한 태도를 취했다. LTTE의 최고 지도자 프라바카란이 어떤 사람이었나? “사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 고집만 세웠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귀에 거슬리는 말을 못 했다. 너무 위험했다.” 한동안 꺾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 타밀호랑이군의 패배를 어떻게 분석하는가? “2001년 9·11 사태 이후 프라바카란은 세상이 변한 것을 감지하지 못 했다. LTTE는 변화했어야 했다. 협상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2002년 2월 조인한 성공적인 휴전협정에도 불구하고, LTTE는 군사력 우세를 과신한 나머지 섬 북부와 동부에 주권독립국가 건국을 주창하면서 강경일변도의 입장을 고수했다. 스리랑카 정부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 공세로 전환했다. “미래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론지으면서 “무력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너무 안타깝다. 너무 많은 목숨이 희생됐다”고 감정을 나타냈다. 게릴라 노전사는 힌두교 정신세계에 피난처를 마련했다고 털어 놓았다. 자기를 배반자라고 비난하는 ‘타밀 디아스포라’ 사람들에게 “그것은 여기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들이다. 프라바라칸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 말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한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KP는 “군대가 너무나 많은 농지를 점령하고 있다. 그것은 타밀인들이 탄압 받는다는 감정을 갖게 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큰 문제를 군과 정부에 거론한다”고 승자를 향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우리는 군사령부에서 관할 최고지휘관 수단타 라나싱헤 육군 소장 관구사령관을 만났다. 사령부 건물은 널찍했다. 사령관실로 가는 계단 양쪽 벽면에는 두 벽화가 마주보고 있었다. 하나는 1803년 싱할리 기병대가 영국 침략군을 공격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2009년 5월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호랑이 최후 거점을 분쇄하는 그림이었다. 상관관계가 명약관화하다. 라나싱헤 소장은 전범자(3)로 몰린 다른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기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면서 “그 고발은 부당하다. 정부군이 타밀족을 위해 한 것들을 보라. 우리는 그들을 테러리즘에서 해방시켜 줬다. 이제는 전 타밀 병사들을 포함한 그들 대부분이 우리를 위해 일을 한다! 나는 전 소년 병사들을 재교육하는 데 노력한 우리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미국은 관타나모 실태 이후 훈계할 위치에 있지 못 하다”고 반발했다.

그 군고위층 인사는 군에 의한 토지 압류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테러분자들이 토지대장을 파기했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토지주인의 신원을 확실히 파악하지 않고는 토지를 돌려줄 수 없고 보상해 줄 수도 없다”고 어설프게 정당화했다. 그에 따르면 병력 규모는 3개 사단으로 6천 명이다. 그런 어림은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단만 해도 그 병력수가 7천에서 9천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 군 병력이 장기간 여기 주둔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떠날 이유가 뭔가? 여긴 스리랑카다. 우리는 동원을 해제하지 않을 것이다. 스리랑카 병사는 국가 재건에 참가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섬 북부 어디에서나 군인들이 기반시설 건설에 동원됐다. 그리고 식당, 호텔, 심지어는 농장들까지도 관리 경영하면서 지역 고용과 경쟁하고, 주민들의 분노를 더 살 위험성이 있다.

시내로 다시 들어와 만난 두 명의 60대 타밀 주민들은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 너무 많은 일가친척들이 죽임을 당했거든. 전쟁은 끝났는데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강한 군사력이 주둔하나?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지. 그것은 점령이야. 대여섯 명만 모이면 사복경찰들이 끼어든다니까”라고 증언했다. 하모니 센터를 언급하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선전이야 선전! 대다수 주민은 정부에 반대해”라고 말했다. 수치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9월 지방선거에서 킬리노치치와 자프나 타밀 도시들에서는 자치주의자인 타밀전국연합(Tamil National Alliance, TNA)이 80% 이상을 득표하였다. 이 두 사람은 정부군보다 타밀호랑이군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타밀호랑이군 시절의 모든 게 완벽했다고 말하지는 않아. 어린이 병사들의 경우 안타까웠지. 그러나 지금 정부군보다 LTTE 시절이 더 자유로웠어. LTTE는 우리의 정부였거든.”

