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홍콩인들은 시민 불복종에 나섰나

2014-09-30     니앙 시비

 

오랫동안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억하자는 7월 1일의 시위에 올해에는 유례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온갖 계층의 수만 명의 시민들이 보통선거를 지켜내기 위해 비즈니스 핵심구역을 점거한 후에 운집해 있다. 정부는 후보자들을 선별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 선거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다.

2013년 1월 창설된 ‘센트럴 점거운동’(Occupy Central, ‘센트럴’은 홍콩의 금융과 비즈니스 중심가)은 자신들의 땅에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하려는 것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중국 당국의 의지에 직면하여, 홍콩 사람들의 커져가는 좌절감 때문에 생겨났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 홍콩은 런던이 임명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고, 복합 정치조직에 의해 관리되었는데, 그 유산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 정부를 조직하는 홍콩의 행정수반은 5년 임기로 거대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다. 이 선거인단은 사회·직능별 투표자 집단 내에서 선거 때 지명된 1,200명의 선거위원들로, 이들이 선거위원회를 구성하여 행정수반을 선출한다. 행정수반은 법안 거부권을 갖는다. 입법의회(Legco)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사람들과 같은 수의 동업조합 대표들로 구성된다. 사실 입법의회조차 기진맥진해 있다. 2005년에서 2012년 사이 제안된 법안의 거의 42%가 폐기되었다.(1)

홍콩 반환을 예고하는 1984년 영국과 중국의 공동선언은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이 구상한 ‘일국양제(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라는 도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선언은 ‘적어도 50년간 자본주의 경제와 자유주의 정치 프레임’(2)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말은 중국대륙의 ‘사회주의’ 체제가 홍콩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별행정구역(RSA)이 된 홍콩은, 외교와 국방 분야만 중국 당국에 넘기고, 다른 분야들(통화, 관세, 사법체계 등)에서는 고도의 자치성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 시절 덩샤오핑은 중국 당국의 최소 개입을 강조했다.

이런 정신 하에, 기본법은 ‘행정수반과 입법의회를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함으로써 2007년 이후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의 건설’(3)을 계획하고 있었다. 반환협상이 벌어지자마자 함께 모인 민주주의자들 입장에서 볼 때, 이 조치는 2007년 이후부터 완벽한 보통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로 젊은 세대와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집단의 꿈들은, 예전에 덩샤오핑이 권장했던 노선보다 훨씬 더 개입주의적인 중국 당국에 의해 곧바로 깨져버렸다.

2004년 4월부터 홍콩에 자리 잡은 중국대륙의 대표단들 중의 하나인 전국인민대표회의(ANP) 상무위원회가 2007년의 행정수반 선출에서 보통선거를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3년이 지난 후, 2012년의 선거에 대해서도 똑같은 결정이 공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무위원회가 2017년의 행정수반 선출은 ‘보통선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입법의회의 모든 구성원들도 같은 방식으로 선출될 수 있을 것’(4)이라고 결정한다. 그런데 행정수반만이 거기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헌법개혁을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기본법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에 따르면, ANP가 ‘상황에 맞게 그리고 점진적이고 정연한 개발 원칙들과 조화를 이루면서’(5)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보고서를 새로 행정수반에 선출된 렁춘잉이 제출해야 한다. 헌법 수정안은 입법의회에 회부될 것이고, 입법의회가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 수정안을 가결시킬 것이다. 행정적인 절차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를 2016년과 2017년의 선거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개혁 법안이 아무리 늦어도 2014년 말까지 제출되어야 한다.

기본법 45조 이슈로 커진 센트럴점거운동

몇 해 전부터 이 전투를 이끌고 있는 민주주의자들은,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 것을 보고 운동을 조직화했다. 2013년 1월 16일부터 센트럴점거운동은 홍콩대 법대 교수인 베니 타이 유팅의 지휘 아래 꽃피우게 되었다. 그는 “솔직하지 못하고 모순된 수많은 약속이 남발된 것을 지켜본 후에, 20년 혹은 30년을 기다린 후에, 나는 우리가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베이징은 보통선거를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보통선거가 어떤 유형이 될 것인가? 나는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또 진정한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필요성을 개인적으로 느꼈다”고 우리에게 설명했다.

