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연방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2014-09-30     앙투안 슈바르츠

 

유럽연합의 경제 인플레이션도 독자적인 외교 전망의 부재도 유럽 연방주의자들의 무장을 해제하지 못한다. 반대로 기술관료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그들의 프로젝트가 대중의 찬동을 적게 얻으면 얻을수록, 연방주의자들은 은밀하지만 힘 있게 행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도록 더 노력할 것이다. 수십 년 후, 연방주의자들의 ‘구체적 실행’은 현실이 될까.

마리오 몬티(2011~13년 이탈리아 총리 역임. 전 이탈리아 경제금융장관-편주)가 로마의 판테온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탈리아 의회 내 종신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우리를 정중하게 맞아 주었다. 이 남자는 경제 법칙이란 이름으로 유럽을 지배하는 전문 엘리트이다. 유럽위원, 골드만삭스 고문, 브루에젤 싱크탱크 소장을 차례로 역임하여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몬티는 자국에서도 각료이사회 의장을 맡았었다. 각료이사회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에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2011년 11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기술적 정부’ 역할을 수행했다.

연방주의 유럽 프로젝트, 다시 말해 유럽회원국들을 연방으로 묶는 유럽국가 프로젝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의 질문에 대해 몬티는 “만약 내 입장을 말해야만 한다면, 연방주의를 다시 말해 연방주의 유럽을 북극성으로 삼아, 즉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을 인도해야 할 고결한 기준점으로 삼아 그 프로젝트를 실용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몬티에 따르면 몇몇 정책은 유럽 차원에서 더 잘 다룰 수 있지만, 다른 정책들은 그보다 더 낮은 단계에서 더 잘 작동한다. 그는 유럽집행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경쟁정책을 예로 들었다. 그는 유럽집행위원회의 작동을 분권화하면서도 권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실용적이어야 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몬티는 “만약 선언된 연방주의를 너무 공개적으로 드러내면, 상당수 사람들이 유럽의 미합중국을 연상하게 되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훨씬 더 앞으로 전진하는 데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지지마저 잃을 우려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중한 논조는 정치인의 태도로 합당하다. 또한 그런 톤이 친유럽 지향적인 사람들의 성향에도 일치한다. ‘연방주의자’라는 용어는, 다양한 해석을 불러올 수 있는 주제로, 그 의미가 애매하다. 이 용어는,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7월 중순 유럽집행위원회 의장으로 다시 선출된 장 클로드 융커는 이를 감안한 듯 “유럽의 미합중국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서둘러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켰다.(1)

조심스레 언급되는 ‘연방주의’

브뤼셀에서 지도자들은 이 용어를 절제해서 사용하고 있다. 중도파 유럽의회 의원인 실비 굴라르는 “나는 연방주의를 신성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잘못된 논란들을 회피하고 싶다”면서 “차라리 근본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유럽에서 함께 이루고자 하는 것을 자문해서, 가장 적절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어 굴라르는 “우리는, 민족-국가들의 경쟁심과 한계를 안고서 계속 전진해 갈 것이 아니라, 정부의 차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만약 유럽이 중국이나 인도와 직면하여,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면,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라고 역설했다.

수십 년 전부터 여론 전문가들이 되풀이하여 반복한 말들은 이미 알려져 있다.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 독립당(UKIP), 프랑스의 국민전선(FN) 혹은 이탈리아의 오성운동(M5S) 같은 ‘유럽 혐오주의’ 정당들이 승리했다. 57.42%라는 엄청난 기권 표를 감안할 때, 유럽 연방주의는 상대적인 성공을 거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투표의 결과가 연방주의자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잘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유럽 건설에 대한 애착과 거의 비슷한 비율로 공존하는 반대 입장은 연방주의자들을 놀라게 하지도, 실질적으로 그들을 걱정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전직 이탈리아 외교장관으로 유럽집행위원을 역임한 엠마 보니노는 “유럽 혐오주의자들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 건설에 관심이 없는 초연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바로 유럽 건설에 끌어들여야 한다. 나의 근심거리는 친유럽주의자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는 것이다. 유럽 건설을 옹호해야 하고 심지어 좀 더 통합의 단계를 진전시킬 필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니노는 ‘슈퍼 국가’가 아닌 몇몇 중요 분야(외교, 국방, 연구)를 중심으로 ‘가벼운 연방’을 실현하자고 제안한다. 협정에 의해 약속된 ‘끊임없이 점점 더 밀접해지는 연합’으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머나먼 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연방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의 새 정치질서를 상상했다. 알티에로 스피넬리 같은 투사들은 파시즘의 공포를 경험했으며, 자신들의 활동을 레지스탕스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다. 유배지인 벤토테네 섬에서 1941년 작성된 <자유롭고 통합된 유럽>이란 저명한 성명서의 공동 저자인 알티에로 스피넬리와 에르네스토 로시에게 국가는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와 전쟁에 연관되어 있었다. 스피넬리는 이탈리아에서 ‘유럽연방운동’(MFE)을 창설했으며, 이 단체는 1946년 설립된 ‘유럽 연방주의 연합’(UEF)이라는 초국가적 연합단체에 가입하였다.