우리 증인들은 자기들 뒤를 보더니 염려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두 젊은이가 휴대폰 문자를 치면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화에 끝을 맺었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평야지대 깊숙이 들어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조그마한 외딴마을 주민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몇몇은 팔다리 등이 잘려 있었다. 그들은 최후의 전투에서 정부군이 어떻게 무차별하게 사방에서 포격했는지 얘기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일가친척을 잃었다.” 한 처녀는 군인들이 자기에게 “매우 악하게” 굴었다고 얘기하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정부는 각 가정에 5만 루피(290 유로) 지급을 약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2만 루피(115 유로)만 수령했다. 도움은 특히 친정부 부역자들에게 돌아간다”고 한 농민이 주장했다. 인권운동가들은 그 말들을 사실로 확인해 줬다. 마을 사람들은 “어쨌든, 우리는 차가 없어. 지금 건설 중인 도로들은 더 많은 병사를 데려오는 데 사용될 뿐이야. 그들이 두려워.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어”라고 지적하며, 자기들이 점령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또한 LTTE 시절을 아쉬워하면서 “부정부패와 범죄가 없었고, 재판은 공정하게 이루어졌었어. 타밀호랑이 정부는 가격을 정했어. 쌀 1kg은 35루피였는데, 지금은 80에서 100루피야. 여자들은 밤에 안전하게 혼자 다닐 수 있었어”라고 그리워했다. 한편 이들에게 어린이 병사 징집에 대해선 어떻게 여기는지 물어보면, “지원자들이었다!”고 주장했다. 현실이 너무나 뼈저리게 쓰라린 탓일까? 마을 사람들은 타밀호랑이 치하 엄격한 시절의 생활을 이상화했다.

정부군 병사들은 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대리석 기념물들을 세우면서도 타밀호랑이 공동묘지들을 파괴했다. 한 주민은 “현재 우리의 유일한 공동묘지는 이 폐허들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남아있는 탄알구멍투성이의 벽채를 가리켰다. 이런 기억 말살 정책은 스리랑카 정부가 지역 주민들과 화해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 할 것이다. 끝으로 그리고 특히, 마을 사람들은 북부 지방의회 선거에서 TNA 자치주의자들에게 밀어준 표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 했다. “TNA 소속 의원들이 자기들은 아무런 권한도 없다고 우리에게 설명해 줬다. 모든 것은 정부가 결정하고 있다. LTTE 시절 선거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때는 우리의 정부였다.” 이렇듯, 섬 북부에서 은밀하게 수집한 모든 증언들은 두려움, 울분, 향수 등의 감정을 확증해 주었다. 해안의 어부들도 마찬가지로 남쪽에서 온 경쟁자 싱할라 어부들과 심지어는 중국 공장형 어선들의 침입으로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섬 동쪽, 타밀인과 싱할라인의 거주지역에서 아주 먼 외딴 곳에 사는 주민들은 싱할라 농민의 대거 이주를 “식민지 개척자들”의 이주로 보고 개탄해 했다. “싱할라인들은 뭐든지 할 수 있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총체적 박탈감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섬 북단의 대도시 자프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교전 쌍방 간에 뺏고 빼앗기를 되풀이한 공방의 격전지였다. 스리랑카 타밀문화의 역사적인 요람 자프나는 여전히 폐허가 별들처럼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렇지만, 자동차는 더욱 더 많아졌고, 여기저기 호텔들이 들어섰다. 비정부기구 회원들 대신에 몇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경찰관과 군인들은 군경 바리게이트가 없어졌음에도 그 수가 여전히 많았다. TNA의 주요 구성단체의 하나인 타밀연합당(Ilankai Tamil Arasu Kachchi, ITAK)의 서기 지보이 쿨라나야간은 오래된 책상에 앉아 “타밀인들은 우리가 그들의 권리를 위하여 민주적으로 투쟁할 수 있도록 우리를 밀어주었다. TNA는 주의회 37석 중 30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3차 헌법 수정안이 주의회에 부여하는 최소의 특권조차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주지사가 마음대로 주무른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고 원망했다. TNA는 북부와 동부의 주에서 군 철수를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주교청에서 토마스 사분다라나야감 주교를 만났다. 그는 2010년 우리의 방문 이후(4) 줄곧, 2006년 8월 검문검색 때 실종된 교구 내 한 신부와 자신의 보좌신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는 북부 주의회가 민중의 소리를 담고 있다는 것과 국가가 주의회에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국가는 국민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전 직후, 대통령은 모든 사람들을 협상테이블에 앉게 할 수 있었다. 그 기회를 놓쳤다. 그 대신에 정권은 타밀인들의 염원을 부정하고, 내전을 “대테러 인도주의 투쟁 작전”으로 축소해 버렸다.” 장기적으로 볼 때, 상황은 비등점까지 다다를 수 있다. 4월 말 TNA의 두 의원은 공개적으로 “독재정치 상황이 유지된다면, 타밀민족과 함께 투쟁할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 며칠 전에는, 자프나 반도에서 “테러리즘”으로 지목된 세 명의 타밀인이 군에 의해 처형됐다. 그것은 2009년 이후 가장 심각한 사건이었다.

