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주의를 세대화하는 언론에 유감

2014-08-27     김선기


7월 1일의 일이다. <한겨레21> 1019호를 통해, 연세대 학내 언론 <연세통>이 작성한 기사를 “감히 연세대 동문 동문 거리는 놈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이는 곧 사회적 논란으로 번졌다. 연세대 내에서 서울캠퍼스와 원주캠퍼스, 수시와 정시, 현역과 재수생(N수생) 등을 구별 짓는 묵시적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다. 기사에 대한 논란이 일자, <한겨레21> 1020호는 후속 기사와 <우리는 찬성에 차별합니다>(1)를 쓴 사회학자 오찬호의 기고를 실었다. 연세대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학과 대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이러한 서열화와 구별 짓기의 논리가 침투해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이 논란을 생산적 논의로 이끌겠다는 의도였다.

<연세통>의 최초 보도를 변호하거나 혹은 그 함의를 ‘잘’ 설명하기 위해 쓰인 후속 기사들은 ‘학벌 카스트’의 범위를 연세대 내부에서 대학사회 전반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여전히 기사들은 대학사회, 대학생의 범위 밖까지 확장된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여겨지는 학벌주의의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대학생들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번만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학생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에 비서울대 출신 대학원생들의 출입이 불가능한 게시판이 만들어진 일이나, 캠퍼스 간 통합이 문제가 되었던 한국외대의 경우를 다루면서 언론들은 대학생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서열화 논리를 어김없이 지적해왔다. 각각의 사안마다 필요한 논의의 결들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함에도 불구하고,(2) 학벌주의와 관련해 ‘과거와 달라진 대학생들의 비윤리적 사고/행동’을 지적하는 것은 보도의 마스터키 프레임처럼 사용됐고 자연스럽게 여론은 대학생들을 비난하는 식으로 흘러가곤 했다.

대학생들에게 정말 학벌 카스트 의식이 만연해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른 할 말도 많다. 내면화된 학벌 구별 짓기 의식과 명시적이고 직접적, 물리적인 학벌 서열을 기준으로 한 차별적 행위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지, 이 문제를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믿음과 그 원칙을 붕괴시키는 개인/제도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대학 내부의 서열화와 대학 간 혹은 캠퍼스 간 서열화에는 전혀 다른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한다. 오늘날의 대학생 모두에게 학별 서열화 논리가 내면화되어 있다는 <한겨레21>이나 오찬호 등의 핵심 주장에는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날 한국사회의 학벌주의를 보여주기 위한 비평/보도/분석의 도구로 지속해서 대학생/20대/청년세대의 범주를 소환하는 행태 자체에만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시대적인 것의 세대화