연방주의가 유로존 위기를 구원한다는 기대

그러나 연방제도 설립으로 이르게 될 커다란 격변의 열망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흐름에서는, 국가들 사이의 협력 노선(윈스턴 처칠의 통합유럽운동)이나 시장 노선(파울 반 젤란트의 유럽경제협력동맹)을 중시하면서, 대륙의 미래를 그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유럽을 연합하려는 이유가 다양하기 때문에, 국가별로 또한 민족-국가에 대한 각 국가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성공을 이루다보면, 어쩌면 좌파와 우파를 모두 결집시킬 수도 있을 법했다.

냉전이 시작되자 최초의 환멸적인 시기가 다가왔다.(2) 미국의 지원 혜택을 받은 주요 연방주의 기구들은 서구 쪽으로, 다시 말해 기존의 질서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기구들 중의 하나인 ‘유럽 운동’(Mouvement européen)이 다양한 친유럽적 단체들을 관장하기 위해 1948년 창설되었다. 점진적으로 유럽 건설은 ‘총체적 건설’ 노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실질적 연대감을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실행’ 노선을 선택하였다. 이 노선은 1950년 5월 9일 로베르 슈만이 자신의 선언문 속에서 주장한 것으로, 1952년 설립될 유럽석탄철강공동체(CECA)의 서막을 예고했다. 연방주의자들이 지지한 유럽 정치공동체 프로젝트는, 1954년 8월 프랑스 의회에서 거부당한 유럽방위공동체 프로젝트와 더불어, 결과적으로 폐기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장 모네(1888~1979. 프랑스의 경제학자로 유럽공동체 설계의 아버지로 불림-편주)의 견해와 더 가까운 실용적인 노선이 채택되었다. 모네는 유럽의 미합중국 건설에 있어서 민주적 토론보다는 식견 있는 소수의 활동을 더 신뢰했다. 여러 국가의 정치 놀음을 뒤엎을 수 없었던 친유럽계 인사들은 국가와 정부 수반들에 의해 완성된 유럽 통합의 과정에 동참하게 되었다. 대중 동원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여론의 관심을 끄는 작업을 진행했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했다. 유럽연합이 진행되어 나가자, 대립이 완화되면서 동시에 이론적 논란이 잠잠해졌다.

그 후 친유럽 기구들은 특히 초국가적 대중 공간을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유럽기관들이나 여러 국가의 공공부서로부터 재정지원을 주로 받는 이 기구들은 학생들과 같은 일반 대중에게 유럽연합의 활동과 담론을 활기차게 전달했다. 전쟁 후에 설립된 몇몇 그룹들은 지금도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유럽 연방주의 연합(UEF)은 유럽연합 20여 개 국가에 산재한 여러 단체의 회원이 3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유럽 운동’은 여러 국가의 38개 운동단체(그중 프랑스의 ‘유럽 운동’에 2013년 2,800명의 회원이 가입)와 33개의 국제 협회(여기에는 유럽대중당이나 유럽노동자연맹이 포함됨)를 거느리고 있다. 국제적 유럽운동 단체 중 최근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로는 ‘유럽 플러스’(Europe Plus)가 있다. 이 단체는 여러 비정부기구들과 연합하고 있다. ‘유럽 플러스’는 ‘유럽 프로젝트를 재활성화할 목적으로 시민사회에 의해, 시민사회를 위해 창설된 투명하고 포괄적인 대중적 토론 공간’이다. 이 단체는 ‘시민사회와 책임 있는 기관들 사이의 공개적인 대화와 유럽통합에 관한 토론을 재개하고 강화하고자 했다.