콜롬보의 인권운동가들도 화해조치가 부재한 것에 통탄했다. “정부는 화해의 길이 오로지 경제개발에 의해서만 열린다고 믿는다. 그러나 평화정착을 콘크리트로 이루어낼 수 없다. 그 증거는 지방선거 결과가 보여주듯 해일 같은 TNA의 진출이다. 전쟁은 끝났으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그 갈등의 뿌리는 결국은 다수 싱할라족이 소수 타밀족에게 최소한의 자치권도 거부하는 데 있다”고 파이키아소티 사라바나무투 대안정치센터(Le Centre pour les Alternatives Politiques, CPA) 소장은 분석했다.

2005년에 초선, 이어서 2010년 재선된 라자팍세 대통령은 2015년에 3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대 테러리즘” 투쟁에서 그의 결정적 행동을 높이 산 싱할라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높다. 싱할라인들에게 타밀 분리주의는 버스, 기차, 불교사찰 등에 대한 공격, 싱할라와 회교도 마을 주민 학살, 전쟁포로 화형, 프라바카란을 비방하는 의원 또는 모든 타밀인에 대한 암살 등과 같은 LTTE의 폭력행위로 축약된다. 싱할라인들은 국제연합(UN)의 전쟁범죄 고발을 이해하지 못 한다. UN은 1972년과 2009년 사이의 전투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만 명 이상이고, 2009년 최후의 공격에서는 수만 명으로 추정한다.(5) 남부 해안의 한 식당 주인이 회상한 것처럼, “부모들은 함께 여행해야 할 경우, 테러 공격에 아이들을 고아로 남기지 않기 위해 서로 다른 버스편을 이용했다. 25년 동안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고, 서방세계는 이 분쟁이 너무 멀고 너무 복잡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신들은 우리가 그 테러분자들과 협상하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이 지옥 같은 분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성공했는데, 당신들은 우리를 괴롭히러 왔는가?”

