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바스크·코르시카, 빛바랜 무장해제

2014-09-30     피에르 포기올리

2014년 6월 24일, 코르시카민족해방전선(FLNC)은 무장해제 절차에 착수하고 점진적으로 지하조직을 탈피하겠다는 독자적 결정을 발표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의 뒤를 이어 FLNC가 무기를 내려놓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서유럽 3대 무장투쟁 활동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렇지만 이후의 정치적 해법은 매우 불확실하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싸워온 이들 3대 무장투쟁단체는 바스크 지방, 브르타뉴,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카탈루냐, 웨일즈 지방, 스코틀랜드 등지의 ‘나라 없는 민족’들이 창설한 다른 지하조직들이 종적을 감춘 후에도 수십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또한 이들은 독일의 적군파(RAF),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프랑스의 악시옹디렉트(‘직접 행동’), 그리스의 11월17일 혁명조직 등 1970~80년대 유럽을 휩쓴 수많은 극좌 무장단체들보다도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IRA와 ETA가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들이 해당 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아무리 탄압을 하고 조직 해체를 결정해도 이들을 뿌리 뽑을 수는 없었다. ‘무기를 선택했다’는 낙인이 찍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소속 사회 집단에서 ‘테러집단’ 취급을 받지 않았다. 공공기관 또는 ‘정치기구’들과 밀접히 연계된 덕분에 일부 폐단과 파행에도 불구하고 항상 요구사항을 관철시켜왔다. 투쟁을 통해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 이들 조직은 정부를 몰아붙여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방안의 협상을 시도했고 간간이 장기간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세 조직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교류도 활발했지만 정치적 계획은 서로 달랐다.(1) 이들이 어떤 역사를 거쳐 왔고 어떻게 지하투쟁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는 각기 다른 맥락에서 조망해야 한다.

소속 사회에서는 테러집단으로 보지 않아

세 조직 가운데 가장 먼저 무장해제를 선언한 IRA는 1905년 탄생한 정당인 신페인의 일부 당원들이 독립전쟁(1919~21)이 한창이던 1919년 창설한 단체이다. IRA는 아일랜드 내전(1922~23) 기간 동안 분열(2)을 겪은 이후로는 북아일랜드를 주무대 삼아 영국의 국익 저해 활동에 집중했다. 1960년대 말에 들어서는 북아일랜드에서 소수를 차지하던 구교도들도 신교도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벌인 평화시위를 영국 공권력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을 계기로 IRA는 무장투쟁에 재돌입했다.

바스크 지방에서는 1895년 7월 바스크민족당(PNV)이 발족했다. 스페인 제2공화국 시기였던 1936년 일명 ‘게르니카 법령’의 채택으로 진정한 ‘권한’을 부여받은 바스크는 거의 독립국가에 준하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코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치법령은 폐지됐고 바스크는 탄압을 피해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1958년 12월 PNV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이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를 창설하면서 프랑코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ETA는 인민연합과 동맹을 맺었다. 1978년 탄생한 정당인 인민연합은 2000년 해산할 때까지 수많은 지역 의원을 배출했다.

1975년 8월 21일, 코르시카지역행동(ARC)의 지도자 에드몽 시메오니와 대원들은 거대 농업 스캔들에 연루됐다가 돌아온 한 대형 포도농장 주인의 창고를 점령했다. 대규모 병력이 진압작전에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헌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ARC는 해체됐고 바스티아에서는 유혈충돌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에 대한 반동으로 1976년 5월 5일 창설된 것이 바로 FLNC이다.(3) 1970년대 초에도 코르시카해방농민전선(FPLC), ‘파올리의 정의’ 등의 지하투쟁조직들이 활동했지만 이들은 코르시카 저항세계의 주변부에 머무는 데에 그쳤고, 중심부는 1967년 에드몽 시메오니와 막스 시메오니 형제가 창설한 ARC가 장악했다. ARC가 해산하자 코르시카애국자협회(APC)와 코르시카민족연합(UPC)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FLNC가 추구하는 무장투쟁은 IRA나 ETA에 비해서는 덜 강경했다. 연쇄 인명살상 테러는 지양했으며 대상이 명확한 단발성 행위로 활동을 국한시켰다. 주로 정부기관이나 코르시카 해안 미관을 해치는 건물 등을 표적으로 삼았다. 사실 프랑코 및 그 후속 정권들과 싸워야 했던 바스크의 ETA나 전쟁을 치른 아일랜드의 IRA와는 FLNC가 처한 상황이 달랐던 셈이다.

