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민병대 '보그단'의 저항운동

2014-09-30     엘렌 리샤르

지난 8월 18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는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가 연합해서 동부 지역 친러 반군 세력의 거점을 포위해달라고 호소했다. 지난 봄 이후 키예프에서 이뤄진 공격으로 사망자의 숫자는 2천명을 넘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이용하여 지난겨울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반란의 기운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쪽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키예프의 반정부 세력을 러시아에 저항하는 민병대로 전환시키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이해한 방식으로 법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총체적 혼돈 상태가 시작된다.” 150kg의 거구인 이 검사는 공손한 어조였다. 2014년 7월 25일, 우크라이나 서부 중심에 위치한 인구 26만의 중소 도시인 흐멜니츠키 지방검찰청을 짓누르던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군화를 신고 시커먼 작업복 차림을 한 청년 20여 명에게 한 검찰 여직원이 다가가서 검사가 이들의 대표인 이우리 루치우크와 이반 쿠슈니르 건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신고된 합법적 조직”이라고 주장한 쿠슈니르는 “우리는 약속을 준수하고 폭력을 거부한다. 지금이야 당신들이 우리 같은 기업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상황이 지속되면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보게 될 것”이라고 대꾸했다. 민병대를 이끄는 이 두 사업가는 유감을 표명하면서 온화한 태도와 함께 냉랭한 자세를 보였다. 안경을 콧잔등 끝에 간신히 걸친 채로 펑퍼짐한 옷차림을 한 서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묵묵히 기록을 이어갔다.

우선은 이들 주위의 대원들을 대상으로 한 형사 재판을 끝내야 했다. 이어 쿠슈니르는 고자세로 우크라이나 헌법 제5조를 낭독했다. “국민이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었다. 그는 시민이 지방 공공 재정을 운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143조를 참고로 들면서 “지방 공무원들이 시민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두 대표의 시각에서 봤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는 그 중심부터 부패가 만연한 곳이었다. 그러니 이런 정부라면 없어도 그만이었다. 이에 대해 검사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정부의 부정부패에 저항한 ‘무장 혁명’ 민병대

루치우크와 쿠슈니르 등은 대세에 역행하고 있었다. 지난 3월 이후, 우크라이나 국가 기관에 대한 국민의 압박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부패와 2013~14년 겨울에 있었던 시위 탄압으로 신임을 잃은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봄까지만 해도 법치 정부의 건설과 지방 자치권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부 전선’에 교전이 발생하면서 이제는 국경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러시아)에 맞서 자국을 보전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우선과제가 되었다. 아울러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스파이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당국의 불안을 야기하는 모든 시도는 곧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로 여겨졌고, 영토 분리를 추구하는 친러 성향의 민병대와 결탁한 행위로 간주됐다. 이는 루한시크(우크라이나 루한시크 주의 수도로 돈바스 탄전에 위치. 동유럽의 주요 공업도시 가운데 한 곳-편주)나 도네츠크 등지에서 크림 반도의 전례를 만들고자 하는 분리주의 세력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혁명가’라는 수식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 두 사람은 직접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남다른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업 지도부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이제 우크라이나의 부정부패 체제를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프카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여 다리에 부상을 입은 쿠슈니르는 1만 헥타르 규모의 농장을 보유한 농장주다. 루치우크는 건축 회사를 소유한 기업인이다. 루치우크는 “야누코비치 체제(1)에서 부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며 “이전에는 매출액의 2~4% 정도가 뇌물 자금으로 쓰인 반면, 이제는 15%를 갖다 바쳐야 한다. 우리 회사는 2년째 큰 손실을 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가 이 같은 정치 참여 활동을 한 것이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04년에 이미 ‘오렌지 혁명(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여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치르게 한 민주화 혁명)’에도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키예프의 마이단 독립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며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당선에 반기를 들었다. 이어 그는 카자크 문화단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원래의 성격에 맞는 문화적 측면의 활동과 더불어 무기에 대한 남성들의 예찬론을 충족시켜주는 곳이었다. 회원들과 함께 그는 폴란드와 러시아, 오스만 제국 등 과거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러 온 여러 외세에 맞섰던 호전적인 카자크 민족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다시금 고취시켜 왔다.

