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인문학이 만난다

2014-09-30     전찬일,이승수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는 말 그대로 ‘영화 축제’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출범했다.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홍상수, <악어>의 김기덕 등 장차 한국영화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주목할 만한 신예들을 대거 배출한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해였던 1996년 9월(13〜21일)이었다. “경쟁을 피함으로써…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다양한 분야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선택해서 초청”하고, 중국·대만·홍콩·이란·인도·베트남 등 “격동하는 아시아 지역 영화에 초점을 맞추고 역량 있는 감독과 문제작들을 찾아내서 공개하고 격려하며,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체계 있게 정리하고 평가해서 이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겠다”(이상, 제1회 BIFF 메인 카탈로그 김동호 집행위원장 ‘서문’)는 세 가지 목표를 품고서였다.

역량 있는 감독과 수작 발굴 성과

이 땅의 첫 번째 국제영화제로서 우선은 관객들에게 영화 자체를, 그리고 축제로서의 영화를 즐기게 하는 것이 지상 목표였던 시기가 지나자, BIFF는 전격적으로 영화산업에 눈을 돌렸다. 제3회 영화제 때부터 시작된 ‘부산프로모션플랜’(Pusan Promotion Plan/PPP)-현 아시아프로젝트마켓- 등을 통해 추진해왔던 산업적 시도를 한층 더 강화시키고자 2006년 아시아필름마켓을 출범시킨 것. 다년간의 성장기를 거쳐 아시아필름마켓 역시 자립할 가능성이 보이자, BIFF는 이제 영화 자체, 영화산업을 넘어 학문으로서 영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2011년 세상 빛을 보게 된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BIFF Research Institute/BRI)는 그런 비전의 산물이었다.

BRI는 첫 결실로 부산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와 함께 <근현대 세계영화인 인명사전>을 편찬하는, 한국연구재단 토대연구지원사업을 따내는 데 성공해 2011년 11월부터 3년간 수행 중에 있다. 그리고 11월에 앞서 열린 제16회 BIFF에서는 비프 컨퍼런스&포럼(BIFF Conference&Forum/BC&F)의 전신 격인 부산영화포럼(Busan Cinema Forum/BCF)을 탄생시켰다. ‘아시아영화의 길을 묻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라는 대주제를 내건 포럼을 열면서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의 전당을 개관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영화제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했”는 바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부산영화포럼의 출발”이라고. 그는 계속해 말했다. “부산영화포럼은 부산국제영화제가 그간 아시아영화 산업 진흥을 위해 기울여왔던 노력과 그 성과를 이어 받아 영화 미학과 담론의 장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나가려는 목적으로 출범했”다고. 첫 해에는 “아시아영화의 미래를 질문하지만 차후 부산영화포럼은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반영하려 세계 영화계의 이론의 흐름을 이끌어 나가고자” 한다고. “또한 영화학과 영화 주변 학문들의 간학제적 관심사들을 집적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창조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고.

대중성에 학술적인 성격 가미

2012년 제2회 부산영화포럼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영화 복원과 보존의 정치학’이란 주제 하에서 “21세기의 화두인 문화유산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담론”(이용관 집행위원장 개회사)을 다뤘다. BIFF 뉴커런츠상 심사위원으로 영화제를 찾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가 추억의 영화 이야기를 펼치는 등 포럼의 전반적 목표에서 크게 비켜나진 않았어도, 주제가 지나치게 전문적인 것 아니냐, 포럼이 지향한다는 대중성이 너무 결여된 게 아니냐는 등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2013년 부산시네마포럼이 보다 학술적이고 전문적 방향성을 띤 컨퍼런스와, 전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대중성을 노리는 포럼으로 분화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과정이었던 셈이다. BCF가 전 세계 영화제 최초로 컨퍼런스를 품으며 BC&F로 재탄생한 것이다.

2013년 비프 컨퍼런스의 대 주제는 ‘Movie, Media and Mind; Reflections upon Film as Social Awareness’였다. 번역 없이 영어 제목만 내건 선택부터가 포럼과의 어떤 차별성을 확보하기 충분했다. 코넬대학교 영문학·비교문학 교수인 티모시 머레이의 기조 강연 ‘영상의 융복합: 애니메이션, 그 바로크풍의 기억’이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권영민의 문학콘서트: 이상 소설 속의 영화’도 그랬다. ‘영화와 디자인&융합’, ‘영화와 인문학’, ‘영화 속의 인문과 테크놀로지’, ‘영화와 공학’, ‘영화와 스포츠’로 구성된 다섯 개 세션들도 마찬가지였다. 컨퍼런스다운 아카데미즘을 상당 정도 띠었다. 그에 반해 포럼 세션들은, 상대적으로 대중적 구색을 갖췄음에도 다양성 면에서는 부족했다. 영국의 영화 평론가 토니 레인즈의 초청 강연 세션 4 ‘중국 독립영화의 숨겨진 역사’ 포함 총 5개 세션 중 세 세션이 중국영화 관련 세션들이었던 것. 세션 1 ‘중국의 무협영화, 그 動과 靜의 인문주의’와 세션 2 ‘중국영화의 인문주의 스펙트럼’이 그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세션은 ‘영화, 영화제 담론’과, ‘영화배급의 법률문제’였다.