세대의 개념, 혹은 세대적인 관점은 주로 사회·역사적인 변화/변동에 대한 기대/예상과 맞물려 등장해 왔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젊은 세대가 출현하게 되면 그들이 사회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는 연령대가 됐을 때 사회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요컨대, 세대의 변화가 시대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적 관점은 아주 당연히 의심해보아야 할 역관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즉, 시대의 변화가 세대의 변화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다. 만약 시대의 변화가 세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분석의 초점은 세대가 아닌 시대에 맞춰져야만 한다. 시대의 변화는 어떤 세대에게만 영향을 주고 어떤 세대는 비껴가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학벌주의가 심화되고 있다면 그것은 세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대적인 현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물론 사실은 학벌주의가 정말로 심화되었는지의 문제부터 ‘느낌’으로 얘기하지 말고 충분한 근거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정시와 수시, 서울캠퍼스와 지방캠퍼스, 주류 학과와 비주류 학과를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식의 사고는 기성세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가족주의를 통한 부의 재생산 전략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쉽게 말해,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다니는 내 자식과 같은 대우를 받으려는 연세대 원주캠퍼스 학생들을 좋게 보는 부모, 수능 3등급 맞은 내 자식이 다니는 대학이 6등급 받은 애들이 다니는 대학과 동급 취급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학벌주의 문제는 한국의 대학생의 문제가 아닌 한국사회의 문제다. 사실 모두가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학벌주의 문제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로 자꾸만 대학생, 20대 따위를 소환한다. 오찬호의 논의가 대표적이다. <한겨레21> 1020호의 기고에서 그는 IMF 구제금융 이후 ‘나부터’ 살아야하는 식의 시대적 분위기를 학벌주의에 근거한 차별의 양상이 달라진 근저로 찾는다. 분명히 그 역시도 이것이 시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젊은 세대에게 물 흐르듯이 침투되었다”고 언급함과 함께 이 시대적 문제를 ‘세대화’해버린다. 시대적인 것을 세대화하는 것은 언론들도 예외가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학벌주의를 이야기하기 위해 대학생들의 ‘막말’을 가져오는 언론은 많지만 기성세대들의 학벌주의 의식이나 학벌주의를 강화하는 제도적 기제에 대해 파고드는 언론은 없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상황은 시대적인 현상을 특정 세대를 통해 풀어보겠다는 접근법을 넘어서서, 이것이 정말 ‘세대적인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세대를 규정지으려고 하는 시도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가장 최근에 눈에 띄는 해당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는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는 세대의 변화를 보기 위해 ‘오늘날의 20대’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비교군은 오늘날의 20대보다는 덜 차별주의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 속 과거의 20대’다. 이는 분명 세대 간의 차이를 분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것에만 한정되어야 할 연구방법이다. 세대의 변화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20대’와 ‘오늘날의 40대’를 함께 연구하여 비교해야 하며, 연령 효과(3)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40대’와 ‘과거의 20대’, 그리고 ‘오늘의 20대’와 ‘미래의 40대’에 대한 시계열적 분석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밀한 세대적 분석 없이 오늘날의 20대 내부에 대한 분석만을 가지고 세대의 개념을 논한다면, 이것은 시대적 현상을 세대적 현상으로 치환하는 오류 이상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세대주의(Generationalism)는 왜 문제적인가?

<한겨레21>의 보도를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입장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⓵소수든 다수든, 익명이든 실명이든 팩트를 보도한 것이다. ⓶학벌주의에 대한 사회적 반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지 특정 집단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만에, ‘선한 의도’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한 세상일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글의 사회적 영향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쓰는 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성찰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단적으로 연세대에 재학 중인 한 지인은 <한겨레21>의 최초보도가 이슈가 된 다음날 한 식당에서 옆 테이블 어르신들이 “신문 보니까 연대 애들이 그렇다더라”며 혀를 끌끌 차는 걸 목격해야만 했다.

시대적인 사회의 문제를 세대(혹은 다른 집단 범주)의 문제로 환원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의 한계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연세대 카스트’나 ‘서울대 순혈’, ‘20대 괴물’과 같은 선정주의적인 프레임으로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면, 결코 논의는 생산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 집단/공동체(연세대/20대)를 비난하게 만드는 보도 프레임 속에서 거기에 속하지 않은 누군가들(비연세대/기성세대)은 억울한 연세대생/20대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의 책임에서는 스스로 자유로워진다. 논의의 방향이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은 <한겨레21>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대중 독자들의 난독증 때문이 아니다. 이는 명백히 사회의 문제를 특정 집단 내부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한 필자들의 잘못이다.

사회문제를 특정 집단 내부로 환원시키는 전략에서 가장 쉽게 포착되는 집단이 세대의 범주, 특히 청년세대(20대, 대학생)다. 영국의 사회학자 화이트는 세대주의(Generationalism)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현상을 포착한다. “정치가, 저널리스트, 대중적 지식인들이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다른 개념을 제쳐 두고 세대의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4) 독일의 학자들도 “다양한 사회정책 담론과 과학 분과에서 ‘세대’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도구화되는 상황”을 지적한다.(5) 한 연구는 캐나다인 노동자 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구술 인터뷰 결과, 참여자들이 젠더 등 다른 범주에 비해 ‘세대’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6) 세대는 갈수록 더 많이, 더 쉽게 사회적인 것, 시대적인 것을 치환하는 범주로서 이용되고 있다.

