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칼레도니아의 더딘 탈식민지화

2014-08-27     알반 벤사/에릭 비터스아임

 

1998년 조인된 누메아 조약에 의해서 뉴-칼레도니아는 지금부터 2018년까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탈식민지화 과정을 완결지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광업개발 프로젝트가 난무하고 문화적인 문제로 주민들 사이에 일종의 흥분상태가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월의 지방선거가 증명했듯이 활발한 사회적‧경제적 동력이 정치적인 탈출구로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오랫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온 한 방문객이 오늘날 나타나서 수도인 누메아의 코코티에르 광장이나 안느 바타 광장을 산책한다면, 이곳이 뉴-칼레도니아 독립 찬반 다툼이 격화된 이른바 ‘1984-1988 사건’(1)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의 이곳에는 공공공간이라 할 만한 것도 없이 거의 유럽인들이 출입하는 시내에만 편의시설이 집중되었고 토착 원주민과 오세아니아인들은 허름하고 거대한 시멘트 집이 밀집한 단지에 살았다. 오늘날 이 도시는 예전보다 좀 더 활기를 띠고 있다. 현재의 뉴-칼레도니아의 잡다한 모습은 20년 전부터 이뤄져 온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이곳은 예전 프랑스의 해외 영토(T.O.M.)였다가 이제는 독특하지만 과도기적인 프랑스의 ‘특별해외 자치구’로서 정치적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있다.

4반세기 전부터 추진해 온 탈식민지화 과정은 앞으로 4년 후에 마감될 것이다. 1998년 프랑스 공화국 내의 칼레도니아 독립반대연맹(RPCR)과 뉴-칼레도니아 토착민 국가독립사회당 (FLNKS)이 합의 서명한 누메아 조약은 2018년까지 국민투표로 인준 받을 것이다. 공동의 운명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오랜 식민지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대립의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뉴-칼레도니아에 이양한다는 조약 내용에 따라 주민들이 원하는 주권의 형태를 투표로 결정할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는 단순한 독립 선언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왕권’에 속하는 마지막까지 남은 5가지 ‘최후’의 권력을 양도해야 한다.(2) 다른 형태는 다양한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랜 협상 끝에 선거인단의 권한을 1998년에 등록한 사람과 그 후손들에게만 주기로 합의했다.

2014년 3개 지방의 책임자 선출과 뉴-칼레도니아 국회의원 선거는 독립 반대당과 찬성당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졌다. 북부 지방과 섬 지역에서는 군도의 완전한 독립 주권을 요구하는 토착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당이 반대당에게 겨우 세 의석만 남기고 독식했다. 반대로 남부 지방은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가 40개 의석 중 33개를 휩쓸었다. 독립 찬성당은 점차로 잠재적인 과반에 접근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역학 관계는 소위 카낙(kanak)이라 불리는 토착원주민에게 불리한 인구 구성을 감안할 때 의미심장하다. 토착원주민들의 80%가 독립당에게 투표하는데 전체 인구 25만 명 중 40%를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자크 라플뢰르가 장악해온 반독립당파인 공화국 내의 칼레도니아 독립 반대 연맹(RPCR)이 와해된 후,(3) 왕당파들은 세 개의 파로 분열되었다. 필립 고메즈가 이끄는 중도 우파 격인 칼레도니아 동맹, 피에르 프로지에가 주도하는 대중운동연합(RUMP, 지역 UMP), 그리고 지난 5월 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가엘 야노의 칼레도니아 대중운동으로 갈라졌다. 반면에 독립파는 사회당 계열의 두 개 파로 나눠져 있다. 장–마리 트지바우가 주도하는, 1953년 창당된 칼레도니아 연맹과 1976년 당시에 마르크스주의 영향으로 창당된 카낙 해방당이 그것이다. 후자는 현재 폴 네아우틴느가 주도하고 있는데, 그는 2001년부터 북부 지방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지난 5월 치러진 선거에서는 2007년 창당된 이후 급진적인 사회개혁 주장을 해온 노동당이 힘을 잃고 참패했다.

