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염불이 된 '도빌 파트너십'

2014-09-30     이브라힘 와드

이번 10월 26일 새로운 총선을 치를 튀니지인들은 “아랍의 봄”에 기대를 하고 있다. 리비아의 혼란과 시리아의 전쟁 와중에 이집트의 새 독재 정국 속에서, 아랍 국민들은 자신들이 포기한 권리와 서방의 위선을 헤아려보고 있다. 2011년, 프랑스 해변 도시 도빌 한복판에서 굳게 약속했던 국제 경제원조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도빌 파트너십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3년 전, G8 회원국(미국, 러시아,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은 2011년 5월 26~27일 도빌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당시 이들은 “아랍의 봄 때문에 혼란에 빠진 국가들을 돕겠다”며 전례 없는 규모의 경제원조 계획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G8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시민들이 장악한 아랍 국가들을 법치국가로 바로 세우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 젊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번영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도빌 파트너십이 아랍 국가들과 G8 간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아랍 혁명 발발 이후, 첫 정상회담을 개최한 G8은 ‘역사적인 변화’의 성공을 우선 과제로 삼아 대담한 조처들을 약속했다. 이들은 또 800억 달러에 달하는 전례 없는 규모의 ‘금전 보따리’를 풀고(1) 인상적인 금융 및 정치 시스템을 도입해 도빌 파트너십에 동참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모로코, 요르단 등과 같은 아랍 국가들의 “민주화”의 성공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을 축으로 한 10여 개의 국제기구와 개발은행들이 도빌 파트너십에 대한 관리감독을 맡기로 했다.(2) 아울러 터키, 쿠웨이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과 같은 이웃 국가들도 ‘지역 파트너십’을 통해 도빌 파트너십을 돕기로 했다. 요컨대, 막대한 자금 동원과 독특한 관리감독 시스템을 국제사회가 아랍세계의 민주화에 애착을 보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G8은 공동성명을 통해 “민주주의는 평화, 안정, 번영, 동반 성장과 발전을 향해 가는 최선의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구조적인 문제점 드러난 도빌 파트너십

공동성명이 표면적으론 만장일치였지만 그 이면에는 성명 서명자들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거대한 술책과 소소한 속셈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과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는 G8의 다른 대통령들보다 한발 앞서 대책을 강구하려고 애썼다. 사르코지는 아랍혁명 초기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이 도피하기 3일 전, 프랑스 외무부 장관 미셸 알리오 마리를 튀니지에 보내 튀니지 측에 ‘프랑스 기동대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 장본인이다. 당시 프랑스 외무부 장관은 프랑스의 많은 정치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튀니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3)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G8 특사를 임명할 당시, 전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그 자리에 천거했다. 그가 만약 부패한 퇴물 정치 엘리트들의 근절을 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면 이보다는 나은 선택을 했어야 했다. 82세의 전 프랑스 총리는 개혁성향이 두드러지거나 아랍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지닌 인물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특히 무기판매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불거진 비밀자금 사건과 뇌물수수 사건을 떠올렸다.

곧, 도빌 파트너십의 구조적인 취약점이 드러났다. IMF가 “전환기”라고 분류한 6개국의 정세는 복잡했다. 성공한 봉기의 현장인 튀니지와 이집트에선 민주적인 총선이 이뤄졌지만 그 밖의 국가 정세는 어두웠다. 특히 외국 군대가 혁명에 개입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비아와 예멘에서는 독재자 축출이 내전으로 번졌다. 한편 요르단과 모로코의 변화는 상대적이었다. 이들은 도빌 파트너십이 가져다 줄 혜택을 염두에 둔 채 ‘중용’을 선택했다. 예컨대 이들은 (혁명보다는) 중용이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혁명의 고통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G8의 최우선 과제와 아랍의 봄을 주도한 국가들의 목표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석유문제를 비롯한 전략적인 문제와 이민 문제, 테러 위협과 무역 수지 같은 현안에 있어서는 선진 민주주의(G8)가 거의 힘이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자국의 금융기관에 구제 금융을 투입하느라 빚더미에 앉은 부유국들은 푸짐한 자신들의 약속을 지킬 처지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바레인이 사우디 군대의 도움을 받아 시위대를 진압하고, 예멘을 비롯한 리비아와 시리아에선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충돌로 정세가 급변했다. G8가 아랍 혁명 초기에 느끼던 행복감은 피로와 근심으로 변했다. G8은 어제까지만 해도 쓸 만한 동맹국들이었던 붕괴된 아랍 독재국가들이 차라리 그리웠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민주주의가 결여된 일부 국가들이 낫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곧이어 G8은 대놓고 ‘불공정한 차별’ 정책을 펼친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2012년의 정세를 “바레인은 시리아가 아니다!”(4)란 짤막한 말로 요약한 것이 이 같은 차별정책을 방증한다.