두 사람은 국민들로 이뤄진 민병대를 이끌어 갔다. 사실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이 보안회사 명목으로 급여를 주고 있는 30여 명의 사람들은 혁명군의 정예부대라기보다는 들러리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2014년 1월 23일 시위가 끝난 이후 이 집단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흐멜니츠키 또한 키예프의 마이단 시위대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마이단에서 첫 사상자들이 발생한 이후 몇 주가 지난 2월 19일, 경찰과의 대치로 시위대 80명, 진압대 20명이 사망한 뒤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운집하면서 국가보안국(SBU)의 특수부대인 ‘알파’가 키예프 현장에 합류하는 것이 무산되었다. 국가보안국 측은 건물 한 곳을 요새로 삼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따라 여자 한 명이 사망하고 여섯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민병대의 압력으로 결국 국가보안국장은 무릎을 꿇고 대중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민병대의 제1사령관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자유당 소속으로, 얼마 안 가 지지자들에게서 멀어졌다. 루치우크는 “그가 자유당을 위해서만 움직였다는 건 사람들도 다 아는 일”이라면서 “그가 우리에게 지지해주는 대가로 이고르 사비 의원에 대한 즉각적인 지지를 요구했다”고 털어 놓았다.

2014년 2월 27일,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 귀속시키기 위한 전초전으로 위장을 한 러시아군이 이곳에 진을 친 이후, 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장기 혁명에 매진하던 사람들마저도 러시아에 맞섰다. 흐멜니츠키에서도 민병대 대원들은 이제 경찰과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루치우크와 쿠슈니르의 진영에서 사람들이 대거 이탈했다.

시위대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루치우크는 아직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5분 만에 우리는 20명을 동원할 수 있고, 반나절 만에 100명을 동원한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천 명, 나아가 그 이상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7월 말의 상황에서 거리에는 시위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동부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앙 광장 기념비에는 마이단에서 목숨을 잃고 하늘의 별이 된 100인의 빛바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서 남녀 두 사람이 작은 천막 아래 모집함을 지키고 있었다. 반쯤 채워진 모집함 안에는 돈바스 민병대에 들어가 분리주의 세력과 싸우려는 사람들의 지원 신청서가 들어 있었다. 지난 7월 23일, 페트로 포로셴코 신임 대통령은 3차 동원령을 공포했다. 한 택시 운전기사는 “위원회가 우리 집을 지나갔는데, 도시 전체에서 천 명을 동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전했다.

2000년에 레오니드 쿠츠마 전 대통령에 의해 해산된 우크라이나 국가방위군은 2014년 3월 13일 재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당국에 반대하던 저항의 기운이 이제는 외부의 적인 러시아와 그 스파이로 추정되는 세력을 겨누게 되었다. 국가방위군은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 지난겨울 이후 조직된 질서유지대의 지원자가 규합된 조직이다. 이 방위군의 역할은 국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국가 전복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 방위군은 전략적 요충지와 건물들을 보호하고, 군대가 장악한 도시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민주화 혁명의 바리케이드가 하나둘씩 사라짐에 따라 방위군 모집소의 인원이 점점 충원되어갔다. 키예프에서는 극소수의 시위대만이 계속해서 독립 광장을 점거하고 있다. 오직 이들만이 신임 정부가 마이단의 희망을 저버릴 경우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있다.

루치우크가 키예프에 살고 있었다면 그도 역시 시위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전쟁은 끝까지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각 도시에서 투쟁하는 애국자들을 도살장으로 내보내는 한 방식”이라고 날선 비난을 퍼부었다.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지난겨울의 저항운동에서 출범된 새 정부 또한 정부 각료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병력이 결집되는 상황을 경계했다. 니콜라이 벨리치코비치 내무부 차관도 이미 “국가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자, 우크라이나 병력의 확충에 기여하려는 자라면 모두 국가방위군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국가방위군은 그 같은 염원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는 ‘아타만치치나(Atamanchtchina)’가 늘 이 나라를 파괴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부에 대항하는 카자크 정신

카자크 기병 대장을 의미하는 단어 ‘아타만(ataman)’은 자주 조직의 가치를 드높이며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데 일조한 카자크 정신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런데 여기에 ‘치치나(chtchina)’라는 접미사가 붙으면 부정적 의미가 더해진다. 하지만 흐멜니츠키에서는 카자크의 상징들이 군사력 동원에 카자크의 색깔을 띤다. 도시의 자원 민병대는 ‘보그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카자크 대장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1648년, 보그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군을 이끌었다. 비록 유태인 박해로 얼룩지긴 했으나 이 반란에서 최초로 카자크족 국가가 탄생했다. 이는 사람들 머릿속에 우크라이나의 독립으로 나아가는 첫발로 기억되었다.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된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초상은 우크라이나의 5그리브나 지폐에 새겨져 있다.