왕당파와 독립파 간의 내부 분열은 진영들 사이에 때로는 동시적으로 대화와 긴장을 유효하게 이용하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게 한다. 그 사이에서 프랑스는 때로는 관찰자로서 때로는 희생양을 자처하면서 중재를 담당한다. 물론 프랑스는 대도시 공적보조금이라는 절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다. 칼레도니아에 할당되는 액수는 칼레도니아 국내 총생산의 16%에 달한다.

막 시작된 5년 임기의 국회는 누메아 조약이 예정한, 스스로 결정하는 투표를 강행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적어도 전체 의석의 3/5, 총 54개 의석 중 32석을 장악하는 다수당이 필요하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투표에 회부하는 것은 공허한 약속이 될 것이다. 왕당파는 권력과 책임을 분담하는 5월 조약에 서명했는데 여론조사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여론조사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한다.

뉴-칼레도니아의 활력을 가로막는 정치 계층의 보수주의

독립을 주장하는 당파는 뉴-칼레도니아 카녹 국가독립사회당(FLNKS)의 이름으로 서명한 만큼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현재 상황이라면 이들이 투표에서 이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은 최소한 공식적이건 아니건 간에 누메아 조약의 내용대로 끝까지 가보고 싶어 한다. 만일 부결된다면 그 다음 완전한 주권을 획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른 해결책을 모색할 생각인 것이다. 이 소란스러운 일도양단의 투표 회부가 이미 1998년 한차례 그랬던 것처럼 협상에 의해서 연기될 가능성을 예상해보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정치계는 야망을 드러내는 헛소리나 소란스러운 소규모 설전, 선거인 명부를 동결한 것인지 개정할 것인지 하는 따위의, 법리 기술적인 논쟁 혹은 상징적인 잡담 수준만 되풀이하고 있다. 결코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신경 쓰지 않는다. 예컨대 2011년 국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 프랑스 국기와 카낙 국기를 둘 다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4) 이 나라를 지칭할 이름에 대한 공통의 합의도 불가능하고 심지어는 누메아 시내 중앙에 카낙의 전통 가옥을 설치하는 문제(결국은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라든가, 비싼 물가에 대한 빈번한 시위 등….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변화가 양 진영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자극했다. 2004년과 2009년 사이에 남부 지방에서 2012년 민주 독립 연합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될 필립 고메즈가 구현한 중도 우파인 칼레도니아 동맹이 독립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경계를 뛰어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설정했다. 이러한 개방적인 정책은 몇몇 카낙 여성들도 같은 방향으로 노력하도록 자극했다. 이렇게 개방적인 정책은 많은 불만을 완화시키고 때로는 반대 진영과 대화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고메즈의 정당은 몇 년 전부터 왕당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당으로 부상하고 고메즈 자신은 스스로 ‘반 독립주의자’라기보다는 독립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설파한다.

북부 지방에서는 강력한 지역 개발 드라이브 정책이 지방차원에서 추진되어 개별 자치시 단위로 전달되어 보다 매력적인 분야에서 창의적인 여러 가지 시도를 되풀이하고 있다. 도서관 개방, 문화 센터 설치, 슈퍼마켓 개장, 새로운 택지 할당, 관습에 따라 종족 소유로 되어있던 토지에 장인 작업 공방 설치, 해변 종합 관광 시설 등등. 또한 광산 개발의 엄격한 관리에 따라 바부토에 니켈 제련 공장이 세워졌다. 그 곳에서는 독립파가 51% 지분으로 우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평균적으로 3~4%의 연 성장률을 기록하여 계속되는 침체를 보이는 대다수의 프랑스 대도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성장은 국내 총생산의 4%를 차지하는 관광과 양식업의 발전에서 기인하지만 그 결과는 미미하고 오히려 니켈 산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또 다른 요인도 작용하는데 이 나라가 급격한 변화의 먹잇감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줄 정도다. 해외로부터 유입된 자금에 대한 면세, 소득에 대한 비약한 세율도 경제의 활력에 한몫하고 있다. 여기에다 프랑스로부터 오는 막대한 지방 보조금, 지역에 소재한 국가 기관에 투입되는 자금, 이와 관련된 공무원들의 월급은 본토 기준보다 1.7배의 가산액이 산정된다. 은퇴자도 마찬가지 혜택을 누린다. 이런 사람들이 칼레도니아 인구의 11%를 차지하고 있다.

