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이슬람 차별이 테러 부추긴다

2014-09-30     제라르 프뤼니에

 

2014년 6월 15일 저녁, 무장한 50여 명의 남성들은 케냐가 깊은 물속에 커다란 항구를 건설 중인 라무 해안 지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음페케토니를 습격했다.(1) 단순한 원칙에 따라 공격이 행해졌다. 공격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슬람식 이름을 지니지 않은 주민들만을 골라 학살했다. 이 민병대원들은 정부 기동대의 무기력한 반격을 단숨에 격퇴시킨 후, 상점과 은행을 약탈하고 자동차를 파괴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이들은 60여 구가 넘는 시신을 남긴 채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

동이 트자, 이들은 다시 이웃 마을 마포로모코니를 찾아가 15여 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두 마을에서 학살된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케냐 고지대 출신 기독교인 키쿠유(Kikuyu) 부족이었다.

세계 언론들은 서둘러 이번 폭력 사태의 주범을 2013년 9월 케냐 나이로비의 웨스트게이트 쇼핑몰에서 무장 테러를 감행한 적이 있는 이슬람 청년 단체, 하라카트 알샤바브-알이슬라미 조직 산하의 소말리아 테러단이라고 지목했다. 이 같은 보도가 나가자 알샤바브(소말리아 무장 테러단)는 신속히 트위터를 통해 6월 16일 이후 발생한 학살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이들의 테러 동기는 십중팔구 2014년 4월 1일 몸바사에서 케냐 국가 정보원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카부리’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슬람 근본주의 지도자, 셰이크 아부바카르 샤리프 아메드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학살이 일어난 당일인 6월 16일, 케냐 내무부 장관 조셉 올레 렌쿠가 “분열을 막아야 할 케냐의 일부 정치인들이 테러단을 ‘초청’하고 심지어 이들을 ‘후원’까지 했다”고 주장하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케냐의 전 총리이자 야당인 개혁민주연합(CORD)의 당수인 라일라 오딘가는 렌쿠가 자신을 직접 지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튿날 케냐 대통령 우후루 케냐타 또한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학살 사건이 알샤바브의 소행이 아니며, 자신은 ‘증오를 유발시키는 행위나 온갖 부정적인 선동을 궁리하는 정치인들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이런 가운데 렌쿠 내무부 장관이 학살 현장을 찾자, 국민들은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는 간신히 사람들과의 몸싸움을 피해 그곳에 있던 이른바 손코(Sonko, 갑부)(3)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현직 의원이자 부패한 백만장자, 제데온 음부키 키오코의 도움을 받아 겨우 현장을 빠져나와 헬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오딘가 당수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반정부 정치 순회연설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법정 다툼도 이슈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2013년 3월 4일 케냐 대통령에 당선된 우후루 케냐타가 2007년 대선(7) 이후에 발생한 국내 폭력사태, 즉 1,000명 이상이 학살된 사건에 연류되어 국제사법재판소로부터 기소돼 법정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외국인들이 불안한 치안 때문에 케냐를 떠나고 있다. 호텔 예약률 추락과 관광 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여행상품 취소로 인해 케냐 외환수입의 3위를 차지하는 관광 산업(국내총생산의 약 13% 차지)이 위협받고 있다. 그러자 강력한 케냐민간분야연맹(KEPSA)이 언론을 통해 평화를 호소하고 나섰다. 이 연맹은 또한 오딘가 당수에게, 난투극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큰 일부 정치 모임을 취소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갈등 시작