한편 6개국의 변혁을 안정화하기 위해 결성된 “지역 파트너십”도 아랍을 강타한 내분에 휘말렸다. 이들은 정교분리 체제에 반대하는 이슬람 동맹을 지지하기보다는 “문명의 충돌”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때론 정권 투쟁과 파벌 투쟁에, 때론 민주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야망 때문에 불거지는 갈등전선에 뛰어 들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이웃 국가의 분쟁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터키나 카타르 등도 공개적으로 특정 국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예컨대 (아랍혁명이 일어난 국가들에)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하던 지역 파트너십이 이들 국가의 내분을 잠재우는 소방관 역할을 한 게 아니라 불을 지피는 방화범 역할을 한 셈이다. 이 모든 것이 국가 간 타협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천연자원이 거의 없어 지역 파트너십의 관심을 끌지 못한 튀니지만이 어려움은 있었지만 유일하게 정치적 타협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게 우연일까?

이와 달리 이집트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인구학적으로도 중요해, 모든 분쟁의 무대가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의 친분 관계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과 반목했고, 반면에 카타르와 터키는 이들을 지지했다. 모하메드 모르시는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이집트 최초의 시민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 1년 만에 해임되었다. 그리고 2013년 7월 3일, 이집트 국방부 장관 아브델 파타흐 알시스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무슬림형제단을 “테러 조직”으로 공식 선포한 뒤, 이들을 정권에서 축출하고 본인이 권좌에 올랐다.

세계 2차 대전으로 황폐화된 유럽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미국이 계획한 바 있는 경제 및 기술 지원 프로그램, 이른바 ‘마셜 플랜’을 이집트에 도입해야 할 판이다. 미국은 4년 동안(1948~52) 유럽 재건에 130억 달러(2014년 기준으로 900억 유로, 대략 138조 9천600억 원-역주)를 쏟아 부어, 유럽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민주정치의 안정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도빌 파트너십과는 지원 규모에 차이가 있다. 이 프로그램을 제창한 미 국무 장관 조지 마셜은 유럽 국가들이 서로 회동해 스스로 재건계획을 세우면, 미국은 금융지원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경제원조 계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교조주의는 배제되었지만, 현재는 교조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프랑스는 당시 마셜 플랜으로부터 할당받은 기금의 42% 정도를 프랑스 전력(EDF), 프랑스 석탄 공사, 프랑스 철도공사(SNCF) 등, 프랑스 국영 기업 3곳의 구제 금융으로 썼다.(5)

‘마셜 플랜’과 거리가 먼 ‘워싱턴 합의’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냉전 종식 이후, 해외 차관은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워싱턴 합의(consensus de Washington)”로 알려진 신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한 교리가 -별 효과가 없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조적인 고백에도 불구하고- 개발원조(해외 차관 도입)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다.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이 워싱턴 합의가 신뢰할 수 있는 모든 경제학자(6)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며, 또한 IMF를 비롯한 세계은행과 미 재무부가 끊임없이 설파한 10가지 원칙을 요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7) 하지만 지원 기금을 할당 받으려면 IMF가 제시하는 원칙을 지켜야 했다. 첫째는 특정 ‘개혁’을 실시하겠다는 조건을 지켜야 하고, 둘째는 재정지원을 하는 국가들로부터 생산재와 서비스를 구매하겠다는 조건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워싱턴 합의는 마셜 플랜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전자는 원조 수혜국이 원조 공여국에 휘둘리는 데 반해, 후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선거를 통해 당선된 원조 수혜국의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이다.(8)

