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는 어느 계급의 꽃일까?

2014-08-27     토비아스 웨이데거

 

   
 

귀족층이 고안한 등반 기법은 1980년 대중 스포츠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영웅의 시대에 등산가들은 무엇보다도 일반 대중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고자 했다. 산꼭대기의 아름다움과 거대한 자연에 대한 이들의 감수성은 외진 시골에 살고 있던 촌부들에 대한 경멸감을 동반한다.

과학 발견이 늘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은 아니다. 흔히 과학자들이 입자나 기적 같은 잡종(하이브리드)을 발견할 때 흔히 여론의 회의적 반응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러한 혁신이 생태계와 보건,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즉각적인 우려다. 그러나 최근 스위스의 샹긴스 베덴스빌 농업연구소(Agroscope Changins-Wadenswil, ACW)의 위대한 발견이 맞닥뜨린 분노의 도가니는 과학계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2006년 ACW의 농학자는 언론을 통해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에델바이스 종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름은 ‘헬베티아(Helvetia)’. 화장품 업계는 실재이기도 하고 상상일 수도 있는 항염증 성분 때문에 알프스 산의 이 작은 꽃을 이미 탐내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이 재배종이 시장에 활력을 주며 다른 스위스 전역처럼 산골 농민들의 유용한 소득원이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에델바이스의 산업적 가치론은 스위스 전역에서 분노를 촉발시켰다. 제네바 트리뷴에 실린 독자들의 기고를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요약된다. “스위스의 상징인 이 작은 꽃을 가만 내버려두라.” 국가의 상징물인 은빛 별 모양의 꽃은 오직 ‘목숨을 걸고 험한 산악을 오르며 모험을 감행’(1)하는 산악인들에게만 그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세기에 걸쳐 에델바이스에 투사되고 그 DNA에 결합된 가치를 보여준다. 즉 희귀성과 순수성이라는 가치다. 예전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스위스에서 에델바이스가 상징하는 가치는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헬베티아의 개발로 촉발된 저항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집단적 상징의 역사적 기원을 더 면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에델바이스의 상징은 유럽에서 1860년대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 등산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민들이 대부분이었던 등산객들은 높은 산에 오르는 노력과 등산의 덕목뿐만 아니라 그들 단체와 자연의 이상화된 비전을 칭송했다. 가냘프지만 굳센 알프스의 꽃은 그러한 의미를 완벽하게 함축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1873년 창설된 ‘독일 오스트리아 등산 연맹’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등산을 즐기는 신엘리트 계층이 그 이미지를 점유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위스 산골지역에선 꽃이 갖는 의학적 또는 영양적 자산은 알려져 있지 않았고 따라서 경제적 관심은 전무했다. 그렇게 에델바이스는 알프스 고원 목장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여기 저기 피어있었다.

그러나 불멸의 눈꽃이 부르주아 계층의 덕을 상징하는 새로운 역할을 도맡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가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결과로 에델바이스의 희귀성을 칭송하게 된다. 19세기 말엽 식물학 지식은 완전히 무시된 채, 사람들이 즐기는 여러 시와 그림을 통해 이 작고 가녀린 꽃은 성배와도 같이 묘사되었다. 에델바이스는 가파른 절벽이나 눈이나 얼음의 틈 사이에서 피어난다. 이러한 현혹은 시적 효과로 끝나지 않았다. 에델바이스가 매우 희귀한 식물로 여겨질수록 꽃을 딴 용감한 등산가의 영광은 더욱 빛났다. 영화 <황후 시시(Sissi l’impératrice)>부터 <헬베티아의 아스테릭스(Astérix au pay des Helvètes)>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숭고한 이미지는 오늘날 대중문화에까지 확대 재생산되어 실제보다 더 부풀려진 특별한 명성을 낳았다.

19세기의 그림과 시는 아마추어 등산가들의 상상 속에서 은빛 꽃과 연관된 또 하나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순수성이다. 순수성이라는 환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꽃을 정령화-‘눈의 여왕’(2)-한 성적인 은유다. 즉 남성적인 힘과 용맹의 화신인 등산가가 꽃-소녀를 정복하러 떠나는 것이다. 꽃이자 여인인 그녀는 점점 자취를 감추며 새침하고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완벽한 여성성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서 그녀의 곁에 접근하는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또 다른 형태로 에델바이스는 절대적인 엘리트주의 세계관을 구현한다. 에델바이스 꽃이 피는 순결한 눈에 덮인 산 정상은 도시와 많은 도시 노동자들의 혼탁한 세계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렇듯, 에델바이스는 일반 대중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고아한 삶이라는 부르주아의 유토피아에 어울린다.

부르주아적 등산가와 프롤레타리아적 지역민간의 충돌

이러한 이상주의를 근간으로 19세기 등산가 계층은 석양에 빛나는 설산에 피어난 불멸의 존재에 닥친 실재적 또는 가상의 위협에 격렬히 반응하곤 했다. 그들에게 가장 심각한 위험은 알프스 관광이 발달하면서 인기를 끌게 된 에델바이스 꽃의 판매였다. 도시의 꽃장식가들은 부르주아의 정원을 야생화로 꾸며주는 새로운 유행으로 돈을 벌고 산골 마을 사람들은 주변에서 꺾은 꽃다발을 관광객들에게 팔면서 근근이 생계비를 마련했다.