스피넬리 그룹(Groupe Spinelli)은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유럽 의원들을 결집시켜 연방주의 전투에 활기를 되찾게 하기 위해 2010년 활동을 개시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 두 명이 6개 언어로 발표한 <유럽이여, 일어나라!>라는 선언문은, 비록 좋은 표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환경주의자 다니엘 콩방디(프랑스 68혁명 주역으로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편주)와 자유주의자 기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가 내세우는 가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유럽은 금융위기가 불러일으킨 불만에 대해 무죄다.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정치지도자들이 연방주의 유럽 건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연방주의 유럽은 유로존(Eurozone)을 구원해줄 것이고, 국제무대에 ‘강력한 유럽’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3)

친유럽주의자와 반유럽주의자의 대립

그러나 꿈의 유럽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선언문 내용을 독자 여러분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사람들은, 유럽집행위원회가 유럽의 강력한 권력이 될 것으로 꿈꾸고, 그 수장이 시민들이나 유럽의회에 의해 직접 선출되어 입헌 의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구대륙의 미래와 ‘지구의 미래’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 국가와 정부 수반들이 자국의 국민들을 ‘후기민족주의 혁명’으로 이끄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가능한 타협은 없다. 우리가 연방주의 유럽, 유럽의 미합중국을 확실히 선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민족주의 악습에 다시 빠지는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한다. 연방주의 아니면 죽음, 둘 중의 하나인 셈이다!

구체적 내용은 없고 대부분 빈 조개껍데기 내용을 주장하는 이 그룹들 또는 유럽통합 지지자들 이상으로 여러 싱크탱크가 유럽통합 토론을 마련하고 있다. 싱크탱크들은, 공공정책 결정자들을 위한 보고서과 ‘정책 지침서들’을 사용하여 되도록이면 영어로 유럽연합의 정책에 대해 토론한다. 여기서 유럽위원회와 기자들에 의해 높게 평가받는 전문가들이 날개를 편다. 브뤼셀에서는 ‘브루에젤’(Bruegel), ‘유럽정책연구센터’(Center For European Policy Studies, CEPS), ‘유럽의 친구들’(Friends of Europe, FOE) 같은 싱크탱크들, 런던이나 파리의 ‘유럽개혁센터’(Center For European Reform), ‘우리 유럽’(Notre Europe) 같은 싱크탱크들은 모두 다 연구원들과 합리적인 방법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정책연구센터’(CEPS)에는 60명의 연구원과 조교가 근무하고, 2013년에 760만 유로의 수입을 올렸다. 반면, 브루에젤은 45명의 연구원이 근무하고 지난해 수입은 390만 유로였다. 자금 조달은 유럽기관들에 프로젝트를 제안하여, 정부 또는 거대 기업들의 기부금으로 이루어진다. 그 외에 영향력 있는 대부(代父)들로부터도 자금조달이 이루어진다. 에티엔 다비니옹 자작은 ‘유럽의 친구들’(FOE)의 소장, 전직 세계은행 총재인 장클로드 트리셰는 ‘브루에젤’의 소장을 각각 맡고 있다.