미국의 경제권을 쥔 미 의원들은 재정원조 프로그램이 공적 자금을 낭비한다며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데 반해, 원조 수혜국은 원조 규모가 작고 원조 공여국이 내정 간섭을 한다고 볼멘소리를 낸다. 그러나 끊임없는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재정원조 프로그램은 계속 확대되었다. 원조 공여국에도 재정원조 프로그램은 도외시할 수 없는 해외정책이지만 원조 수혜국에는 이 프로그램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사메르 솔리만은 무바라크가 몰락하기 직전 “해외 차관 도입 문제는 이집트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가차 없었던 이집트 정부의 주된 강박 중 하나였다. 차관으로 인해 이집트의 평판이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란 주장을 했다.(9) 요컨대 원조 수혜국과 원조 공여국이 구축하고, 기생충 같은 관료들이 지지하고, 보편적인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가 합법화한 이 재정원조 프로그램이 원조 수혜국의 개혁시도를 철저히 가로 막고 있는 셈이다.

IMF가 이 같은 시스템 속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전 수석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는 “IMF 결정은 이데올로기와 나쁜 경제 이론의 이상한 혼합물이다. IMF의 교리는 사익을 추구한다고 보면 된다. 경제위기 때마다, IMF는 국민에게 미칠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시대에 뒤떨어진 부절적한 처방을 내리곤 했다. 난 IMF가 빈곤에 끼칠 영향 평가서를 작성하거나, 대안정책과 연관된 심도 있는 토론이나 분석을 했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도 없다. IMF는 항상 ‘IMF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라’는 똑같은 처방만 내놓았다. (구제 금융을 받는) 국가들은 IMF의 명령을 수락해야 했다. 이런 습관에 난 질렸다. 뿐만 아니라 IMF의 정책은 성과도 좋지 않았고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한편 구제 금융을 받기로 한 국가들은 약속한 재정 지원을 할당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 공개적으로 IMF와 반목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10)

하지만 아랍 봉기는 개발원조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줬다. 봉기 초기 몇 달 동안,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개발원조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과 함께 순수한 개발원조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한편 경제학자이자 뉴욕대학의 교수인 윌리엄 이스털리는 사방에 퍼져있는 공상가들, 즉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와 같은 ‘경제기획전문가’와 자신과 같은 ‘경제실천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후자는 (고용한) 외국 전문 기술자들이 (현지의) 종신 엘리트 정치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해 낸 거창한 고비용 프로젝트보다는, 경제 원조를 원하는 국가들이 경쟁을 거쳐 선발한 자국의 가치와 전통을 고려한 지역 프로젝트를 우선하는 자들이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하버드대의 제임스 로빈슨은 공동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12)에서 “왜 일부 국가는 성공하는데 다른 국가는 실패할까?”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정치 및 경제 기관들이 전 국민의 손에 있는 국가들은 번영하고, 반대로 기관들이 국민을 볼모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몇몇 독재자 손에 있는 국가들은 실패한다”고 했다.

“아랍의 봄”이 휩쓸고 지나간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도 이슬람 주의자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도빌 파트너십은 현지의 전통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소외되었던 국민들까지 고려하는 정책, 즉 전 국민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칠 수도 있었다. 만약 도빌 파트너십이 이미 다른 곳에서 그 효과를 증명한 바 있는 이슬람 채권 수쿠크(Sukuk)와 이슬람 보험 타카풀(Takaful) 등과 같은 소액금융 지원 프로젝트를 아랍의 봄이 강타한 국가에서 시도했다면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훼손하지 않고도 이들 국가의 정세를 변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13) 하지만 국제기구들은 아랍 혁명 초기에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쓰는 수법이 아닌 모든 것을 무시했다. 반혁명 세력이 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아프리카 개발은행과 세계은행 등과 같은 일부 국제기관들은 현지 전통을 좀 더 존중하는 방법을 썼다.(14)