 

학제적 영화 연구의 가능성 탐색

스스로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2년차인 올해 비프 컨퍼런스 대주제는 ‘디지털 시대의 영화 담론’.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등 지적도 없진 않았으나, 포용성 큰 주제를 통해 다양한 논의를 촉발시키자는 의견에 별다른 이견 없이 결정됐다. 비프 컨퍼런스는 이 주제를 강화시킬 인물로, 학문 융합에 선구적 기여를 해오고 있다는 영국 랭카스터 대학 사회학과의 그래엄 길록-“‘도시의 사상가’로서의 벤야민에 주목”해, 저자의 “여러 저작을 관통하는 중요한 모티프의 파편들을 모아서 그의 도시 연구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 미학, 역사학, 커뮤니케이션 연구와 결합되는 학제적 연구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Myth and Metropolis : Walter Benjamin and The City (1997)>(노명우 역, 효형출판, 2005) 등으로 유명한 학자로 그 책에서는 ‘그램 질로크’로 실려 있으나, 제3자를 통해 본인에게 확인한 바 이렇게 발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교수를 모셨다. 그는 발터 벤야민과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 연구에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학자로, ‘우리 시대의 영화: 디지털 꿈꾸기와 영화의 마술’이라는 주제로 기조 발제를 선보인다. 목하 전 세계 감독 중 손꼽히는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난, <메멘토>, <다크 나이트>, <인셉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영화 보기 방법론과 컴퓨터 생성 화상(Computer-Generated Imagery/CGI)의 극대화된 발전이 만들어낸 현실-비현실 간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벤야민과 크라카우어 이론으로 풀어낼 것이다.

길록 교수의 화두를 확장·심화시킨 컨퍼런스 첫 세션은, 대주제 ‘디지털 시대의 영화 담론’을 제목으로 내걸었다. 연세대 서현석 교수는 ‘디지털 공간, 디지털로서의 공간’이란 주제로, 체코 출신의 저명한 영화이론가이자 영화감독인 하룬 파로키의 이론을 끌어와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실재와 결별하는가?” 등에 대한 담론을 펼친다. 홍익대 미학과 하선규 교수는 직접적으로 크라카우어와 벤야민의 이론에 기대어 ‘영화와 집단-신체에 각인된 모호한 흔적들’이란 주제로 발제를 펼친다. 크라카우어 이론으로 푼 영상의 신체적 수용, 벤야민으로 말하는 집단적 꿈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만날 수 있다. 홍콩 침례대학 영화 아카데미의 탄 지아 교수는 ‘미디어 융합 시대, 중국 액티비스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주제로 디지털 시대 영화 수용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회 역사, 미학, 영화 연구, 문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현존 프랑스 최고 철학자 중 한 명인 자크 랑시에르-BIFF 뉴커런츠 부문 5인 심사위원 중 1인으로 부산을 찾는다-의 사상 세계를 파고드는 세션도 준비돼 있다.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도서출판 길, 2013 전면개정판) 등을 번역했으며, 현재 파리 제1대학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양창렬 선생은 ‘영화적 우화에 대한 난외 주석’이라는 주제로 랑시에르 이론에서의 영화론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한다. 필로아트랩 이지훈 대표는 ‘모두가 관객이다’라는 주제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 관객의 능동성에 대한 주장을 선보이며, 중앙대 김지훈 교수는 ‘간극, 작용, 재분배: 자크 랑시에르와 포스트시네마’로 디지털 시대의 영화 담론과 랑시에르 이론을 함께 설명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영화와 인문학의 결합 시도

2013년 컨퍼런스 출범과 함께 시작한 인문학 콘서트는 BC&F가 향후로도 꾸준히 이어갈 특별 프로그램으로, 올해는 가히 ‘오리엔탈리즘 전문가’라 할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영화와 오리엔탈리즘’으로 바통을 넘겨받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화두로 <300> 등 할리우드 영화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차근히 짚어낼 그의 강의는 콘서트라는 이름에 합당할 만큼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게 확실하다.