평화지지 담론에 밀려 연이어 무장해제 발표

이들 조직이 평화 프로세스에 돌입한 데에는 지역적 상황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한몫을 했다. 미국에서는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막강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미국 외교가는 아일랜드의 비무장화 프로세스를 강화하는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침내 1994년 IRA가 첫 휴전을 선언하면서 대화의 물꼬를 텄고, 1998년 4월 10일 ‘성스러운 금요일’ 협정이 체결됐다. 당시는 아일랜드 남부가 ‘켈트족 호랑이’라고 불리며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하던 때였다. 2005년 7월 28일, IRA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명령했다. 아울러 아일랜드의 통일과 영국 통치의 종식을 위해 민주적 방식으로 싸울 것을 주문했다. 2005년 9월 26일, 무장해제위원회 대표인 캐나다의 존 드 샤스틀레인 장군은 IRA의 무기고가 완전히 해체되었음을 선언했다.

한편 바스크 지방의 ETA는 프랑코 정권 이후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ETA에 대한 탄압은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이루어졌는데(4) 특히 2004년 3월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 사건 이후 강화되었다. 계속된 테러로 민간인들이 희생되고 평화에 우호적인 PNV당 측근들과 기자들까지 살해되면서 ETA의 투쟁은 빛이 바랬다. 진영 내에서도 평화를 지지하는 담론이 득세하자 ETA는 2011년 10월 20일 “무장투쟁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간 수차례 다양한 성격의 휴전을 실시하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명백하고 단호하고 최종적인 다짐”을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2013년 2월 21일, 국제휴전검증위원회는 ETA의 무기를 폐기처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스페인 정부는 이 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4년 7월 20일, 마침내 ETA는 “무장투쟁 수행과 관련된 물자·작전조직의 해체”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핵심 요원들의 잇단 체포로 세력이 약화되기는 FLNC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지하조직들 간 발생한 유혈사태로 약 20명의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고, 혁명세금 징수를 통해 잇속을 챙기는 이들까지 등장하면서 FLNC는 타격을 입었다. 1998년 2월 6일 발생한 코르시카 도지사 클로드 에리냑 살해 사건은 지하조직 전략의 일환으로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무장투쟁의 한계에 대해 고찰하기를 바라는 진영에 힘을 실어주었다. 젊은 층을 위시한 주민들의 지지는 점차 수그러들었고 상황은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바스크, 스페인 정부와 협상 미비

아일랜드의 평화 프로세스는 2006년 10월 13일 세인트앤드루스 평화협정의 체결과 함께 완료되었다. 이후 신페인당은 민주연합당(DUP, 신교)과 함께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장악하고 있다. 신페인당은 최근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아일랜드 남부를 포함한 지역에서 의석 수를 늘렸다. 구교도 인구의 증가추세를 보면서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통일의 꿈이 조만간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바스크 지방에서는 독립주의 좌파가 일방적으로 개시한 프로세스의 결과로 무장해제가 이루어졌다. 스페인 정부 및 프랑스 정부와는 아무런 예비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 사실 스페인 정부 특사들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협상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이를 돌연 중단하고 말았다. ETA는 자신들의 특정 요구사항들이 관철되지 않는 한 해산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스페인과 프랑스 교도소에 분산되어 있는 정치범들을 통합 수용하고, 투병 중인 죄수들과 바스크 난민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식적인 정치무대에서는 대부분 좌파에 속한 독립주의자들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집권 PNV당의 자치주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됐다. 바스크 독립운동단체들은 분파를 막론하고 모두 현재의 자치법령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여기면서 자결권을 요구하고 있다.