관광천국 케냐에 내전이 일어났다. 2014년 초반부터, 사람들은 케냐의 해안마을에서 수십 구의 시신과 100여 명의 부상자들을 목격했다. 이런 사태들은 국제 이슬람 테러단의 소행일까 아니면 케냐를 도탄에 빠트리려는 현지에 뿌리를 둔 반정부 단체의 소행일까? 이들은 왜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 해안마을 주민들과 고원지대 주민들 간, 기득권과 소외층 간 대혼란을 야기하는 일련의 폭력사태를 조장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세계 1차 대전 발발 이전에 주도했던 토지수용 캠페인을 살펴봐야 한다. 영국은 케냐를 식민지화한 이후 케냐를 백인들의 국가로 만들려 했다. 영국인들은 마사이 부족을 비롯한 칼레진 부족과 키쿠유 부족으로부터 광활한 땅을 빼앗았다. 1950년대 중반, 키쿠유 부족은 마우마우(Mau Mau) 봉기라 일컫는 케냐 독립투쟁을 일으켰다. 1963년 케냐가 독립한 이후, 반식민주의 투사 조모 케냐타가 초대 총리에 이어 이듬해엔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키쿠유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로부터 가장 심각한 억압을 받던 게릴라들(키쿠유 부족)과 거리감을 두었던 인물이다.(5)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모 케냐타는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당시 영국이 자금을 출자하고 주도한 키쿠유 토지개혁 프로그램에 찬성했다. 케냐타는 다른 부족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30만 헥타르에 달하는 알짜배기 농지를 자신의 부족에게 분배했다. 케냐 전체 국민의 23%밖에 되지 않는 키쿠유 부족은 광활한 농지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케냐타가 이끄는 정당,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ANU) 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인물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특권층이라 생각한다.(6)

이 같은 부족사회의 지배는 중앙 고원지대에 한정되지 않고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해안지대의 관광산업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키쿠유 부족과 동맹군들이 날로 번영하였다. 이들과 사촌지간인 엠부와 메루 부족은 정치와 경제 부문의 강력한 압력 단체로 거듭났다. 농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건설과 관광 분야에 조달되었다. 1970년대, 이 부족들(키쿠유, 엠부, 메루)은 스와힐리인들에게 해안마을의 토지를 강탈했다. 스와힐리인들은 가족과 가문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토지에 대한 어떤 부동산 소유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78년 케냐타가 사망하자, 키쿠유 부족들은 케냐 경제와 행정기관들을 거의 모두 장악했다.

이후 이들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케냐타의 뒤를 이어 칼레진 부족 출신 부통령 다니엘 아랍 모이가 대통령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의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키쿠유 부족은 모이 정부 초기 소심한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의 긴 통치기간 동안(1978~2002년) 오히려 소수부족의 연합으로 인해 자신들이 소외되고 말았다. 모이가 숙련된 정치꾼의 자질을 선보인 셈이다.

어쨌든 세력이 너무 막강해 숙청에서 살아남은 키쿠유 세력은 2002년 복수 정당제가 도입되자 재기를 노렸다. KANU의 일당 독재체제의 종말로 인해 유권층이 다수의 부족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부족수도 많고, 단합도 잘 되고, 부유한 키쿠유 부족에게 절대 유리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2002년 대선에서 키쿠유 부족 출신 음와이 키바키가 62%의 득표율로 모이 후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대선은 비록 민주주의의 승리로 칭송받긴 했지만 어두운 면도 있었다. 물론 일당 독재의 종식, 평화 속에서 치러진 대선, 국민 통합을 기치로 내세운 키바키의 대통령의 당선 등은 지난 4세기 동안에 걸친 독재와 대조를 이루었다. 루오 부족의 영향력 있는 인사 오딘가도 키바키의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 대통령의 임기도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키바키 대통령은 모이 정부 치하에서의 부정부패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회복 프로젝트를 세워야 했다.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는 케인스식 경제정책(경기부양을 위한 재정확대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성과도 좋았다. 경제 성장률은 2002년 1.6%에서 2007년 5.5%로 상승했다.

 

불평등한 경제에 대한 불만 세력과 이슬람 조직이 결합

그러나 이 같은 경제수치는 케냐의 단편적인 면만 보여준다. 번영의 혜택이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 키쿠유 부족이 단물을 다 빼먹고 있다. 선거에서 승리한 케냐 정치인들은 1815년 절대왕정을 다시 복귀시킨 프랑스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배운 게 없고, 아무것도 잊은 게 없었다(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부 소수민족이 자신들을 습격했을 때, 이들에게 굽실거렸던 엘리트 키쿠유 부족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 이제 다른 두 거대 부족, 루히아 부족과 루오 부족이 이들을 위협하고 있다.(7)

번영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소수부족들은 ‘민주주의’가 독재를 확 바꾸진 못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안마을에 거주하는 스와힐리인들은 눈앞에서 전개되는 ‘경제발전’의 효과를 빤히 보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이에 대한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소한 도시 범죄의 급격한 증가, 키쿠유 부족이 창설한 무느기키(Mungiki), 즉 신(新)전통주의 종파의 기아급수적인 성장과 함께 가장 소외된 분파 소속의 주민들 내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심화 등과 같은 새로운 기능 장애들이 발생하고 있다.(8) 이와 동시에 케냐 서부 엘곤산 기슭과 키시이(kisii) 지역의 부족을 비롯한 소수 부족들 사이에서 분쟁이 잦아지며 이들 민병대들은 서로 즉흥적인 전투도 불사하고 있다. 이들은 빈약한 무기(활과 화살, 벌채용 칼)로 무장한 채 백인들이 강탈해 키쿠유 부족에게 증여한 자신들 조상의 땅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서로 싸우고 있다.