벨기에의 브뤼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런 기관들에 참여한 투사들, 전문가들 및 정책 담당자들은 자신들의 잠재적 불일치를 넘어서, 유럽건설이 계속 추구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아울러 이 동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 분쟁이나 이웃 국가들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럽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교적 불일치를 해소하기에는 이런 확신이 불충분하다. 그리고 언어, 문화의 장벽을 사라지게 하고, 각국의 세분화된 정치적 삶을 초월하게 하는 데에는 더더욱 불충분하다. 초국가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이런 것들 때문에 좌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브뤼셀은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를 제공하는 것일까? 장 클로드 융커가 최근 유럽집행위원회 의장으로 다시 임명된 사실은 ‘공동 이익’의 달성에 유럽 의회가 어떤 식으로 기여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유로그룹의 전직 회장으로 룩셈부르크의 총리를 역임한 보수파 정치인 융커는 기독교-민주당 유럽의원들(유럽대중당, PPE), 사회-민주당 유럽의원들(사회민주주의 진보동맹, S&D), 자유당 유럽의원들(유럽 민주주의 자유 동맹, ALDE)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왜 유럽연합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가? 이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담합을 비난한다. ‘유럽 운동’이란 단체의 의장인 조 레낭 유럽의회 의원은 짜증 섞인 어조로 “융커의 임명에 있어서 유럽의 거대정당들이 공동전선을 펼친 것은 유럽의회의 힘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융커는 선거운동을 펼쳤고, 결국 그의 그룹인 PPE가 선두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그가 이끌 정책에 대해 앞으로도 우리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유럽의 통합좌파(GUE/NGL)나 프랑스의 좌파전선 인사들도 이런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유로 경제공동체 창설 지지자들

대립은 브뤼셀 민주주의의 작동 규칙이 아니다. 이전의 의회 임기 동안(2009~14년) ‘보트 워치 유럽’(Vote Watch Europe) 사이트에 의해 실시된 투표 분석자료는 3개 주요 그룹의 정책 노선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유럽대중당(PPE)과 사회민주주의 진보동맹(S&D)이 투표수의 거의 70%를 차지했다. ‘우리 유럽’의 소장이며, 이 문제에 대한 연구서의 공동 저자인 이브 베르통시니는 “한 차례로 이뤄지는 비례투표 방식 때문에, 단 하나의 거대 정당이 의석의 다수를 점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좌파 혹은 우파의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4) 결국 거대 정당들은 공동의 입장에 도달하기 위하여 협상을 해야만 한다. 그는 “유럽통합의 정체를 의심하는 조직들을 포함하여 많은 조직이 상당부분의 텍스트 내용에 동의를 표시했지만, 범대서양 거대 시장에 대한 협상과 같은 여러 주제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가 심각했다”고 전했다.(5)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결정기관의 정치적 삶을 지배하는 것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아니라, 친유럽주의자들과 반(反)유럽주의자들 간의 대립이다. 투표 방식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지자의 이데올로기를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문제가 되는데,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이데올로기가 변했기 때문이다. 이 정당들은 점차적으로 시장 경제의 규범들을 받아들이고, 몇몇 국가는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지배할 태세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끌고 있는 ‘거대 연립 내각’을 들 수 있다. 이런 합의는 유럽연합의 본질적인 특성과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시민들은 협정들에 의해 성역화된 자유주의 정책의 틀만 제외하고, 모든 주제에 대해 개입할 수 있다.(6)

유로존의 경제관할권을 강화하는 프로젝트가 차후에 연방주의자들이 열망하는 더 진전된 유럽연합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집행위원회의 감독 아래, 회원 국가들의 경제· 예산정책 조정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럽통합의 반년별 계획’(semestre européen) 같은 여러 가지 조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새로운 문제로부터 단일 통화를 보전하고, 회원국들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시키는 데에 충분치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럽의 ‘신(新)재정 협약’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2012년 3월 2일 서명된 ‘안정, 조정, 거버넌스 협약’(TSCG)은 회원국들이 ‘예산 규율’을 준수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집행위원회는 회원국들이 시행하는 정책들에 대해 권고를 통해 도덕적 압력만을 행사하고 있다.(7)

2014년 7월 회의가 열렸을 때, 유럽중앙은행 총재인 마리오 드라기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예를 들었다. 국제통화기금은 초국가적 권력에 의해 강제된 규율이 국가 수준의 개혁들에 대한 토론 방향을 더 쉽게 이끌어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해당 정부를 도와서 그 개혁들을 자신의 국민들에게 강제하도록 해야 했다.(8) 드라기의 전임자인 장클로드 트리셰는 자신의 임기 끝 무렵에 발표한 강연에서 더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9) 그는 ‘경쟁분야의 정책들과 예산 정책들을 감시’하는 ‘유럽연합의 재무부’ 창설을 암시하면서, 한 국가가 위험스럽게 탈선할 수도 있는 상황, 다시 말해 필요한 개혁들을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을 상상했다.(10) 이런 상황 아래서는 ‘예외적 연방주의’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유로존 집행부에게 부여해 줌으로써, 필요한 경우 ‘집행부 자신이 직접’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11월 유럽지도자들이 당시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와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경질을 결정했을 때, 유럽인들은 이런 ‘예외적 연방주의’를 예감했었다.