코르시카의 경우, FLNC의 무장해제 결정은 민족주의 진영 내부의 토론을 거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또한 1981년 코르시카의 지위에 관한 첫 법령이 제정될 때나 1989년 이른바 ‘족스 법령’(프랑스 내무부 장관 피에르 족스의 이름을 딴 법령)의 입법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던 것과는 달리 실질적인 정치적 협상의 성과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프랑스 본토에 수감된 조직원들의 코르시카 이송이라는 요구가 관철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최근 코르시카 의회에서 실시된 투표 결과들을 보면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코르시카를 프랑스 헌법에 편입시킴으로써 보다 폭넓은 지방분권을 이룩하고, 코르시카어를 프랑스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인정하며, 영주권 지위를 도입함으로써 별장의 난립을 막자(5)는 이들의 주장이 총 51석 중 14석을 차지하는 민족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당파를 초월한 대다수의 의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코르시카 의회에서는 폭력 사용을 거부하는 온건파가 다수파가 되고 있다. 이는 1980~90년대와 대비되는 상황이다. 온건파는 2014년 지방선거를 통해 기반을 한층 공고히 했다. 에드몽 시메오니의 아들인 질 시메오니가 좌·우파 이탈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바스티야 시장에 당선됐다. 장 크리스토프 앙젤리니와 질 시메오니가 연합해 창설한 ‘페뮈아코르시카’(Femu a Corsica: ‘코르시카를 만들자’)는 급진세력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급진파들은 코르시카의 제도적 발전에 있어 중요한 현 시점에 혹시나 뒷전으로 밀려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코르시카의 제도적 발전은 아직 요원하다. 프랑스 정부는 코르시카 의회의 투표 결과를 인정할 태세가 아니다. 지난 6월 12일 코르시카를 방문한 베르나르 카즈뇌브 프랑스 내무부 장관은 상징적 차원의 요구조차 일절 거부했다. 그나마 7월 이곳을 찾은 마릴리즈 르브랑쉬 지방분권장관은 이를 무마시키려는 듯 발언의 수위를 낮추었다.

체념과 패배주의에 빠진 코르시카

두 장관의 발언이 있고 한 달 후 FLNC가 무장투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자 많은 관측자들이 놀랐다. 물론 정치적 폭력이 악순환 고리의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예감하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이러한 결정은 협상의 결과물도 아니며, 프랑스 정부의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어놓을 것 같지도 않다. 수감된 조직원들의 석방 및 추적 중단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코르시카의 상황은 아일랜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일랜드에서는 영국 정치권 전체가 평화 프로세스를 지원하고 당시 수감자들을 석방시키면서 IRA에 무장투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이들에게 맡겼다. 정부로부터 소극적 수준의 대응밖에 얻어내지 못하는 코르시카의 미래는 낙관론자든 냉소주의자든, 아무튼 사람들의 생각보다 어쩌면 더 암울할지도 모른다. 갈 길을 잃은 군인들, 코르시카 문화의 신음소리를 들은 젊은이들은 모호한 정체성 가운데 방황하거나 대규모 범죄의 확산을 조장하는 소외상태에 놓일 우려가 있다.

실제로 코르시카에서는 조직범죄가 확대되면서 이탈리아 마피아와도 구별되고 코르시카에서도 유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마피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범죄의 확산은 집단주의에 물든 코르시카 정치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범죄 단체들의 이합집산은 도외시한 채 민족주의자들만 집중적으로 탄압하는 정부의 전략과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비록 폐해는 있었지만 무장투쟁은 범죄세력을 억제하는 데에 기여했다. 오늘날 코르시카는 체념과 패배주의로 신음하고 있다. 범죄의 재앙이 사회 전반을 파괴하면서 결국 사회·경제·정치적 관계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협박, 압력, 경제활동 억압, 살인이 잇따르고 있다.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글·피에르 포기올리 Pierre Poggioli

코르시카민족해방전선(FLNC) 지도자, 전 코르시카의회 의원(1984~98). 저서로 <코르시카: 신집단주의와 마피아 사이?>(2013) 등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naver.com

 

(1) Laurent Bonelli, ‘무장투쟁의 가파른 길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8월호

(2) 1921년 12월 6일 런던에서 영국과 아일랜드 간 체결된 협정으로 아일랜드가 둘로 나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할을 반대하는 진영과 수용하는 진영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3) Cf. Edmond Simeoni, ‘알레리아의 함정’, Lattes, 1976년

(4) 스페인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은 해방반(反)테러그룹(GAL)은 1983년에서 1987년 사이 27명의 ETA 조직원을 납치, 고문, 살해했다. 마침 이 무렵 프랑스와 스페인은 프랑스에서 체포된 바스크 독립운동원들을 스페인 당국에 인도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5) 코르시카 해안 주택의 절반 이상이 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코르시카에서 부동산을 구입하려면 이곳에서 5년 이상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