1988년의 마티뇽-우디노 조약과 1998년의 누메아 조약을 통해 이른바 ‘재균형발전’이라고 부르는 경제‧제도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정치권이 개입하기 이전에는 발전이 너무나 오래 지체되었다. 프랑스가 뉴-칼레도니아를 빼앗은 지 130년이 지난 후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카낙들은 19세기부터 틀어박혀있던 보호지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었다. 먼지 자욱한 오솔길 넘어 안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 안에서, 인종차별에 시달린 그들은 발전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같은 시기에 니켈 시장은 팽창했고 여기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유럽인들이 누메아에 들어앉아 길게 누워버렸다.

지난 25년 동안, 고백하기 부끄러운 이 인종차별을 끝장내기 위해서 많은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전기 배선, 아스팔트 길 건설, 수도관 설치, 교외 주거시설 개선, 병원, 학교, 문화센터 건설, 직업교육, 채굴 프로젝트 개발 등등, 이런 조치들이 사회·공간적으로 유동성을 향상시켰으며 평균 소득의 증대를 가져와 소비와 발전을 진작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카낙 사회 내부적으로는 불평등이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누메아와 그 교외지역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사방이 둘러싸인 해안지역, 르와요테 섬과 특별한 경제적 활력이 없는 시골 지역에는 빈곤해서 나른한 모습이 펼쳐지고 반대로 보다 많이 혜택을 받은 지역에서는 중산층이 손쉽게 부자가 된 유럽인들과 함께 급성장하고 있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남부 지역에서는 8%대인 실업률이 북부와 섬 지역에서는 30%에 달한다)에도 불구하고, 군도(群島) 전체적으로 볼 때는 상당한 높은 생활수준을 보인다. 공공 설비는 거의 여타 프랑스 지방과 유사한 수준이다. 주민 1인당 소득은 덴마크와 영국 수준이며 일본보다 높다. 누메아의 부동산 시장은 ㎡당 평균가격이 파리 수준이다(㎡당 7천~1만 유로). 건축 붐도 한창이다. 칼레도니아 자본시장도 거의 캘리포니아나 리비에라 정도의 활력을 보인다.(5) 반대로 허약한 주거형태는 문제다. 남부 지방에서는 사회적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자치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무지나 미개간지를 무단 점유하고 임시로 거주하는 불법 거주자가 많다. 이런 불균형은 왈리스 섬, 푸투나 섬, 특히 바누와투 섬에서 이주해온 카낙족에 속하는 오세아니아인들이 많고 무시하지 못할 수의 유럽인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차후에 상대적으로 거대 도시인 누메아와 서부 해안가의 점점 더 도시화되어가는 촌락에 많은 수의 인구 유입이 예상된다. 경제적 불균형에 농촌 지역의 이탈이 더해진다. 농업이 아직 가계 수입의 6~12%를 보장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카낙들은 물론 군도 전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니켈 산업 관련 공장이나 관공서의 행정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프랑스나 쉥겐 조약(유럽연합 회원국 간에 체결된 국경개방조약-역주) 덕분에 다른 지역 출신의 보다 나은 자격을 가진 후보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사실상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칼레도니아가 양성해서 공급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그리고 보다 기술적 자격이 있는 노동자들을 원하기 때문에 해외에서 오는 숙련된 노동력이 번창한다. 이번 봄에는 코니암보 니켈 주식회사는 프랑스에서 3년 계약으로 고급 기술을 갖춘 간부직을 모집했다.