예년에 비해 한층 더 강화된 ‘영화와 인문학’은 두 개 세션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조선대 아시아문화교류사업단에서 주관하는 ‘디지털시대 영화의 수용’과, 동국대 영문학과 김영민 교수가 좌장으로 공들여 꾸린 ‘영화 속의 인문학과 트랜스휴머니즘’이다. 전자는 한국외대 이윤희 교수가 ‘스크린 위의 기호: 퍼스와 미학적 경험’을 통해 상징으로서 영화를 이야기하며, 부경대 김무규 교수는 ‘디지털 환경과 영화텍스트의 의미’로 구성주의나 체계 이론을 통해 미디어 이론의 재정립을 꾀한다. 후자는 이번 컨퍼런스에서 유일하게 영어로만 진행되는 세션이다. 흥미롭게도 이 세션은 각각 하나의 작품 내지 한 명의 시네아스트에 대한 집중 탐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대만의 대표적 감독인 차이밍량을 통해 트랜스휴머니즘의 정치학을, 부산대 임동휘 교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최근작 <사랑을 카피하다(Certified Copy)>로 기호학을 이야기한다. 경희대 제이슨 바커 교수는 뤽 베송 감독의 최신작 <루시>로 데카르트적 트랜스휴머니즘의 큰 그림을 그릴 것이다.

세션 5 ‘영화와 신화’는 스토리텔링의 원류인 ‘신화’를 파고든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인 도정일 교수가 ‘신화와 상상력’이란 기조 강연으로 세션의 문을 연다. 김남일 소설가는 ‘아시아의 신화지도’를 그리면서 아시아 곳곳에 퍼져있는 신화를 재발굴하며, 방현석 중앙대 문창과 교수/소설가는 ‘아시아 신화를 누비는 캐릭터들’을 ‘특히 영웅과 트릭스터를 중심으로’ 펼쳐보인다. 영화평론가 이안 선생은 이 재발굴된 캐릭터를 가장 신화적으로 다룬 흥미로운 콘텐츠들을 두 편의 인도 영화를 통해 소개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세션은 지난해에 이은 ‘영화와 스포츠’다. 인문학 등 여느 분야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 학문으로서의 스포츠의 성장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대 김종백 교수가 ‘영화로 본 스포츠마케팅’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충남대 남상우 교수는 ‘영화가 그리는 스포츠의 속살’이라는 주제로 스포츠 영화의 비판적 수용을, 경북대 이정래 교수는 ‘스포츠영화에서 찾는 성공의 열쇠’를 흥미롭게 펼친다.

비프 포럼의 주제들 역시 크고 작은 흥미를 끌기에 모자람이 없다. 컨퍼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적 접근을 하긴 하나, 그 깊이는 컨퍼런스에 못지않다. 개최 기자 회견 자료집 등에서 밝혔듯, 2013년에 비해 내용적으로도 훨씬 더 다양해졌다. 뿐만 아니라 외연적으로도 5개 세션에서 7개로 증가했다. 질적 성숙과 양적 성장이 동시에 이뤄졌다고 할까. 지난해의 지아장커에 이어 올해 포럼에서 집중 조명할 아시아 작가로는 이란 출신의 세계적 거장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선정됐다. 최병학 부산대 교수가 ‘영화의 진리와 마흐말바프의 진리’로 인간 마흐말바프와 그의 영화 인생을 되짚는다. BRI 운영위원화 포럼 위원장인 부산대 이왕주 교수는 ‘꽃’이라는 이미지로, 카자흐스탄의 영화평론가 굴나라 아비케야바는 ‘거울’이라는 이미지로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 세계를 분석한다. 지난 8월, 2014년 만해대상 문예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한 마흐말바프 감독은 발제에 앞서 기조 강연을 펼칠 예정이다. 자신의 영화 인생과 영화관 등을 담은 짤막한 원고를 보내오긴 했으나, 그가 현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펼칠 지는 미정이다.

부산의 지역성을 살린 포럼 개최

올해 포럼에서는 부산이란 지역성을 기반으로 한 두 세션을 특별히 꾸려, BIFF의 지역적 기반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폭력, 영화 그리고 부산의 로컬리티’(송명희, 부경대) 등을 짚는 ‘영화, 도시 그리고 인문정신’과,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1,760만 명에 근접하는 괴 기록을 수립한 대작 <명량>을 읽어내는 ‘영화독서포럼’이 그것들이다. 대주제 키노트 스피커 길록 교수는 ‘도시 세션’ 발제자로도 참여하는데, 그를 제외하고는 부산 출신이거나 부산이 주거지인 부산 인사들이 두 세션을 꾸린다.

올해 비프 포럼 세션들의 또 다른 특징은, 시의성·시대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3·11 이후 일본 영화의 어떤 경향’(재팬 파운데이션 후원)과, ‘하세편과 차이니즈드림’(공자아카데미+중국영화포럼), ‘영화심의기구의 민간자율화와 그 해법’(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의 다양성과 한국영화산업’(영산대학교법률연구소)가 그것들이다. 이렇듯 BRI와 BC&F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열심히 세포 분열 중이다.

글‧이승수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BRI) 스태프

전찬일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BIFF 아시아필름마켓 부위원장과 BRI 소장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