2013년 1월 발간된 신문 논단(6)에서, 베니 타이는 “만약 2014년 여름까지 그 어떤 실제적 진전도 확인되지 않는다면 센트럴을 마비시키기 위한 비폭력 연좌농성에 참여하기 위해 최소 만 명씩의 시민 참여 그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센트럴’은 세계의 가장 커다란 은행들과 기업들이 운집해 있는 도시의 핵심 지역이다. 순간적일지라도 상거래와 사람들의 자유 통행을 마비시키는 것은 베이징의 지배에 대해 도전하는 인상을 줄 것이다. 베니 타이는 자신의 전술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경찰을 도발하고, 그들의 폭력을 도발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의 수가 충분히 많아진다면, 경찰도 더 많은 물리력을 써야 할 것이다. 1960년대 이래로 경찰은 홍콩시민들에게 최루탄과 물대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경찰이 우리들에게 그런 무기들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정부가 얼마만큼 비민주적인지를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센트럴점거운동은 기본법 45조의 해석에 대한 토론이 구체화되는 순간에 규모가 커지지 시작했다. 기본법 45조는 행정수반이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아주 대표성이 큰 지명위원회에 의해 선별된 후에’, 보통선거에서 선출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행정수반은 국가를 사랑하고 홍콩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일국양제’라는 정치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이다”(7)고 베이징은 강조했다. 결국 중국 당국은 후보자를 걸러내는 장치를 설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반체제인사도 선출될 수 없을 것이고, 이런 장치가 중국 대륙에 위협이 되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선거위원회가 입후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별하는 지명위원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5백만 시민들은 중국 지도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선별된 후보자들 중에서 행정수반을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할 것이다. 1997년부터 발간된 백서는 홍콩에 대한 중국의 통제를 강력하게 재확인하고 있다.(8)

시민 불복종 시대를 선도한 홍콩 민주진영

이런 베이징에 맞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동맹’의 깃발 아래 전통적인 세력들이 결집하고 있다. 이 동맹에는 특히 일부의 의원들, 교수들, 사회단체들이 대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전통적인 세력들은 지명위원회가 시민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들은, 다양한 기술을 통해서, 지명위원회가 구성될 때 더 많은 민주주의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명위원회를 없애버리고, 입후보자들의 완전한 자유를 고려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3년 3월 홍콩 중문대 사회학과 교수인 찬 킨만과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시위자들을 끊임없이 도와준 인권운동가 겸 목사인 추유밍이 이 운동에 합류했다. 대학생연합 같은 다수의 청년 단체들도 마찬가지로 여기에 합류했다.

친중국 단체들의 적대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홍콩 권력은 “어떤 ‘불법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기적으로 확언했다. 게다가 센트럴점거운동이 지난 6월 29일 보통선거 수립을 위한 ‘시민 투표’를 시행하기 전에, 베이징이 이를 즉각적으로 불법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백서를 발간한 사실은 의미심장했다. 그런데 투표 주최자들이 놀랄 정도로, 약 80만 명의 시민들이 인터넷이나 설치된 비공식 사무실에서 투표에 참여했다.

그 후 결집된 행동이 지속되고 있다. 50만 명의 시민들이 지난 7월 1일의 연례 행진 행사에서 열을 지어 걸었으며, 이 행사가 끝난 후에 500명 이상의 투사들이 ‘불법 연좌농성’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베이징은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2014년 8월 31일 ANP는 지명위원회의 반 이상의 표를 얻은 후보자들만이 피선거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지명위원회의 구성원을 고려해 볼 때, 어떤 민주주의자도 유권자들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센트럴점거운동의 탄생에서 ANP의 이런 결정이 나기까지, 많은 수의 온건 민주주의자들이, 보통선거에서 민주주의 후보를 낼 가능성을 보존하면서, 베이징과의 협상 공간을 남겨두기 위해 지명위원회의 원칙을 유지하는 제안들을 제시했다. 그것은 헛수고였다.