소비에트 연방 또한 영웅들의 신전에서 그의 이름을 빼먹지 않았다. 슬라브 민족의 우애를 내세우면서, 반란으로 탄생한 이 카자크족 국가는 1654년 모스크바 일대 지역과의 동맹에 쐐기를 박는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체결 후 300주년이 된 1954년,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돌려주었다. ‘프로스쿠로프’라는 지명은 ‘흐멜니츠키’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크라이나의 수장으로 있으면서도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모호한 영웅 보그단 흐멜니츠키는 오늘날 다시금 “국가적 위기에 처한 이 상황에서 정부 당국을 계속 공격하는 사람들의 애국심은 의심스럽다”라고 말할 것이다.

국가방위군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데에 주력하면서 서서히 마이단 시위대를 무장해제 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마이단 막사 안에서 자행되는 범죄와 더러운 환경에 대해 개탄하면서 새 정부는 “러시아 세력이 흘러들어간 것 아니냐”는 유언비어까지 부추기고 있었다. 아르센 아바코프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도 7월 13일, TSN 채널에서 “이 나라의 주요 광장에 신원 불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러시아 연방 보안국(FSB)의 기획이자 과거 정권에 속해있던 군소 정당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2014년 8월 7일 점거 세력과 진압대 사이에 격렬한 대치가 있고난 후 바리케이드가 해체되었다. 마지막 바리케이드 진영 앞에서 정부는 방위군을 파견하여 경찰 병력을 충원했다.

하지만 애국심을 이용하여 질서 회복을 꾀하는 게 안심할 일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제도적 기반 및 경제 주축들에 균열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세니 야체누크 우크라이나 총리는 국가의 재정 상황이 ‘반 테러’ 작전의 재정을 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7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장차 무슨 돈으로 직원들 월급을 주고 어떻게 장갑차 연료통을 채울 것이며, 군 재정은 무슨 돈으로 댈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정부는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전쟁특별세 부과에도 모자란 전비

올해 4월 중순에 채택된 경제 구제안에서는 차관 및 증여를 포함해 총 300억 달러의 지원금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럽연합과 세계은행, 미국, 국제통화기금이 힘을 합해 마련해낸 이 구제안은 구조적인 개혁을 조건으로 내걸고, 여러 해에 걸쳐 지원금을 상환하도록 규정한다.(2) 그 대신 국제통화기금에서는 에너지 분야에 대한 보조금 축소를 요구했다. 이 같은 조치는 우크라이나로 들어오는 러시아 가스의 요율 인상과 결합되면서 우크라이나 가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천연가스는 63%, 전기는 11%, 난방비는 40%의 요금 인상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2014년 말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이 6.5%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정부 예산 수정안은 170억 규모의 국제통화기금(IMF) 2차 지원금을 얻어내기 위해 국내총생산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의 절약 조치를 예고하고 있다. 기업은 임금 총액의 1.5%를 전쟁특별세로 납부해야 한다. 총리는 최근 20년간 전례 없는 민영화 계획을 예고하고 있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한 상황이다. 군사비 지출이 급격히 늘어나는 바람에 부담이 커진 새 예산안에서는 공무원들의 임금과 실업 보조금, 장애 연금 등에서 소액으로라도 부족분을 채우게 된다. 지금은 화폐 발행으로 재정 적자를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그리브나 화폐가 현저히 약세를 보이고 은행 시스템이 눈에 띄게 약화될 전망이다.

이미 경제적 측면에서 취약해진 상태의 우크라이나 정부는 공권력에 대한 독점도 위협을 받고 있다. 국가방위군이 모든 저항 세력을 흡수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방위군 측에서는 교관, 무기와 관련하여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015년에 군사 지원하기로 한 약속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올해 5월의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군사 작전은 민병대의 독자적 행동 때문에 혼선을 빚은 듯한 양상이었다. 민병대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지역의 석유업계 큰손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무부 및 국방부에서는 민병대의 활동을 조율하고 이들을 당국의 권한 하에 두어야 하는 입장이다. 대대적인 폭격을 가한 끝에, 막대한 무기를 갖춘 동부의 분리주의 반군은 참호로 밀려나게 되었다.

지난 8월 11일, 우크라이나 군 대변인은 반군 최대 거점인 도네츠크를 해방시키는 최종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동부 전선’에서의 인명 피해 상황은 마이단에서의 집계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유엔에 따르면 올해 4월 중순 ‘반 테러’ 작전 초기와 8월 10일 사이에, 민간인과 군인, 군무원 등을 모두 포함해 2,08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루치우크 또한 간혹 “동부 전선 쪽의 상황을 가능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이라고 했던 그였으나, 자기 진영 사람들과 함께 보그단 전투에 합류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언론인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1)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2013~14 겨울 시위대에 밀려 망명한 뒤, 이어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에 의해 면직되었다.

(2) 쥘리앵 베르쾨이, ‘우크라이나 갈등의 경제적 기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