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적 쾌락을 위하여

2014-08-27     모나 숄레/에블린 피에예

“당신이 아무리 ‘저급한’ 기쁨과 ‘고급스러운’ 기쁨을 떠들어봤자 예술은 당신에게 냉랭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상류지역에서뿐만 아니라 하류지역에서도 활동하기를 원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이상 조용히 내버려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오래전부터 나는 가능한 모든 풍경을 소유하고 있다고 으스댔고, 회화 및 현대 시의 저명인사들을 가소롭게 여겼다. 나는 문 위의 장식, 배경 그림, 곡예단 천막, 간판, 서민적인 채색삽화 등 하찮은 그림들을 좋아했고, 교회의 라틴어, 철자를 무시한 에로틱 서적, 우리 선조들의 소설, 요정 이야기, 어린 시절의 작은 책, 오래된 오페라, 순진한 리듬 등 유행 지난 문학을 좋아했다.”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

이 책에 언급된 작품들은 그것이 저항문화와 대중문화 중 어디에 속하든 간에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같이 초라하고 부적절하고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적절하고 진지한 상류문화가 아닌 서민문화 혹은 하층문화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처럼 악명 높은 문화적 배경에서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고, 세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탄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TV 출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예술적 품위의 관례에 개의치 않고 대중을 위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곧 공식적 예술에 수반되는 클리셰, 스타일, 목적성, 자기검열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저평가되는 장르들은 형태의 배반이며, 의미의 배반이다. 이것들은 형태를 새롭게 하며, 의미에 질문을 제기한다.

그렇다고 이 장르들이 엘리트 여론에 기계적으로 역행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형태의 속물주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장르들이 상업성 짙은 졸작마저도 다수의 숨겨진 욕망을 초월적으로 구현한 작품인 양 행세하고, 이를 흥행 성공의 요인으로 파악하자는 것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상품’이라는 것은 여론의 비위를 맞춰주고 유혹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중문화 상당 부분이 조작적이고 소외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1)

그러나 대중문화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과감성과 효율성을 겸비한다면 역설적이게도 흥미진진하면서도 시야를 밝혀주는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을 편견 때문에, 아니면 팬들로 이뤄진 군중과의 동화를 꺼린다는 이유로 멀리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진부하거나 평범하거나 정말 조악한 대중문화 작품도 나름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에서 롤랑 바르트에 이르는 위대한 전통적 비평가들도 지적했듯, 이러한 작품들에 찬사를 보내는 사회의 정신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엘리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관객, 독자, 청자는 수동적이지 않다. 조종을 일삼는 산업이 마음대로 모양을 빚을 수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작품을 조망하는 능력에는 수용자들 간의 격차, 특히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항상 능동적 자세로 작품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관심사, 감수성, 당시에 품고 있던 의문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고, 내 것으로 삼고, 변형한다.

때로는 이러한 대중문화를 구성하고 때로는 여기에 반기를 들면서, 인정받은 주류 문화의 주변부에서 멸시당하면서도 꽃을 피우는 문화가 있다. 이른바 ‘마이너’ 문화이다. 무시당하던 이런 형태의 문화를 높이 평가한 대표적인 이들이 초현실주의자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행동한 저항문화 운동가들이다. 이들은 기존 모델들과 거리를 두는 한편 어린 시절의 추억 속 상상과 비슷한 상상 세계와의 관계를 즐겼다. 즉 자유롭게, 아무런 강박관념도 없이, 모든 질서와 관습에서 해방된 채 오로지 쾌락에만 관심을 가졌다. 비즈니스 세계도 이러한 작품들의 매력을 간파하였다. 록 음악과 만화가 전복적이라고? 누군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나쁜 장르’를 수거하여 이를 변형하고 중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새로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고 흥미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새롭게 탄생한 ‘나쁜 장르’들이 문화를 다시 창조하고 전복하고 해방시키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문화의 위계를 따질 때 공허할 정도로 쉬운 작품들만이 흥행에 성공한다고 넘겨짚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크나큰 착오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만 해도 19세기 전반 미국 서민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2) 탄광촌에 세워진 간이극장에서, 서부에서, 당구대 두 개를 연결해 급조한 무대에서도 그의 작품을 공연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신문에 연재되어 수많은 독자들을 열광시키고, 울게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귀족적 어투와 익살적 요소가 공존하며, 디킨스의 소설은 멜로드라마성과 강렬한 희극성을 주저 않고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와 디킨스, 이 두 작가만 보더라도 천박함, 장르의 혼합, 정제되지 않은 문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 고상한 취향이란 “질서 유지를 위한 대비책”(3)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글·모나 숄레 Mona Chollet, 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최서연

 

(1) ‘순응주의의 공장’, <마니에르 드 부아> 96호, 2007.12-2008.01

(2) Lawrence W. Levine, <상위문화, 하위문화. 미국에 등장한 문화적 위계질서의 등장>, Roger Chartier, La Découverte, 파리, 2010년

(3) Victor Hugo, <William Shakespeare>, Flammarion, 파리, 2003년(초판 1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