예를 들면 “국제사회”는 도빌 파트너십에 기댄 채 대외 부채를 감소시킬 수 있는 부문에 대한 과감한 손질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다. (아랍의 봄 이후 들어선) 아랍의 새 정권들은 이전 정권의 무거운 부채를 상속받았다. 게다가 이 국가들의 공공서비스는 국가에 큰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새 정권들은 세계 금융계나 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 감히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부채를 전면 혹은 일부라도 탕감해 달라고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채 중 상당 부문은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전 장관이자 프랑스 파리의 한 대학에서 법학 교수로 있었던 알렉산더 나훔 색이 1927년 공론화한 ‘저질스러운’ 부채, 즉 불법행위로 인해 생긴 것들이다. 나훔 색은 “독재 정권이 독재체제를 위해 그리고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는 국민들을 억압하기 위해 끌어다 쓴 빚이라면, 이는 자국 국민한테는 저질스러운 빚이다. 따라서 국가가 빚을 책임질 의무가 없다. 이 말은 정부가 끌어다 쓴 빚은 정부가 단독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독재 정권이 몰락하면 빚도 소멸된다”고 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개발경제학자인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는 채권자들이 본인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것은 이른바 “3I”, 즉 이데올로기(Idéologie), 무지(Ignorance), 타성(Inertie) 때문이며, 이로 인해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15)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현실(3I)의 산물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개혁을 원하는 국가들의 특정상황(역사, 문화, 사회, 종교)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이들에게 부적합한 (신자유주의의) 전통 교리를 도입시키려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관료주의의 중압감와 출세지상주의 그리고 또 다른 타성들이 개혁을 방해하는 요인들이다.

당시 봉기를 일으켰던 아랍 국민들은 해외 원조의 전문가들, 특히 도미니크 스트라우스 칸이 이끌던 IMF의 입장과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2011년 봄 도빌 파트너십이 체결되기 며칠 전, 튀니지의 경제학계는 “튀니지의 민주화를 지지하기 위한 경제계획”을 제안했다.(16)

이집트에 약속했던 지원을 외면한 IMF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종종 J곡선효과(J curve effect, 환율이 상승하는 초기에는 오히려 경상수지가 악화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경상수지가 개선되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튀니지 경제학자들은 민주화 초기에 닥칠 경상수지 악화를 피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튀니지가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책임지고 막아줘야 한다. 즉, 빈곤과 실업률 증가는 포퓰리즘 증가와 극단주의를 부르게 된다. 또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고립주의와 빈곤 그리고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이들은 “첫째, 식량 및 에너지 보조금을 즉각 지급하고 대학 졸업 실업자들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줄 것. 둘째, 튀니지 개발(교통·통신확충)에 투자하기 위해 5~10년에 걸쳐 200~300억 달러 규모의 G8 계획을 세울 것” 등, 두 가지 최우선 과제도 발표했다.

한편, IMF는 G8에 정책을 바꾸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IMF는 ‘안정성’을 보장하는 경제정책, 즉 “전 국민을 대상자로 확대하는 포괄적인 사회보장 제도 도입”과 “효율적이고 투명한 경제기관 설립” 등과 같은 긴급 처방을 내렸다. 왜냐하면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IMF가 아랍 국가들의 경제사정에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랍의 봄을 겪은 국가들의) 점진적인 변화가 실업률 하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게 뻔했다. (실업률을 하락시키려면) 민간 부문에 호의적인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놀라운 경제성장 리듬이 필요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17) 예컨대 IMF 직원들이 취한 조처들은 또 다른 구조조정,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야심찬 구조조정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환기를 맞은 국가의 지도자는 누구한테 자신의 문제를 털어 놓을까?’란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아랍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처럼 해외 출자자들에게? 아니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유권자들에게? 아랍 혁명 이전에, IMF와 세계은행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의 체제를 눈부신 성공가도를 달리는 체제처럼 보고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은 상황을 바꿔 놓았다. 첫째는 국제기구가 현 정권의 지속성에 기대를 걸고 있을 때 아랍 국가들은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 국가들의 민주화로의 전환이 순수한 긴급 원조를 원한 것이지 조건을 내건 원조를 원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랍의 봉기는 (초기 자본 이탈, 관광 및 해외 투자 감소로 인한) 경제둔화로 이어졌다. 혁명세력과 반혁명 세력 간의 충돌로 (이 국가들은) 위기의 시간을 맞았다. 이 같은 사태를 예방하려면 종종 긴급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IMF는 이집트 정권의 신뢰회복을 위해 이집트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48억 달러의 차관을 끝내 지불하지 않았다. 기대했던 혁명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IMF의 차관은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정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IMF는 요지부동이었다.

