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은 어떻게 스포츠가 되었나?

2014-08-27     장 폴 발슈

 

 귀족들이 먼저 시작한 등산은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여가활동이었다. 오랫동안 알피니스트들은 정상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동시에 외딴 산골의 투박한 주민들에게는 경멸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스포츠 클라이밍은 수직성의 신화를 깨고 기술의 위계를 뒤엎는 한편 위험을 감소시킴으로써 기존의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고 알피니즘을 주변부로 밀어냈다.

눈 덮인 산봉우리 주위로 뾰족한 능선이 뻗어있다. 한쪽에는 바위 낭떠러지의 어두운 수직 절벽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얼음 경사면이 심연을 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푸른 지평선 위로 피켈을 손에 쥔 알피니스트가 보인다. 슬로건은 이렇게 말한다. “탁월한 지도자는 그저 지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곳은 알프스도 히말라야도 아니다. 바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에 실린 IE 경영대학원의 ‘긍정 리더십과 전략’이라는 학위과정 광고이다.(1)

고산 등반과 극기(克己), 위대한 등반과 영웅적 행위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 흔히 결부되곤 한다. 이는 어쩌면 알피니스트들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주려고 오랫동안 애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전설적인 등반 가이드 르네 데메종은 1973년 이런 글을 남겼다. “위대한 알피니즘을 체험해본 사람만이 그 위대함과 엄격성을 알 수 있다.” 데메종은 자신의 열정인 등반을 단순한 스포츠로 보지 않고 ‘인생이 걸린 하나의 이상(理想)’으로 여겼다.(2) 정상을 응시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용하려 드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1948년부터 이러한 시각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등장했다.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계열의 잡지인 <관광과 노동>은 등반의 엘리트주의를 이렇게 비난했다. “대부분의 등반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맹렬한 개인주의가 도를 넘어섰다. 그들은 ‘정상의 순결함’, ‘고독’, ‘저 아득한 아래’, ‘저 높은 곳에서, 홀로 태양 속에서’, ‘신께 더욱 가까이’ 운운하지만 사실 그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만의 세계’이다.”(3) 파리 근교 퐁텐블로를 주요 무대로 활동한 등반가 피에르 알랭은 1949년 출간한 저서 <알피니즘과 경쟁>에서 등반을 하나의 독자적 종목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퐁텐블로에 가서 등반을 하는 건 그저 산에서 경주를 벌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흥미진진한 게임을 하기 위함이다”(4)라고 말했다.

1953년 프랑스 공산당과 친밀한 노동체육·체조연맹(FSGT)은 ‘산악 부문’을 신설했다. “알피니즘을 여느 스포츠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이를 통하여 “사회문화적 특권이라 불러 마땅한 것을 타파하는 것”이 그 취지였다. 이리하여 “나는 선두에서 등반하며, 내 경로는 내가 인도한다”는 슬로건과 함께 노동주의적 알피니즘이 탄생했다. 19세기 말, 알프스 봉우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가이드들에게 돈을 지불했던 영국의 등반 선구자들과 차별을 꾀하며 자율성과 책임감을 갖춘 등반을 목표로 삼았던 ‘가이드리스(guideless)’들의 접근시각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 무렵부터 제네바의 알피니스트들은 인근 살레브산의 바라프 석회암벽을 오르는 훈련을 시작했다. 오른다는 본질은 변함이 없으나 다른 등반에 비해 암벽의 고도가 낮았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주위의 객관적 위험요소들(크레바스, 눈사태, 낙석) 때문이 아니라 통과지점의 경사가 가파르거나 암벽에 홀드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바라프’라고 불린 이러한 클라이밍은 사시사철 가능했고, 20세기 들어서는 여름이 되면 고산에서 모험에 도전하려는 이들의 평상시 훈련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장비(로프, 안전벨트, 카라비너, 하켄 등)가 완벽해지고 같은 경로를 여러 차례 반복할 수 있게 되고 각종 자료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불확실성은 줄고 안전성은 증대된 가운데 한층 강도 높은 신체적·기술적 훈련이 가능해졌다.