2002년에 들어선 민주주의는 지난 75년 동안의 불공정 행위를 극복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지 못한 측은 실망감을 삭히고 난 후 서로 상대방을 탓하며 충돌했다. 2007년 케냐 대선 직후 발생한 폭동이 이를 반증한다. 당시 내전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의 능숙한 언론플레이와 ‘계층 간 협조’, 즉 백인, 인도인,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아프리카 부르주아들이 서로 협조한 공이 컸다.

해안마을 주민들은 서로 간 문화적인 동질감(무슬림, 상인, 스와힐리어)은 느끼지만 역사적으론 서로 구분되며, 기독교 신자들인 내륙 지방의 부족들에게 토지를 수탈당한 희생자들이다. 모이 대통령 집권 당시, 해안마을 주민들은 정치투쟁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급진 이슬람 세력이 기승을 부리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1년, 인접국가인 소말리아에서 시아드 바레의 군부 독재가 붕괴되며 상황이 급변했다. 1992년, 케냐 해안마을에 첫 무슬림 단체가 등장한 이후 스와힐리인 종교 지도자 셰이크 칼리드 발랄라가 이끄는 케냐 이슬람 정당(IPK)이 창당되었다. IPK는 급진 이슬람과 케냐 독립 이후에 창당되었다가 KANU에 흡수 통합된 연방정당, 케냐 아프리카 민주 연합(KADU)의 부활을 꿈꾸며 출범한 정당이다. IPK는 내륙 부족들의 ‘침략’과 이들의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이슬람을 지역문화의 상징처럼 활용했다.

비록 모이 대통령과 IPK가 서로 반목하긴 했지만, 테러문제가 실제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8년에 발생한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에 대한 테러 공격이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소말리아 이슬람 부족 연합으로부터 현지에서 물류지원을 받던 신생 알카에다의 소행이었다.(9) 알샤바브가 소말리아에서 과격하게 진화하는 동안 해안마을 주민들은 몸바사 공화당위원회(MRC)를 창설해 종교와 무관한 요구들을 했다.

 

해안마을 독립세력과 소말리아 테러단체의 결합이 뇌관 역할

MRC는 무슬림 테러 조직과는 무관했다. MRC의 많은 구성원들은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사회, 정치, 경제부문에서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호소했다. 해안마을 사람들은 단지 38%만이 자신들이 소유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내륙 사람들은 62%가 소유권을 소지하고 있다. 해안마을의 빈곤지수는 케냐 다른 지역의 빈곤지수보다 13%나 더 높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런 문제가 해안마을을 주로 소말리아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북동부 지역에 이어 케냐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MRC는 “해안마을은 케냐가 아니다”란 슬로건과 함께 케냐 해안마을의 독립을 요구했다. MRC 정책 절반의 실패는 지지층의 과격화로 이어졌고, 이 지지층은 MRC를 이탈해 알샤바브의 현지 지부인 알히즈라(Al-Hijrah)를 출범시켰다. 예컨대 알히즈라는 정치세력과 테러단 간의 첫 합병 사례인 셈이다. 또한 2013년 웨스트게이트의 테러사건은 알히즈라가 일부 지원한 것이었다. 웨스트게이트의 쇼핑몰 학살사건은 케냐를 큰 혼란에 빠트렸다. 케냐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이른바 우살라마 감시 작전(Operation Usalama Watch)이란 ‘보안’ 작전을 수행하며 군·경에게 나이로비의 소말리아인 지역인 이스트레이의 약탈을 허락했다. 작전에 투입된 군·경은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현금(소말리아인들은 은행을 싫어해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님)을 훔치고 모든 연령의 여성을 강간했다. 이 작전을 총지휘한 내무부 장관 렌쿠는 심지어 많은 소말리아계 케냐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난민 신세로 전락한 이들은 국경 근처에 있는 난민 수용소로 이관되었다. 충격에 빠진 케냐의 소말리아 공동체는 이전엔 멀리하던 알샤바브 쪽으로 눈을 돌렸다. MRC의 일부 당원들은 소말리아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보다 앞서 이미 알히즈라에 입당한 몇몇 친척들과 뜻밖의 만남도 가졌다. 이들은 서로 공조하기로 했다. 우살라마 감시 작전은 몇 주 만에 현재까지 비폭력적이던 해안마을의 일부 분리 독립 세력과 소말리아 급진세력의 기수들 간의 공조를 한층 공고히 한 셈이 되고 말았다.

