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일가 없는 삼성그룹을 상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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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지 100일을 넘기면서 ‘이건희 이후 삼성’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 삼성그룹 기업지배구조의 재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말하는 이들은 삼성그룹의 상속을 둘러싼 지배구조 재편 역시 ‘시장 원리’와 ‘사유재산권’ 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시장’이 무엇인가? 주식시장과 M&A 시장이다. 그런데 주식시장과 M&A 시장의 논리에 따라 삼성그룹 같은 기업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과연 진보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삼성그룹 같은 대기업들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따라서 재벌 일가의 상속 문제는 부유한 가문의 일반적인 재산 상속 문제와는 다르다. 그것은 또한 삼성그룹이나 현대차그룹 같이 한국경제와 5천만 국민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거대한 기업그룹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배권(경영권) 상속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민경제상 중요한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가 총수 일가의 상속 과정에서 급격하게 변동하여 5천만 국민의 삶에 불확실성이 발생하는데 그걸 사회공동체와 국가가 그냥 손 놓고 바라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을 ‘시장과 사유재산권’이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란 말인가?
물론 이건희 회장이 자기 아들인 이재용 사장에게 상속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돕기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8개월 전에 발간한 책 <굿바이 근혜노믹스>의 한 장 전체를 삼성 등 재벌 일가의 지배권(경영권) 상속 문제에 할애했다. 그 내용은 “이건희 일가가 없는 삼성그룹을 상상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총수 일가의 번영이 아니라 기업그룹(기업집단) 체제의 존속과 번영이다. 총수 일가의 영향력을 줄이면서도 기업그룹 체제는 유지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국가와 사회공동체가 삼성그룹 등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구상이 중요하다.
상속세, 재벌 가족이라고 예외는 없다
현행 상속법에 따르면 과세 대상이 30억 원이 넘어갈 경우 상속재산의 50%를 상속세로 내야한다. 기업 대주주에게 적용되는 지배권(경영권) 상속의 경우, 프리미엄 할증 과세까지 적용되어 지배권 프리미엄인 20~30% 할증까지 부가된다. 따라서 지배권 상속 주식에 대한 상속증여 세율은 최대 65%에 달한다. 이건희 일가의 경우, 10년 전 이재용에게 상속하면서 겨우 16억의 상속세밖에 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탈세 또는 편법이었는데, 참여연대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쳐서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국가를 농락한 이건희 회장 일가를 강력히 처벌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간 말해온 재벌과의 타협은 대기업그룹과의 타협이지 총수 일가와의 타협이 아니다. 한국경제의 과거와 현재, 미래 성장을 위하여 대기업그룹이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뜻이지 그 대기업그룹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반드시 총수 일가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재벌 일가의 상속은 그룹 해체의 가능성을 내포
지금도 재벌 총수 일가는 1~4%밖에 안 되는 쥐꼬리만한 지분으로 거대한 기업그룹을 통치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상속 과정에서 65%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게 되면 그 지분은 더 작아진다. 상속 과정에서 총수 일가의 지분과 지배력이 약화되면 것은 좋은 일 아닌가? 그래야 민주적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 아닌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총수 일가의 지분 감소에 정확히 비례하여 주식펀드와 개미투자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재테크 주주자본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게다가 총수 일가의 지배권 상속 과정에서 삼성그룹 또는 현대차그룹 등을 통째로 삼키려는 기업사냥이 촉발될 수도 있다. 실제 2003년 소버린 펀드의 SK그룹 공격은 최종현 前회장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아들인 최태원 회장으로의 지분 상속이 급작스레 우왕좌왕 진행되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카리브해의 조세포탈 지역에 소재한 투기 성향의 소버린 펀드가 SK그룹을 공격할 때 절감했듯이, 우량 재벌그룹의 해체 가능성을 내포하는 이런 사태는 국민경제에 큰 타격이다.
이렇듯 재벌 가문의 편법적인 재산상속을 엄단할 것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바람이 자칫 국민경제적 재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벌들의 탈법, 편법 상속을 절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지배권 상속 지분을 국가가 보유 관리하자
그렇다면 어떠한 대안이 가능할까? 먼저 국가, 즉 민주공화국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직접 개입하는 방법이 있다. 이재용 사장의 경우 이건희 회장이 사망할 경우 약 6조~7조원의 상속세를 납부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부자지만 이 정도의 현금은 없다. 그 경우 상속받은 주식의 일부를 국세청에 물납 형태로 넘길 가능성이 커진다. 국세청은 받은 현물 주식을 시장에 팔아 현금으로 만든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주식을 은밀하게 매집하여 에버랜드의 새로운 대주주가 될 경우, 삼성그룹 전체의 지배권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차라리 국세청이 그 주식을 시장에 내다팔지 말고 정부에 넘기면 어떨까? 어렵지도 않다. 국가지주회사 같은 것을 설립하여 그 기관이 재벌 상속 주식을 소유·관리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면 된다.
국가지주회사는 당연히 대기업그룹의 핵심 지주회사(예컨대 에버랜드)의 2대 주주 또는 3대 주주로 등극하여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에 들어갈 수 있다. 국가지주회사를 대표하는 사외이사가 에버랜드에서 현 경영진과 이재용을 지지하면 일단 삼성그룹의 지배권이 안정화될 것이다.