칼레도니아 임금 노동자들은 누메아 조약이 규정한 지역 고용을 촉진하는 법이 효과를 발휘하기를 기대했다. 이 법은 2012년에 발효되었으나 실효성에는 의문이 있다. 게다가 20명 이상을 고용하는 기업만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 말고도 채용이 공개적이라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유럽이나 프랑스의 경제 위기를 피해온 수많은 노동자, 임시직, 시간제 근로자들이 틈새를 파고 밀려들어 온다. 자신들의 능력이 적절한지에 대한 검토도 없이 “점포를 여는 데” 익숙한 새로운 모험가들은 현지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액수보다 낮은 임금을 감수하면서 뉴-칼레도니아의 경제 호황을 이용한다. 현장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 갈등이 폭발했다. 몇몇 정치 지도자, 노조 지도자들은 공권력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9년에는 카낙과 착취 노동자 노조 연맹(USTKE)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제라르 조다르가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권, 여성의 권리, 환경 보호 등 총체적으로 말하면 지체된, 내지는 뒤떨어진 민주적인 토론 문화가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형편없다는 평판이 있는 누메아의 동쪽 감옥에는 수형자의 95%가 카낙이나 오세아니아인들이다. 이것은 상징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이에 대한 두려움과 편집증이 겹쳐서 2013년의 마지막 날, “카낙이 누메아를 습격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 전에 뉴-칼레도니아의 프랑스 고등 판무관이 무기 판매가 급증했다는 언급도 있었던 차였다. 뉴-칼레도니아는 옛날에 갤리선으로 수많은 이민자들을 프랑스나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부터 받아들였다. 대도시인 누메아에서 졸업생들이 점점 더 실업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건설이나 상업, 사회복지 서비스 분야, 대학, 언론, 현대 예술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활력에 기대어 아직은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평화의 정착, 투자 장려, 그리고 멋진 열대에서의 살아가는 부드러운 매력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매우 다양한 인구가 유입되게 했다. 뉴-칼레도니아는 이제 더 이상 쾌락을 쫓는 아마추어나 세금을 피하려는 자들이 찾는 곳만은 아니다. 화가, 조각가, 저술가, 음악가, 언론인, 배우 등 많은 이들이 단순히 뉴-칼레도니아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이곳을 찾아온다. 이제, 이곳은 최근에 이 군도에 정착한 칼도슈,(6) 카낙, 아이티인, 왈리시 섬에서 온 이주민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섞여 사는 것에 언제나 인색했던 이 군도에서 새로운 풍경이다. “우리는 혼혈이다”라고 칼도슈 출신인 프레데릭 올렌이 말한다.(7) 사회적 네트워크와 온라인상의 포럼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 공간에서 혼종 간의 결합 외에도 온갖 종류의, 고통스럽고 때로는 유쾌하게 불손한 비판의 말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러한 말 속에는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움이 있고, 실제로 체험한 모순도 있으며 미래를 향한 제언도 있다. “나는 나라를 부르고 민중을 부르고…. 나는 지방을 부르고 국가를 부르고 교회를 부르고 관습을 부르고, 젊은이를 부르고, 젊은 카낙을 부르고, 젊은 칼도슈를 부르고…”라고 카낙 출신 시인 행위 예술가인 폴 오모가 박자를 맞추어 외친다. 그에게는 “침묵에 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포인디미에에서 열린 국제 대중영화제, 푸에보에서의 오세아니아 책 전시회와 두바안 카베 음악 축제, 누메아나 군도 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수많은 전시회나 심포지움이 있지도 않는 정치적 토론보다는, 공동의 행복과 해방의 희망을 안겨주는 미학적이고 현명한 웅성거림이 될 것이다. 지역 문화 기관(트지바우 문화 센터, 누메아의 베른하임 도서관, 지방의 미디어테크 등)이 후원하는 이러한 도약은 프랑스와 군도 사이의 인적 교류를 활발히 하는 데 있어서 추가 에너지를 길러 올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파리에 있는 뉴-칼레도니아 문화관은 중계와 추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프랑스를 거쳐가는 카낙이나 여타 칼레도니아인들은 그 숫자가 많지도 않았거니와 매우 고립되어 지냈다. 지금은 수많은 학생들, 연수자, 운동선수, 군인, 파리에서 책을 출판하는 작가, 축제나 전시회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이 프랑스를 방문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뽐내고 있다. 놀라운 인적 자원의 패치워크다. 다양한 공동체 출신들이 때로는 출신을 따지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1998년 누메아 조약이 그려낸 새로운 시민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낙의 젊은이들은 칼레도니아 사회를 걱정한다. 직업교육 정책이 인구의 일부가 그 결실을 얻은 것은 명백하지만 (카낙 여성들의 정치권이나 사회 진출이 두드러진다) 교육과 직업 분야에서 단절이 여전히 존재한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숫자도 많지 않고 많은 이들이 자격증도 없이 학교를 떠난다. 이곳 학교교육의 역량과 실상을 알기 위해선 아직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8)