화이트에 의하면, 세대주의가 문제적인 것은 그 현상이 다원적 에토스나 정치적 지위의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보편적 개념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는 <한겨레21>의 학벌 카스트에 관한 기사가 촉발한 이번 논쟁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앞서 보았듯, 시대적인 것을 세대적인 관점이나 사례를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결코 학벌주의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낳지 못한다. 단지 ‘요즘 대학생들’의 세계관, 인성 따위가 왜곡되고 폄하되는 방향으로 이어져버릴 뿐이다.(7) 효과적이지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은 학벌주의의 세대화를 중단해야 한다. 대신 실제 취업, 승진 시에 학벌 카스트에 따른 차별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폭로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 대학생들의 사례를 통한 학벌주의 보도가 그들이 주장하듯, 대학생을 팔아먹는 선정주의적인 전략이 아니라 학벌주의를 해결하려는 선의에 기반한 것이었다면 말이다.

글‧김선기

20대 언론 <고함20>(www.goham20.com) 발행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과정

 

(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개작한 단행본으로, 오늘날 20대가 학벌사회의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며 스스로가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극적인 책의 제목이나, 20대를 ‘괴물’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 등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Cf. 오찬호(2012), <불안의 시대, 자기계발하는 20대 대학생들의 생존전략>, 서강대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오찬호(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 스누라이프 내에서 학부생 전용 게시판을 주장하는 논리가 생긴 것이 단순히 타대 출신 서울대 대학원생들에 대한 ‘학벌 차별’ 때문만은 아니다. 스누라이프 게시판에 올라온 다양한 종류의 문제적 발언이 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는 바람에 학교와 학생들이 비난을 받는 일이 계속되자 학부생들만 볼 수 있는 게시판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언론은 이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 학생들이 캠퍼스 통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것 역시 ‘용인캠퍼스 차별’의 맥락 외에도, 캠퍼스 통합으로 인해 강의당 수업인원이 증가하게 되면 서울캠퍼스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 또한 서울캠퍼스 학생들이 시위를 통해 지적한 가장 큰 문제는 ‘학교 측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하는 문제였다. <한겨레>는 2011년 10월 27일 “용인캠퍼스와 통합 안돼, 외대 학생들 씁쓸한 투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외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도 학벌주의를 체화한 대학생들의 비윤리적 행태 프레임으로만 보도했던 바 있다.

(3) 세대의 개념, 그리고 세대 효과는 상호 이질적인 세 가지 효과의 합으로 구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분석에 있어 주의를 요한다. 사회학자 박재흥은 “세대 연구 결과 드러난 차이가 출생 이후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나 사회화에 기인한 것인지(코호트효과), 현재의 특정한 생애주기 단계나 연령에 기인한 것인지(연령효과), 혹은 특정한 관찰 시점에 기인한 것인지(기간효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고 언급한다.(Cf. 박재흥(2001), 세대 연구의 이론적·방법론적 쟁점, <한국인구학>, 제24권 제2호, 47~78.) 예컨대, 20년 전 20대들의 진보적 정치 성향이 40대가 되었을 때까지 유지된다면 이것을 코호트효과, 즉 특정 세대의 성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20대들의 진보적 정치 성향이 40대가 되었을 때 보수적 정치 성향으로 바뀐다면 이는 20년 전 드러난 진보적 정치 성향이 연령효과에 의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가능케 한다.

(4) Cf. White, J.(2013), Thinking Generations. The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64(2), 216~247

(5) Cf. Parnes, O., Vedder, U. & Willer, S.(eds.)(2008). Das Konzept der Generation, Eine Wissenschafts-und Kulturgeschichte. Frankfurt a. M.: Shurkamp.(전상진(2013). 경제민주화와 세대: ‘연금을 둘러싼 세대들의 전쟁’ 레토릭에서 나타나는 세대의미론과 활용전략의 변화. 한국사회학회(편). <상생을 위한 경제민주화>(p.294~324)에서 재인용)

(6) Cf. Foster, K.(2013). Generation and discourse in working life stories. The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64(2), 195~215

(7) 이러한 사례는 88만원 세대론의 아류로 등장했던 ‘20대 개새끼론’을 연상하도록 만든다. 야권/범진보세력의 선거 패배의 책임을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고 20대들의 낮은 투표율에 귀착시켰던 ‘20대 개새끼론’의 논의는 시대적인 것을 세대적인 것으로 퉁 치는 식의 세대주의 담론이었다. 이 담론은 20대들의 정치적 정체성만을 ‘개새끼’로 주조했을 뿐, 현실 진보정치가 처한 위기의 어떠한 무엇도 해결해내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성공적이지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았던 담론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