국가지주회사는 삼성그룹 해체보다는 그룹체제의 존속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대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 삼성 계열사들에 있어 하청기업 수탈과 노동조합 탄압을 막아내고, 동시에 총수 일가의 사익을 위해 벌어지는 계열사 신설 또는 인수를 저지할 수 있다. 만약 이재용 등 3세가 그룹 최고경영자로서 무능하여 삼성그룹과 그리고 국민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면, 그를 교체하는 쪽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혹자는 그것을 국영기업화라고, 국영 기업은 경영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지 않다. 국가지주회사의 역할은 지배권 행사에 그친다. 일반론적으로, 기업에서 경영(management)과 통제(control)는 구별된다. 국가지주회사의 역할은 삼성그룹에서 ‘경영진’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경영진을 지배 또는 통제(control)하는 역할, 구체적으로는 대주주 및 사외이사 역할이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 공익재단이 최대주주
국가가 그토록 껄끄럽다면 공익재단을 이용하자. 이재용 등 3세들이 상속세로 어차피 납부해야 할 주식을 국세청이 아닌 공익재단에 증여토록 하면 된다. 그 경우 공익재단 대표자가 삼성의 에버랜드, LG의 (주)LG 같은 핵심 지주회사의 2대 또는 3대 대주주로서, 이사회에 참여한다.
물론 과거 총수 일가는 공익재단을 악용하여 편법으로 그룹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의지가 있다면, 공익재단을 재벌 가문과 무관한 독립적 공익 기구로 만들 수 있다. 재벌 특별법을 제정하여 관련 그들이 만든 공익재단 이사회에는 재벌 일가가 아니라 공익적, 진보적 인사들이 들어가도록 하면 된다. 그간 재벌개혁을 위해 노력해온 분들이 그 공익재단에 들어가 활동한다면 삼성 등 대기업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 경영, 편법 상속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좋은 사례가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이다. 이 그룹의 계열사인 일렉트로룩스, ABB, 사브 등을 지배하는 회사가 지주회사인 (주)Investor인데, 이 지주회사의 대주주는 발렌베리 가문이 아니라 공익재단인 발렌베리 재단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지난 100년간 여러 차례 상속 때마다 보유 주식을 발렌베리 재단에 기부했는데, 그리하여 여러 개의 공익재단이 지주회사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들 공익재단의 이름에는 발렌베리가 붙어 있지만 창업자 일가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즉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은 사유재산도, 국유재산도 아닌 공유재산이다.
또 다른 사례는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인 독일의 보쉬(Robert Bosch)다. 이 회사의 최대 주주(주식의 92% 소유)는 보쉬 가문이 아니라 공익재단인 Robert Bosch Foundation과 그 의결권을 100% 위임받은 ‘보쉬 산업신탁회사’이다. 이 회사 역시 사유재산도, 국가재산도 아닌 공유재산이다.
국민연금에 ‘사회공익적 계정’을 따로 만들자
어떤 이들은 국민연금이 삼성 등 대기업에서 대주주 또는 적극적 주주 역할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국민연금은 현재 440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에서 총수 일가보다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삼성그룹 계열사에 22조원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만 해도 이건희 일가보다 더 많은 지분이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때 과연 그 목적이 공익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국민연금의 투자 목적은 오로지 수익 극대화이다. 그리고 주주권 행사가 수익 극대화만을 지상 목표로 행사될 때, 대규모 정리해고와 희망퇴직, 장기투자 감소가 일어난다. 국민연금이 투자하는 자금을 운용하는 자산운용 펀드사의 대표가 삼성전자, 현대차 등의 사외이사로 들어간다고 할 때 과연 그가 임금 인상, 하청단가 인상을 주장하겠는가? 국민연금 수익률이 뚝뚝 떨어질 텐데?
군인공제회와 같은 공무원 관련 연금 펀드들이 맥쿼리의 투기를 돕는 등 투기자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국민연금 역시 높은 수익률만 올린다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파생상품 등에 닥치는 대로 투자하는 펀드라서, 다른 펀드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국민연금과 군인공제회만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시장과 주식시장에서 막대한 연기금을 투자하는 세계 각국의 공적 연기금들이야말로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의 핵심 주역들이다.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인 미국에서 공적 연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는 연기금 사회주의는커녕 종업원 대량해고와 하청단가 인하, 금융버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즉 공적 연기금들은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금융위기를 조장하는 핵폭탄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복지국가에 기여하도록 그리고 대기업의 ‘선량한 대주주’ 역할을 하도록 하려면, 그것을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단기 수익성과는 무관하게 운용되는 국민연금 계정을 따로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 440조원, 10년 뒤 1,000조 원의 국민연금에서 그 절반을 뚝 떼어내 독립 계정을 만들고, 그것은 수익률 극대화가 아니라 공공주택이나 국공립 어린이집, 국공립병원, 국공립 노인요양시설 같은 공공 복지서비스 시설의 신축과 운용에 투자하게 해야 한다.
그런 공익적 투자 계정이라면 삼성전자 같은 회사에 투자하여 공익적 주주권 행사를 하도록 할 수 있다. 즉 그런 공익적 투자자라야 비로소 삼성전자 등에서 노조 설립과 비정규직 보호, 하청단가 인상 같은 공익적 요구를 행할 수 있다.
‘시장은 훌륭한 하인이지만 최악의 주인’이라는 격언이 있다. 시장과 사기업은 효율적으로 일하는 훌륭한 하인일 수 있다. 단 그들이 사회공동체의 주인으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 기업그룹을 포함한 사기업의 존재가치와 효율성을 인정하되, 어떻게 하면 그들을 사회공동체와 공공이익에 복무하는 머슴으로 개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글‧정승일
서울대 물리학과를 다녔으며, 1980년대 내내 철학과 정치경제학, 민주화운동에 몰두했다. 199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금융경제연구소,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에 근무했으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굿바이 근혜노믹스>를 비롯, <Crisis and Restructuring in East Asia>,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