이것 말고도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많은 카낙 젊은이나 여성들이 노인이나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환경의 자란 탓에,(9) 현대의 문화적 흐름과 단절된 채 해방의 욕망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상들의 보수적인 요구와 유복한 유럽인들의 이기심이 지배하는 칼레도니아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다가 때로는 극심한 혼란을 겪곤 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자의 증가, 교통사고 및 폭력의 만연이 이를 증명한다.

게다가 최근 10여 년 동안, 카낙 토착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예전 독립주의자 중 일부와 그 후손들이 선거에서의 실패나, 혹은 사회진출상의 불만의 문제를 다시 들고 나선 것이다. <카낙 가치의 공통의 초석(SCVK)>이라는 잡지가 이렇게 해서 최근에 출간되었다. 지금까지는 경제적 현안에만 전념했던 정치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이미 제시된 비전을 뒤집어 다시 제시한다거나 카낙 세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해서 교육, 경제, 사법제도 등에 영향을 주자는 주장이 이 잡지의 주요 주제다. 그런데 이는 뉴-칼레도니아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와는 반대 방향이라 할 수 있다.

1970년에서 1990년대까지 독립주의의 지도자들은 민주적 제도 내에서, 즉 국회와 지역, 나아가 지방의회의 권력을 장악하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특수성(언어, 의식, 지역적 기억)을 정치적 투쟁에서 상징적 무기로 사용한 적은 결코 없었다. “전통으로의 회귀는 하나의 신화다. 어떤 민족도 영원한 전통을 간직하지는 못한다”고 트지바우가 1985년 〈현대〉지에서 외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칼레도니아인들의 과거와 전통적 문화에 속하는 가능한 한 많은 요인들이 이곳 도시의 건설에 요구되는 사회와 인간의 모델을 만드는 데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10)

산업적 잠재력이 높지만 프랑스의 지속적인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는 칼레도니아 사회는 아직 명확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또한 때로는 이상하도록 놀라운 활력 앞에서 대다수의 정치 책임자들은 놀라기만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기다리는 것만이 상책인가! 이 군도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는 내일의 카낙, 뉴-칼레도니아를 위한 최상의 길은 현재의 상황이란 말인가?

1919년 카낙의 한 시인이 “혼란을 조심하라”고 말한 것이 헛말이 아니라면 사실상 칼레도니아 사회가 실질적으로 진전을 이뤄내지 못한 채 펠트로 만든 마상 검술 시합 같은 유희만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건’의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지 25년이 흐른 지금, 모든 주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칼레도니아의 위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글‧알반 벤사 Alban Bensa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연구 책임자로, <어부 독수리의 오열, 뉴-칼레도니아, 1917년의 토착민 전쟁>(이본 고로메오도, 아드리안 뮈클과 공저)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에릭 비터스아임 Eric Wittersheim

파리 EHESS의 강사이자,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의 회원으로, <보이지 않는 도시, 태평양의 도시 인류학>(도로테 뒤시와 공저, 2013)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이진홍

 

(1) 1980년대는 독립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양 진영의 대립이 첨예화되는 시기였다. 폭동이 일반화되다시피 해서 이 시기를 가리켜 소위 ‘1984-1988의 사건들’이라 부른다. 폭력은 1988년 우베아(Ouvéa)의 인질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러 두 진영은 1988년 6월 26일 마티뇽에서 협상조약에 서명한다.(역주)

(2) 사법, 공공질서, 국방, 화폐, 외교권은 국가권력에 속한다. 그러나 누메아는 칼레도니아인들이 교육을 받아 성장해서 그러한 책임을 공동으로 실행하기를 바란다.