이런 현상에 경각심을 느낀 원예가 쥬느봐 앙리 코레봉과 스위스 알프스 클럽 등산가 회원들은 1883년 식생보호연합(3)을 창설했다. 이들은 캠페인을 통해서 꽃을 판매하여 생기는 폐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관광객들이 꽃을 사지 않도록 설득했다. 그런데 생태운동의 선구자였던 이들은 국가의 개입을 불신했다. 비타협적인 자유주의자들인 이들은 심지어 식물보호법의 도입까지 반대했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주장은 놀랍다. 오직 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알프스 산은 애국주의와 미학주의의 색을 입혀 묘사된다. 이들은 당시 알프스 계곡에 도로 건설, 철로 건설, 습지 파괴 등 도시화로 인한 환경 문제와 확장일로에 있던 대중교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연 환경의 취약성에 대해 근대적 인식이 생겨나던 시기에 이 같은 단체들의 역할을 저평가할 수는 없다.

알프스산의 보호자들이 주창한 자연관은 계급 관점과 직결된 좁은 자연관이었다. 관광지에서 야생화 판매가 성황을 이루게 된 주요 원인은 지역민들의 가난 때문이었는데도 도시의 부유한 등산가들은 그러한 현상의 사회적 측면을 도외시했다. 그들의 의식에 산골 사람들은 그저 탐욕스럽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촌부들이었다. 모순되게도 도시의 엘리트 계층은 지역민들이 그 땅에 대해 갖는 이용권을 부인했다. 자신들이 먼저 그 땅의 상징적 가치, 또 이후 경제적 가치를 알아봤다는 것이다.

자연의 이용에 대한 갈등은 스위스 주변 국가들에서는 더욱 격앙된 모습이었다. 1900년 독일 오스트리아 등산 연맹 회원들이 뮌헨에서 창설한 알프스 식생 보호연합은 군대식 수사를 구사했다는 면에서 다른 단체들과 달랐다. 에델바이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강압적인, 심지어 군사적인 조치를 도입하는 것이 정당시되었다. 1920년 이 단체의 회원들은 ‘산악 수호대’를 결성한다. 식생지 주위를 정찰하는 임무를 띤 민병대로, 필요하면 침입자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한다. 이렇게 ‘강인한’ 자연의 친구들은 신문을 통해 ‘에델바이스 도둑’과 또 다른 ‘식생 파괴자’(4)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알프스 산의 ‘가치’와 이용을 가로챈 등산가들이 내세운 주장은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격화되던 계급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이제 그 대상은 알프스 목장의 촌부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점차 알프스 산은 도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전체 간의 대리전이 펼쳐지는 장이 되었다. 등산가들은 노동자를 포함, 점점 인구의 여러 계층이 산의 묘미를 알게 되는 것이 큰 불만이었다. 이 보수층에게 대중 관광의 등장은 식생을 위협하는 것일 뿐 아니라 특히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침해로 느껴졌다. 일반 대중이 몰려오면서 이전까지 거의 엘리트 계층만을 위해 남겨진 순수의 세계가 조락한 도시 삶으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자연을 수호하는 아버지로 자처하면서 등산가 조직들은 그들의 유희의 땅에 대한 영원한 독점을 요구했다. 공유에 대한 이러한 좁은 소견을 보여주는 예로 스위스 등산 클럽은 1907년부터 1980년까지 여성 입회를 금지했다(오늘날에는 여성이 이 클럽을 이끌고 있다).

그렇지만 등산가들에게 이데올로기 문제보다는 환경 문제가 더 중요했다. 산악계에서는 ‘야만’에 맞선 비난이 쏟아졌다. 등산 전문지를 보면, 비판론자들은 계속해서 에델바이스의 이미지를 광고나 대중문화에 이용하는 것을 혹평하고 이 고상한 꽃을 세속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천박한 취향’이라고 지적했다. ‘헬베티아’ 논쟁에 앞서 1세기도 더 전에 신령스러운 이 식물을 재배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1884년 집에서 재배 가능한 에델바이스 첫 모종은 에델바이스 보호 연합의 책자에 ‘괴물’로 묘사되었다. 한 오스트리아 작가(5)는 이를 두고 흰 꽃이 자연 서식지에서 쫓겨나 ‘쇠락한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고 비유했다. 상업화와 대중문화는 등산가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희귀성과 순수성의 가치를 하나씩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숭배하던 꽃이 갑자기 도시 한가운데 등장하고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식물의 수호자들이 벌인 투쟁은 대중에게 경멸을 샀다. 도시는 점차 민주화되어 가는데 자신들의 특권에 전전긍긍하는 부르주아의 계급의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수호하기 위한 악착스러운 공격은 공장과 자본주의 진앙지인 도심거리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상화된 알프스 자연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에델바이스는 자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계급 투쟁의 상징적 매개체가 되었다.

글‧토비아스 쉐이데거 Tobias Scheidegger

취리히대학 민중문화연구소

번역‧박지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1) 제네바 트리뷴 2006년 11월 20일자 기사

(2) 에스텔라 칸지아니 <사부아 지방의 복식, 전통 및 전설> 2003년본 : Estella Canziani, Costumes, mœurs et légendes de Savoie, La Fontaine de Siloé, Montmélian, 2003(première édition 1905)

(3) 안느 보네슈 외 여러 저자들이 공저한 2005년판 <Aux Alpes, Citoyen!> : Anne Vonèche, «Henry Correvon, histoire d’une vocation», in Annemarie Bucher, Johannes Stoffler, Fred Truninger, Anne Vonèche, Aux Alpes, Citoyens! GTA Verlag, Zurich, 2005

(4) Cf. Georg Frey, «Erreichtes und Erstrebtes. Betrachtungen zum Alpenpflanzenschutz», in Jahrbuch des Vereins zum Schutze der Alpenpflanzen, Jahrgang 13, Eigenverlag, Munich, 1941

(5) Bulletin de l’Association pour la protection des plantes, N° 2, 1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