베니 타이는 이 단계에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후에, 정확한 일정이나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시민 불복종 시대’(9)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소속 대학들의 지원을 받은 학생 조직들이 9월 22일부터 1주일간의 휴업을 계획했고, 고등학교 학생들은 수업거부를 호소했다. 27명의 민주주의 성향 의원들은 이미 베이징이 지지하는 개혁안에 반대하는 투표에 참여했다.

제임스타운 재단(워싱턴)의 연구원인 윌리 오랍 람은 “중국 당국이 자신의 적들을 고립시키면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 성향의 멤버들을 고립시키면서, 경영인들과 다른 사회·경제계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홍콩에서 베이징 정책을 지지하는 홍콩의 대규모 중국 투자자들은 상업적 기회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욕심나는 자리를 얻는 것으로 보상받고 있다”(10)고 지적했다. 1997년에서 2004년까지 위기가 여러 번 닥친 후에도 홍콩은, 비록 성장이 둔화되었을지라도(2010년 7.3%의 성장으로 정점을 기록한 후 2013년 2.9%로 하락하고, 실업률은 2013년 3.2%에 도달), 다시 성장을 시작했다. 베이징은 민주주의적 열망들을 잊게 하기 위하여 경제 통합에 희망을 걸고 있다.

글·나앙 시비 Nahan Siby

기록영화 <니제르, 우라늄 전쟁>(2009)의 감독

번역·고광식

 

(1) 브라이언 퐁, “식민시대 이후 홍콩에서의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의 분리”, <중국전망>, 홍콩, 2014년 1/4분기

(2) 윌리 오랍 람, “홍콩과 특별행정구역의 민주화 전망”, <중국전망>, 2007년 2/4분기

(3) 미카엘 데이비스, “홍콩에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10년간의 노력”, <중국전망>, 2007년 2/4분기

(4) 카리타 칸, “센트럴점거운동과 홍콩의 헌법개혁”, <중국전망>, 2013년 3/4분기

(5) 미카엘 데이비스, 위에서 인용

(6) 베니 타이, “시민 불복종이라는 대량 파괴 무기”(중국어판), <Hongkong Economic Journal>, 2013년 1월 16일

(7) “베이징은 백서에서 홍콩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강조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홍콩, 2014년 6월 10일

(8) “특별행정구역인 홍콩에서의 ‘일국양제’라는 정책의 실천”, <신화사>, 2014년 6월 10일

(9) “센트럴점거운동의 주창자인 베니 타이가 홍콩을 위한 ‘시민불복종 시대’를 선언하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2014년 8월 31일

(10) 윌리 오랍 람, 위에서 인용

 

홍콩의 일반 정보

- 인구: 715만5천 명

- 1인당 국민소득: 29,350유로(약 3,910만원. 참고로 중국은 5,250유로)

- 반환: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이 되었다.

- 정부: 행정수반은 선거위원회에 의해 5년 임기로 선출된다. 행정수반이 정부 혹은 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회는 15명의 ‘공식 위원들’(장관들)과 14명의 ‘비공식 위원들’(고문들)로 구성된다.

- 선거위원회: 1,200명의 위원은 4개의 주요 그룹에서 선출된다. ‘비즈니스 분야’라 불리는 산업·무역·금융 분야, 다양한 직업들이 모여 있는 사회·직능 분야(교육, 건강, 회계, 변호사 등), 사회조직 혹은 종교조직 분야로 노동조합과 다른 활동영역들(농업, 예술 등), 마지막으로 정치 분야(입법위원회, 전국인민대표회의 등)

- 입법위원회: 입법위원회는 7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그중 35명은 5개 선거구에서 비율에 따라 보통선거로 선출되고, 35명은 동업조합에 의해 선출된다.

- 정당: ‘범민주주의’ 진영(2012년 입법위원회에서 27석을 차지함)에는 특히 ‘민주주의 진보동맹’, 민주당, 시민당, 노동당이 합류하고 있다. 친중국 진영에는 자유당, 홍콩노동조합연맹 등이 합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