해안 마을 음페케토니가 테러 대상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은 이 마을이 1965년 이후에 형성된 고원지대 출신 이주민들의 정착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와첸지(wachenzi, 내륙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들의 마을인 셈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주노동자들이 라무항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 마을에 몰려들면서 해안마을 주민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MRC의 한 늙은 투사는 “우리에겐 다른 방도가 없다. 우리 같은 스와힐리인은 상인이지 군인이 아니다. 만약 소말리아인들이 이 마을에 와서 우리 대신 와첸지들을 죽이겠다면 우리는 소말리아인들의 행동에 동의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도울 것이다”라고 했다.(11)

예컨대 해안마을에서 발생하는 폭력사태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해안마을의 테러는 단지 알샤바브의 소행만도 아니고, 또한 케냐 야당이 꾀한 국가 전복 계획의 산물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야당과 마찬가지로 케냐타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내에도 고원지대 출신 부족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테러단은 해안마을에 거주하는 와첸지(키쿠유 부족)들만 증오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지난 7월 21일 몸바사 테러 당시 4명을 학살한 이후 정부가 아닌 야당의 당수 오딘가가 속한 루오 부족을 규탄하는 전단을 살포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해안마을에 거주하는 루오 부족도 키쿠유 부족과 마찬가지로 내륙 출신에 기독인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정부로부터 정책지원을 받지 못해 키쿠유 부족과 같은 해안 이주 혜택을 누리진 못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종교로 인해 해안마을 사람들(무슬림)과 내륙 사람들(기독교인)로 양분 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화·경제적 충돌을 구경하고 있는 셈이다.(12) 만약 소말리아 테러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케냐를 강타하는 분열을 숨기기 위한 것일 것이다.

 

글·제라르 프뤼니에 Gérard Prunier

이집트 아디스아바바의 프랑스 이집트 연구소 소장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1) Tristan Coloma, ‘항구가 케냐를 구하길 기다리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4월호

(2) ‘케냐를 불편하게 하는 소말리아 테러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1월호

(3) 손코(Sonko, 케냐에서 갑부를 일컫는 말)는 마약과 부동산 투기로 옥살이를 한 이력이 있다. 그는 출옥 후 2010년 총선 때 나이로비 마카타라구(區)에서 여당 후보로 출마에 당선되었다.

(4) Francesca Maria Benvenuto, ‘기소에 들어간 국제 형사 재판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1월호

(5) Cf. Robert Buijtenhuijs, <마우마우 운동>, Mouton, La Haye, 1971년

(6) Cf. Christopher Leo, <Land and Class in Kenya>, Presses de l’université de Toronto, 1984년

(7) 케냐엔 42개의 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3개 부족(키쿠유, 루오, 루이하)이 국민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8) Jean-Christophe Servant, ‘케냐의 심각한 정치 충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2월호

(9) 소말리아에는 오래전부터 이슬람 근본주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하라카트 알샤바브-알이슬라미로 불리는 이슬람 부족 연합이 창설된 2004~2005년부터다. ‘소말리아의 위험한 관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9월호

(10) 케냐의 1인당 연간 평균 소득(890달러)에 비하면 빈곤 지수(450달러)는 매우 낮다.

(11) 2014년 6월 17일 몸바사에서 한 인터뷰

(12) 손코가 개입해 구타당할 뻔했던 내무부 장관 렌쿠를 구했다. 비록 이들 둘 다 기독교인들이지만, 주민들이 ‘악당’ 손코에게 관대하게 군 것은 부당하게 체포된 해안마을 주민들을 석방시켜 준 적도 있고, 일자리가 없는 젊은 무슬림들을 돕기 위해 자금 지원을 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손코나 장관은 키쿠유 부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