IMF는 혁명 후 들어선 아랍 신정부들에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해야 된다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 같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개혁이 바로 이런 것이란 말인가? ‘국제사회’를 대변한다는 IMF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1977년과 1987년,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일어나 들불처럼 거리로 번진 “빵 폭동”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와 같은 보조금 중단을 수락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진배없다. (보조금 중단 정책) 결과도 이를 방증한다. 이집트 정부와 IMF 간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이집트의 경제는 “J” 곡선을 그리며 악순환에 빠져 들었다. 무바라크와 모르시가 권좌에서 연이어 몰락하는 사이, 이집트의 신용도는 세계 신용 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에 의해 6계단 강등되었다.(18)

2013년 7월 3일 이집트에서 반혁명이 발발하고 2014년 6월 알시스가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이집트에선 낙관론이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는 두 가지로 요인, 즉 아랍인들의 품성이 민주주의와는 호환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전 이집트 대통령인 모르시의 무능 탓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에서 빠진 게 있다. 바로 국제사회의 원조 부족이다. 왜냐하면 공식담론이 증명하듯, “민주화”는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금 “마셜 플랜”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도빌 파트너십 책임자들은 애당초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800억 달러의 향방에 대해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글·이브라힘 와드 Ibrahim Warde

미국 터프츠 대학 객원교수(메드포드와 매사추세츠 캠퍼스). 저서로 <글로벌 경제 속의 이슬람 금융>(2010) 등이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1) ‘G8은 아랍의 봄을 위해 800억 달러를 약속했다’, <르몽드>, 2011년 9월 13일

(2)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은행, 아프리카 개발은행, 이슬람 개발은행, 부흥 개발, 국제 금융 공사 및 경제 사회 개발, 아랍 통화기금, 유럽 재건 및 개발은행, 국제 금융사회, OPEC의 국제개발 기금 등

(3) Lénaïg Bredoux et Mathieu Magnaudeix, <튀니지 커넥션, 벤 알리 정권하에서의 프랑스와 튀니지 간 인적네트워크에 대한 앙케트, Seuil, 파리, 2012년

(4) David Wearing, ‘Bahrain may not be Syria, but that's no reason for activists to turn a blind eye’, <The Guardian> 런던, 2012년 5월 8일

(5) Serge Halimi, <과거로의 대후퇴, 자유주의 질서가 어떻게 세계를 장악했는가?>, Fayard, 파리, 2006년, p.39

(6) John Williamson, <The Political Economy of Reform>,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Washington, DC, 1994년

(7) 10계명은 공공 지출을 교육 및 보건과 인프라 투자비로 전환, 세제개혁(과세기준 확장과 세율 완화), 금리개혁, 환율개혁, 무역자유화, 해외투자에 대한 시장개방, 공공기업의 민영화, 규제완화, 재산권 보호 등과 같은 엄격한 예산 규율에 관한 것들이었다.

(8)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마셜 플랜을 거부한 데 반해 서유럽 국가들은 이를 채택하며 공교롭게도 벨기에, 프랑스, 이태리 등에선 공산당 장관들이 내각에서 축출되었다.

(9) Samer Soliman, <The Autumn of Dictatorship: Fiscal Crisis and Political Change in Egypt Under Mubarak>, Stanford University Press, Redwood City, 2011년

(10) Joseph E. Stiglitz,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W.W. Norton & Co, New York, 2002년

(11) William Easterly, <The Elusive Quest For Growth: Economists Adventures and Misadventures in the Tropics>, MIT Press, Cambridge, 2001년

(12) Daron Acemoglu et James Robinson,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 Crown Business, New York, 2012년

(13) Cf. <Islamic Finance in the Global Econom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0년

Gilbert Achcar, ‘무슬림형제단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2월호

Serge Halimi, ‘튀니지는 기수를 어디로 틀어야 할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4월호

(14) 특히 2013년 10월 30일, 세계은행이 터키 이스탄불에 개장한 이슬람 금융 글로벌 센터가 그 예다.

(15) Abhijit V. Banerjee et Esther Duflo, <Poor Economics: A Radical Rethinking of the Way to Fight Global Poverty, PublicAffairs>, New York, 2011년

‘자유주의 혁명 전문가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2년 5월호

‘사치스러운 개발은행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3년 12월호

(16) ‘튀니지의 민주화를 지지하기 위한 경제계획’, <르몽드>, 2011년 5월 18일

(17) ‘IMF는 아랍 국가들에 350억 달러까지 빌려줄 채비를 끝냈다’, <르몽드>, 2011년 5월 26일

(18) Borzou Daragahi, ‘S&P cuts Egypt’s credit rating again amid fiscal health fears’, <Financial Times>, 런던, 2013년 5월 9일

‘국가들을 평가하는 강력한 기관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