평화주의 시민사회단체인 전국평화협회(National Peace Council, NPC) 회장 제한 페레라는 대통령의 인기에 대해서 “대부분의 싱할라인들은 라자팍세 대통령이 타밀 분리주의와 국제사회의 간섭과 같은 국내외 위협에 대처하여 국가 주권을 수호했다고 본다. 이 악순환 속에 갇혀 대통령은 싱할라 민족주의에 영합하지만, 그 정책은 소수 타밀인들의 지지를 잃게 하여 종족 대결을 불러일으킨다”고 분석했다. “타밀인과 싱할라인은 일상생활에서 서로 이마를 맞대고 산다. 그러나 정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면, 싱할라인이 정치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의 타밀 친구는 싱할라 친구를 언짢게 하지 않으려고, 나아가서는 LTTE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사거나, 곤경에 빠지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는 현 상황에서 대화와 화해의 부재를 지적했다.

과거에 타밀호랑이에게서 살해위협을 받았다는 한 타밀 지식인은 자신의 주치의인 싱할라 여의사로부터 ‘이제 전쟁이 끝나서 ‘테러에서 해방되어 굉장히 좋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감히 그보다 더 복잡한 현실적 문제를 꺼낼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이같이 대화의 부재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상대편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미래가 부정적일 것이라고 예단할 수 있다.(6)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담론은 다른 작용을 한다. 그것은 정권의 족벌주의와 부정부패를 잊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두 형제 바실과 고타바야는 각각 경제개발 장관과 국방·도시개발 장관으로 전격적으로 발탁됐다. 모든 외국원조와 모든 협력계획은 국가 예산을 통해야 되고 이 두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높은 이율(연 이율 6~7%)의 차관 형식을 띤 중국의 대량 지원은 투명성이 없다!

라자팍세 대통령은 전제적 성향을 보여 준다. 한 정치평론가는 “대통령은 국민의 주권 수임으로 삼권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라자팍세는 정치에 뛰어든 잘못밖에 없는 자기의 전직 참모총장을 투옥하고 난 후, 대통령 삼선 제한을 폐지시키고, 여성 대법원장도 경질했다.

친정부 언론매체는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에 대해 “반역자”, “친LTTE” 등의 비방 용어를 들이댄다. 국방장관이 조종하는 극우파 분자들은 교회, 회교사원, 심지어는 변호사 시위대까지 공격을 가했다. 언론사 기자들이 행방불명되거나 피살되었다. 2012년 3월에 메르빈 페르난도 장관은 인권운동가들에 대해 “갈비뼈를 부러뜨리겠다”고 공언하였다.(7) 지난 11월 비판적 시각을 가진 싱할라 여성 지식인 니말카 페르난도는 공영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에 살해위협을 받았다. 5월 2일 라자팍세 대통령은 “정부는 국내 또는 해외에서 책동하는 음모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대통령 본인도 청소년 시절 열렬한 인권운동가였다.

 

글·세드릭 구베르뇌르 Cédric Gouverneu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손종규

프랑스 렌느2대학 박사과정 수료

(1) ‘타밀호랑이 사실상의 국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2월호

(2) 타밀호랑이는 연 2억에서 3억 달러의 예산을 운용한다.

(3) Roland-Pierre Paringaux, ‘한 학살을 둘러싼 조직된 침묵’, 2009년 3월

(4) ‘스리랑카 타밀인들의 대혼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호

(5) ‘스리랑카: 인권이사회 인권조사 착수 결정하다’, 국제연합, 2014년 3월 27일, www.un.org

(6) Eric Paul Meyer, ‘타밀호랑이 붕괴, 타밀 문제 해결하지 못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3월호

(7) Charles Haviland, ‘스리랑카 메르빈 실바 장관 신문기자들 위협’. BBC, 2012년 3월 23일

 

모든 조사 거부하는 스리랑카 정부

1948년 영국이 실론에서 물러날 때, 수세기 전부터 싱할라 왕국과 타밀 왕국이 공존했던 그 땅에 통일 독립 국가를 남겨주었다. 타밀인들(인구의 18%, 힌두교와 가톨릭 신자)은 대부분이 섬 북부와 동부에 거주한다. 싱할라인들(인구의 74%, 대부분 불교 신자)은 섬 중부와 남부에 거주하며 여기에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가 있다. 타밀인들은 식민국 영국이 식민 통치 중개자로 이용하면서 영국의 특혜를 받았다.