(3) 작크 라플뢰르(Jacques Lafleur, 1932~2010)는 장–마리 트지바우(Jean-Marie Tjibaou, 1936~1989)와 함께 1988년 미티뇽궁에서 이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였다.

(4) 카낙은 1970년대부터 독립주의자들이 사용한 뉴-칼레도니아의 다른 명칭이다.

(5) 크리스티안 다르소, ‘뉴-칼레도니아의 긴장된 분위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1월호

(6) 장기 체류를 목적으로 온 백인 이주민을 지칭하는 용어

(7) 프레데릭 올렌, ‘검은 대륙’, <5중창(Quintet)>, 갈리마르 파리, 2014년

(8) 마리 살라운, <학교를 탈식민지화시키다. 화와이, 뉴-칼레도니아, 현대의 경험>, 렌느대학출판부, 2013년

(9) 2013년 10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케 브랑리 박물관에서 열린 ‘카낙, 예술은 하나의 말이다’라는 전시회에서 이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0) 장-마리 트지바우와의 대담, ‘독립을 위한 뉴-칼레도니아’, 〈현대〉, 파리, 494호, 1985년

 

<박스기사>

말썽 많은 신의 선물, 니켈

니켈의 전 세계 매장량 20~30%가 뉴-칼레도니아에 매장되어 있다. 오랫동안 몇몇 산업 분야의 필수적인 이 금속은 천연광석의 형태로 수출되어 왔다. 분리를 주장하는 독립주의자들에 따르면 진짜 ‘약탈’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 지역 광산업의 실소유주들인 유럽의 몇몇 가문이 이득을 누려왔다. 그래서 뉴-칼레도니아 토착민 국가독립사회당(FLNKS)은 이 소중한 광석 문제를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중요 안건으로 내세웠다. 몇 개의 주요 광맥은 공적 자금과 사금융 간의, 일종의 혼합 형태 회사인 소피노르그룹이 통제하고 있는데, 이 그룹은 분리 독립주의자 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북부 지방을 위해서 일한다. 이 그룹은 관광과 수산 양식 산업 분야에 상당액의 투자를 이루어냈다. 2013년 북-서 해안가인 바부투에 니켈 제련 공장을 건립해 직, 간접적으로 수천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독립’이라는 이념에 충실한 독립 사회당은 자신들 주장의 핵심에 언제나 니켈에 기반한 산업전략을 내세운다. 그래서 이들은 광맥이 속한 지역의 몇몇 소유주들에게 로열티의 형태로 비용을 지급하는 것보다는 공공 투자의 형태로 이익을 재분배하는 데 집착한다. 또한 니켈과 관련된 모든 프로젝트에서 뉴-칼레도니아 자체적이거나 해외(한국과 중국) 자본과의 조인트 벤처이건 간에, 지배주주인 51%의 지분 소유에도 집착한다.

또 다른 거대 야금 프로젝트가 남부 지방에서 실현되었다. 브라질 광산 기업인 베일이 69%의 지분을 소유한 고로공장이 문을 연 것이다.(1) 이 공장이 채택한 야금 공정이 오염의 위험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논쟁이 있었다. 방출되는 폐수가 칼레도니아 함수호(湖)로 직접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함수호는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호수다.

2012년 다보스 포럼 막간에 그린피스가 포함된 비정부 기구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질 나쁜 기업에게 “보상하라”는 의미에서 ‘퍼블릭 아이 어워드(Public Eye Award)’ 상을 베일에게 수여했다. 이 그룹은 칼레도니아의 함수호와 주변 야생을 보존할 목적으로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014년 5월 다량의 산이 유출되어 생 루이 주민들과 공권력과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계약상 선택한 전략이 무엇이든지 간에 니켈은 칼레도니아 국내 총생산의 30%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10% 수주에 머물고 있다. 뉴-칼레도니아 경제에서 이 ‘악마의 금속’에 부여된 핵심적인 위상은 의심할 나위 없이 논쟁이 그치지 않을 주요한 정치적 안건이 될 것이다.

(1) 필립 르벨리, ‘거대 광산 기업에 대한 총궐기’, i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