일부 사람들은 ‘경제 지배권 강화’에 약간의 민주주의를 가미하려고 시도했다. 글리에니커 그룹이 시도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 그룹을 구성하고 있는 11명의 독일 전문가들(경제학자, 법학자, 정치학자)은 실제적 예산 편성 권한을 부여받은 경제 정부를 갖춘 ‘유로 연합’을 결성할 새로운 협정을 제안했다.(11) 이 그룹의 주도적 활동가인 경제학자 야콥 폰 바이스재커는 “우리는 단일 통화를 보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로존 차원의 행정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조만간 이런 해결책에 도달할 것이다. 이 행정부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유로존 의회도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유로존 의회는 각 국가가 내린 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행정부의 활동에 대해 토의할 것이다. 그러나 유로존 의회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배타적 특권인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개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협정에 대한 아이디어는 <유로의 정책 통합을 위한 선언문>을 발간한 프랑스에서도 환영받았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역사학자 피에르 로장발롱이 이 선언문을 지지했다. 그 후 열두어 명 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에펠 그룹’도 이를 지지했다. 이 그룹에는 굴라르 여사와 최근 올랑드 대통령의 경제·금융자문으로 발탁된 로랑스 본도 포함되어 있다. 에펠 그룹은 바로 ‘유로 경제 공동체’의 창설을 상상하고 있다. 아직은 이런 공동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의 사용에 약간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것’의 최종 목적은 국가들이 포기한 공권력의 특권들을 되살리기 위한 것일까? 그렇게 해석하면 유럽인의 권리와 구대륙 결정자들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몬티는 유럽통합이 공권력의 활동범위를 축소시켰고, 경제정책의 모든 부분들을 지하 감옥에 내던져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가능한 선택의 폭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선택할 것이 더 적다고 당신은 나에게 말한다. 그런데 내 이론은 남아있는 선택들이 진짜 선택들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경쟁적으로 화폐를 평가절하하고,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거나 빚이 늘게 내버려두는 것은, 문제를 뒤로 미루고 분쟁을 회피하는 수단들에 불과하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현재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렇게 제시된 유럽통합은 적어도 하나의 미덕, 즉 오늘날 남의 것에 불과한 합목적성에 대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 미덕을 내포하고 있다.

글·앙투안 슈바르츠 Antoine Schwartz

저서에 <사회주의 유럽은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레종다지르, 파리, 2009)(프랑수아 드노르 공저)가 있다.

번역·고광식

 

(1) <로이터>, 2014년 7월 8일

(2) 베르트랑 베시에르, <연방주의 유럽을 향해 가는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희망과 연방주의 활동>, 피터랑, 브뤼셀, 2006년

(3) 다니엘 콩방디·기 베르호프스타트, <유럽이여, 일어나라! 유럽의 후기민족주의 혁명을 위한 선언>, 악트 쉬드-앙드레 베르사유, 아를르-브뤼셀, 2012년

(4) 이브 베르통시니·티에리 쇼펭, <분열의 양상들, 2014년 5월 유럽의회 선거>, 로베르 슈만 재단-자크 들로 우리 유럽 연구소, 파리-베를린-브뤼셀, 2014년 4월

(5) “강대국들이 세상을 다시 그리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6월호

(6) 베르나르 카상, “유럽의회에서 ‘우두머리’ 작전의 실패”, 투쟁의 기억, 2014년 8월 2일, www.medelu.org

(7) 라울 마르크 제나르, “애매한 협정, 뻔한 결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0월호

(8) 마리오 드라기, “토마소 파도아-스키오파를 기리기 위한 기념 강연”, 런던, 2014년 7월 9일

(9) 앙투안 뒤미니·프랑수아 뤼펭, “유로의 성스러운 성전 조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1월호

(10)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을 건설하고 그 기관들을 설립한다”, 엑스라샤펠, 2011년 6월 2일

(11) <디 자이트(Die Zeit)>, 함부르크, 2013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