독립 당시에 두 개의 개념이 상충하였다. 하나는, 실론(1972년 스리랑카로 국호 개명)은 “하나의 섬이고 하나의 국가”로 다민족국가라는 것으로, 싱할라인들과 소수 회교도(7.5%)뿐만 아니라 일부 타밀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타밀 자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다민족국가 개념은 환상으로 불교 신봉 싱할라 민족주의에 의해 장악되는 중앙 정권은 타밀인을 영원히 차등국민으로 취급할 것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초의 타밀인 시위 탄압,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시 독립, 북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 사례 등으로 자극 받은 분리독립주의자들은 무장투쟁을 채택했다. 1975년에 독립주의자 젊은 청년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은 자프나 시장을 살해하고, 그 다음해에 소속 무장단체를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로 명명한다. 1983년 7월 타밀호랑이군의 매복습격을 받은 싱할라 병사들의 사망은 경찰의 묵인하에 콜롬보에서 반 타밀 인종학살의 구실이 되었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정점에 다다른다. 수천 명의 타밀인들이 나라를 등지거나 무기를 들고 정글로 숨어들어 갔다. 이 타밀 디아스포라의 군자금으로 타밀호랑이는 인도의 타밀나두(‘타밀인 나라’라는 뜻) 주에 현지 당국의 비호하에 후방 근거지를 세운다.

LTTE는 경쟁 세력들을 제거해서 주도권을 잡았다. 1987년 남부에서 인민해방전선(Janata Vimukthi Peramena, JVP) 주도의 극좌파 봉기가 일어났다. 이 두 개의 게릴라군에 낀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LTTE를 분쇄하기 위하여 인도 원정군(Indian Peace-Keeping Force, IPKF 인도평화유지군)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JVP를 유혈 진압했다(어림잡아 사망 2만 명). 1990년 인도평화유지군은 막대한 손실을 남기고 자프나를 철수하였다. 타밀호랑이는 1991년 라지브 간디 인도 수상, 그 2년 후는 프레마다사 대통령을 암살하여 복수를 한다.

2001년 7월 24일 타밀호랑이 자살특공대가 콜롬보의 공군기지를 습격하여 25대의 비행기를 파괴했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이 게릴라 부대를 격파할 수 없다고 보았다. 2002년 2월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LTTE는 자기 군사력에 자신감을 얻어 독립국가 아니면 전무라는 극단적 입장을 고수했다.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은 싱할라인들의 격앙된 감정을 이용하여 2005년 11월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는 수단만 주어진다면 타밀호랑이를 군사력으로 와해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인도와 맞서서 역내 동맹국 확보를 고심하는 중국의 군사물자 지원에 힘입어 자기의 주장을 실현시킨다.

25년 동안의 내전으로 약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국제연합은 2008년 말에서 2009년 5월 사이의 최후의 결전에서 LTTE와 정부군 포화에 갇힌 타밀 민간인 약 4만 명이 희생됐다고 보고 있다. 지난 3월 27일 유엔 인권위원회는 영국이 제안한 독립적 국제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찬성 23 반대 12). 남아프리카의 나반에템 필라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6월부터 섬 북부와 동부에 조사관들을 파견하고자 한다. 모스크바와 북경의 지지를 받는 스리랑카 정부는 “내정간섭”, “음모”라고 일축하면서 협조 거부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비정부기구 공공이익변호센터(Public Interest Advocacy Center, PIAC)(1)에 따르면, 스리랑카 군이 전쟁범죄의 물질적 증거를 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세드릭 구베르뇌르 Cédric Gouverneur

번역·손종규

 

(1) ‘벌 받지 않는 섬? 스리랑카 내전 최후 국면의 국제범죄에 대한 조사’, PIAC, 시드니, 201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