프랑스 노동체육·체조연맹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클라이밍을 알피니즘과 구별되는 독자적 종목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연맹은 매 순간 죽음을 무릅쓰는 영웅이 아닌, 보호장비로 철저히 무장하고 절벽을 오르는 승자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등반 스포츠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등반을 ‘스포츠화’하고 사고를 줄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연맹은 확신했다. 연맹은 1955년 프랑스공산당 신문 <뤼마니테>가 주관하는 ‘뤼마니테 축제’에서 암벽등반타워를 선보였고(6) 1980년에는 퐁텐블로를 무대로 한 최초의 암벽등반대회 ‘블로 24시’를 개최했다.

이와 같은 저항의 움직임은 알프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태동했다. 굴곡 있는 지형이 많지 않은 영미권 국가에서는 ‘암벽 클라이밍’ 자체를 하나의 체육활동으로 즐겼다.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순수한 클라이밍’은 프랑스까지 전파되었다. 파트릭 에들랭제(2012년 11월 사망)나 파트릭 베로(2004년 사망) 같은 ‘맨손의 사나이’들은 이른바 ‘캘리포니아식’ 생활방식을 채택했다. 이들은 온종일 등반을 했다. 캠핑카에서 지내면서 베르동 협곡을 공략하고 며칠에 걸쳐 루트를 연구하고 유연성 훈련과 근육강화 훈련을 병행했다.(7) 이들은 순수한 클라이밍을 하나의 독자적 스포츠로 온전히 영위했다. 에들랭제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손끝에 달린 인생’(8)은 전 세계에 소개됐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클라이밍은 정복할 처녀봉이 감소함에 따라 알피니즘도 변모해야 한다는 오래된 목소리에 힘입어 더욱 발전했다. 알피니즘은 ‘최초’를 추구했던 귀족들의 관행에서 벗어나 한층 난이도가 높고 기술적 몸짓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81년 ‘삶의 변화’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근로시간 단축(주 39시간 근무, 5주일 유급휴가)을 도입함으로써 사회적 발전과 경제성장 촉진을 동시에 노렸다. 같은 맥락에서 청소년체육부 산악담당 고문이었던 작가 이브 발뤼는 18개 대책을 제안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3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과 그룹 활동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산악 관련 직업을 개혁함으로써 단체연수를 실시하는 협회들의 요구에 부응한다. 둘째, 도심과 학교의 암벽 설치를 지원한다. 셋째, 프랑스 산악연맹(FFM) 주관으로 각종 대회를 개최한다. 특히 이 마지막 내용은 다른 체육활동에 대한 등산의 차별성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에 적대적이던 산악계에 작은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1987년 프랑스 산악연맹은 2년 전에 클라이밍 대회 개최를 목적으로 설립된 프랑스 클라이밍연맹(FFE)과 통합되어 프랑스 산악·클라이밍연맹(FFME)으로 재탄생했다. 종전에는 ‘국가적 알피니즘’과 그에 걸맞은 우파적 가치를 표방하는 단체였다면 이제는 일종의 ‘사회적 클라이밍’을 진흥시키는 기관이 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1984년 10월 5일자 시행령을 통해 퐁텐블로숲 암벽과 같은 인공절벽에서 대가를 받고 강습, 그룹 활동, 훈련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클라이밍 국가자격증을 신설했다. 새로운 자격증이 도입되자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데에 익숙지 않던 고산가이드 노조는 거세게 반발했다.

프랑스 노동체육·체조연맹은 학교와 공공장소에 인공암벽 설치를 추진했다. 연맹 회원인 질 로티용과 장마르크 블랑슈가 최초로 훈련용 인공등반훈련장을 설계했고 1982년에는 코르베유 에손 지역의 고등학생과 교사들이 힘을 모아 인공암벽을 세웠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틀 무렵 빙벽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멋진 화강암의 붉은 입자를 감상하면서 하는 등반만이 제대로 된 등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친부(親父)(알피니즘) 살해는 끝났으니 이제 입지를 공고히 하는 일(bétonner ‘콘크리트로 짓다’라는 뜻도 있음)만 남았느냐”(9)며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암벽 설치 사업비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체육부의 “보조금이 풍기는 숨 막히는 냄새”(10)에 역겨움을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암벽은 체육관, 초등학교, 중학교, 레저시설, 도심공원, 전문매장, 동호회 사무실, 사설 헬스클럽 등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코르베유 고등학교 교사들이 스타트를 끊은 후 5년 동안 프랑스 전역에 설치된 인공암벽은 100여 곳에 달했다.

클라이밍 경기를 개최하는 문제는 1980년대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체육·체조연맹은 “초인적 알피니스트의 신화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등반 스포츠에 접근하지 못하는 만큼 이러한 신화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연맹은 경기 개최를 통해 클라이밍을 홍보하고 추락을 둘러싼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음으로써 다수의 젊은이들을 인공암벽으로, 나아가 자연절벽으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소련의 경우 이미 1970~80년대에 서구와는 확연히 차별화된 접근방식을 택했다. 코카서스 산악지대, 파미르 고원 등지에 있는 인적이 닿지 않은 천연절벽에서 클라이밍뿐만 아니라 알피니즘 대회까지 정기적으로 개최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초보자, 엘리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등반가들이 이러한 발상이 등반을 눈요기용 스포츠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고 공식적인 순위 매기기를 일체 거부했다. 1985년에는 최고 수준 등반가들이 의기투합하여 ‘19인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등반이 “평가, 심판, 측정, 공인을 기반으로 너무나 음험하게 국가의 손에 넘어간 모든 스포츠에 저항하면서 우리 사회의 몇몇 전형(典型)에 대한 도피처”로 남아주기를 바랐다.

프랑스 최초의 절벽 등반대회를 일 년 앞두고 프랑스 산악회(CAF)는 분개하며 이렇게 밝혔다. “대다수 등반가들의 의견과 협회들의 뜻을 무시하고, 프랑스 산악스포츠 지도자들의 수수방관과 개인적·상업적 이해관계의 압력 가운데 프랑스에서 클라이밍 대회가 열리게 됐다. 미디어와 광고, 스피커와 음향장치, 맥주와 뜨거운 소시지, 놀란 관중, 그리고 유료 입장권과 함께 말이다.”(12)

오늘날 프랑스에 설치된 인공암벽은 2천 곳이 넘는다. 알피니즘과 달리 클라이밍은 사고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평야를 비롯하여 그 어떤 지역에서 즐길 수 있다. 클라이밍은 또한 중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고 바칼로레아 시험 선택과목이기도 하다. 프랑스 산악회는 자체적으로 클라이밍 선수단을 키우고 있으며 프랑스 산악·클라이밍연맹과 경쟁이라도 벌이듯 클라이밍과 스키알피니즘 경기를 개최하고 있다. 순위를 매기고 우승컵을 수여하는 문화가 스키알피니즘까지 파고든 것이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프랑스 산악·클라이밍연맹을 비난하는 지경이 됐다. 연맹이 산악 부문의 발전을 등한시하고 프랑스 ‘암벽등반’ 연맹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글·장폴 발슈 Jean-Paul Walch

저서로 <알피니즘의 기술과 역사 입문>(Guérin, Chamonix, 2012년) 등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naver.com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2>(공역)(2010) 등이 있다.

 

 

(1) <The Economist>, 런던, 2013년 2월 16일

(2) René Desmaison, <그랑드조라스에서의 342시간>, Hoëbeke, Paris, 2010년(초판 Flammarion, 1973)

(3) Pierre Lambert, ‘산은 죽이지 않는다’, <Tourisme et Travail>, 1948년 10월 제7호

(4) Pierre Allain, <알피니즘과 경쟁>, Arthaud, Grenoble, 1949년

(5) <Montagnes magazine>, Grenoble, 1983년

(6) <Sport et plein air>, Pantin, 2011년 7-8월호

(7) Patrick Edlinger, Jean-Michel Asselin, <파트릭 에들랭제>, Guérin, Chamonix, 2013년, Michel Bricola, Dominique Potard, <파트릭 베로>, Guérin, Chamonix, 2008년

(8) 1982년 프랑스 Antenne2에서 방영된 Jean-Paul Janssen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세자르상 후보에 올랐다.

(9) <Alpinisme et Randonnée>, 파리, 1982년

(10) Ibid.

(11) <Montagnes magazine>, 1983년

(12) <La Montagne et Alpinisme>,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