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성을 거부한 부산국제영화제

2014-09-30     김지석

 

전 세계에는 수백 개의 영화제가 있다. 세계영화제작자연맹(FIAPF)이 공인한 국제영화제가 51개이기는 하지만, ‘공인영화제’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리고 역사가 오래되고 권위 있는 영화제들이 대부분 FIAPF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어 공인영화제가 권위가 있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FIAPF 회원이 아닌 영화제들의 경우 통계수치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전 세계에 정확하게 몇 개의 영화제가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백 개의 영화제라는 숫자는 단지 추정치일 뿐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많은 영화제들이 있다 보니 경쟁도 치열하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영화제의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와 역할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거장감독의 신작이나, 새로운 작가 발굴 여하에 따라 영화제의 위상이 판가름 났다면, 최근에는 산업적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위상이 달라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토론토영화제이다. 토론토영화제는 경쟁영화제도 아니지만, 이미 베니스영화제와 맞먹는 영화제로 평가받는다. 칸, 베니스영화제 등이 100편 내외의 작품을 초청하는 반면, 토론토영화제는 400편에 가까운 작품을 초청한다. 때문에 ‘엄선된 작품’으로 짜여진 프로그래밍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니냐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초청작 중에는 뛰어난 작품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토론토영화제의 전략은 ‘엄선된 작품 선정’으로 위상을 높이기보다는, 보다 많은 작품이 북미시장 진출을 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다. 제작자나 세일즈사들에게는 평단의 평가만큼이나, 세일즈의 기회가 중요한 것이다.

토론토영화제에 가까운 운영방식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313편의 작품을 초청했고, 그중 134편이 월드 또는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작품이다(장·단편 포함). 그리고 영화제의 성격으로 보자면 칸, 베니스영화제보다는 토론토영화제나 로테르담영화제에 가깝다. 일각에서는 부산영화제가 월드 또는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숫자에 집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그 숫자의 이면에 담긴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유럽 메이저 영화제들의 경우 대부분 필름마켓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메이저 영화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강력한 세일즈 회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제, 마켓, 세일즈사, 권위 있는 영화평론가, 기자 집단 등이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서클을 이루며 상생해 왔다. 비유럽권의 명망 높은 감독, 또는 거장들이 신작을 이들 유럽의 메이저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반해 부산영화제의 주변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강력한 마켓이나 세일즈사도 없고, 권위 있는 평단도 없다. 유럽처럼 다양한 공적 펀드 역시 거의 없다. 그나마 중국과 일본, 인도, 한국이 세계영화시장 규모 2, 3, 6, 8위를 차지할 만큼(2013년 기준), 아시아의 영화시장 규모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 위로가 될 뿐이다. 하지만, 유럽이나 북미시장과 비교하면, 아시아 시장은 공유 시장이 아니다. 즉, 각 국가들의 시장이 매우 폐쇄적이다. 때문에 교류도 원활하지 못하다. 유럽의 경우 EFP(European Film Promotion)나 EU가 지원하는 미디어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영화의 공동발전을 지원하지만, 아시아는 그러한 기구나 지원 프로그램이 전혀 없다. 또한, 유럽에서는 국가 간 공동제작이 활발하지만, 아시아는 그 숫자가 매우 미미하다.

아시아 국가 간 폐쇄적인 영화시장 구조

출범 초기부터 ‘아시아영화의 동반성장’을 모토로 내세웠던 부산영화제는 이러한 주변 환경과 세계 영화제의 새로운 흐름에 대처하면서 영화제의 미래비전과 발전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그래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 아시아필름마켓(AFM),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 아시아영화펀드(ACF)를 차례로 시작하였다. APM, AFA, ACF는 모두 아시아 지역 영화제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사업들이다. 그리고, 이 행사들이 관객들과 직접 만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 행사들은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되는 수많은 작품들의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APM과 AFM은 아시아영화를 위한 시장을 열어주는 곳이고, AFA는 아시아영화의 미래 인력을 키워내는 워크숍 프로그램이다. 그런가 하면, ACF는 아시아영화의 제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기획되고 완성된 아시아영화들은 부산영화제를 통해 세계무대로 나아가며,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프로모션이 필요하다. 전 세계의 영화기자와 평론가, 바이어, 영화제 관계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작가와 새로운 작품이 필요하다. 부산영화제가 월드 또는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를 이야기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부산영화제는 아시아영화가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가는 관문 역할, 아시아의 새로운 작가 발굴과 지원을 하는 영화제를 지향한다.

새로운 작가의 발굴과 작품 지원 나서

우리 관객들이 국제영화제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인과 관객의 만남’은 늘 큰 호응을 얻는 프로그램이고, 영화제의 핵심 아이템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프로그램이 모든 세계의 영화제에서 보편적인 프로그램은 아니다. 부산영화제의 경우 GV(Guest Visit) 외에 오픈토크, 아주담담, 야외 무대인사, 시네마투게더, 마스터클래스, 핸드프린팅, 영화관련 신간서적의 저자 사인회 등 굉장히 다양한 ‘영화인과 관객의 만남’을 운영하고 있다. 그것은 ‘관객친화형 영화제’를 지향하는 부산영화제의 철학이 담긴 프로그램이다. 해외 영화제의 경우는 어떤가? 메이저 영화제 중 칸영화제는 철저하게 영화인과 언론 중심의 영화제이다. 관객은 표를 거의 구할 수가 없다. 이웃 도쿄, 홍콩영화제에서도 ‘상영 후 Q&A’ 외에 ‘영화인과 관객의 만남’은 거의 없다. 티켓할당 문제에도 영화제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칸이나 베니스영화제처럼 관객을 위한 티켓이 거의 없는 영화제가 있는가 하면, 관객과 영화인용 티켓을 적절히 분배하는 영화제도 있다. 문제는 상영 횟수는 제한되어 있고, 게스트의 숫자가 넘칠 때 영화제에서도 티켓할당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지난해 배지를 제공받거나 구매한 게스트는 9,991명에 달했다. 이들이 부산에 와서 불편을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티켓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한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부산영화제는 관객과 게스트용 티켓의 비율을 늘 7:3으로 유지하고 있다. 대신 게스트를 위해서는 P&I(Press and Industry) 스크리닝을 별도로 제공한다. 또한, 마켓배지를 사서 마켓스크리닝에 참가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부산영화제는 다양한 ‘영화인과 관객의 만남’과 티켓분배 등을 통해 ‘관객친화형 영화제’로서의 정체성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오픈토크 등 관객친화형 이벤트 준비

부산영화제가 이러한 기조를 가지게 된 데에는 연유가 있다. 부산영화제가 비록 출범 당시 ‘아시아영화의 동반성장’이란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한 인프라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화제 운영에 관한 경험을 갖춘 전문인력도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부족함을 메워 준 분들이 관객이었다. 초창기 부산영화제 관객은 불편함과 낯섦을 덮어주고, 미친 듯이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인에 열광하였다. 말하자면 부산영화제의 ‘관객친화형 영화제’라는 정체성은 관객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국내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영화제들이 부산과 마찬가지로 ‘관객친화형 영화제’를 지향하고 있다. 해외의 영화제 관계자들이 부산뿐만 아니라, 여타 지역의 영화제를 방문하면서 가장 신선하게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올해도 부산영화제는 내실 있는 오픈토크, 아주담담, 야외무대인사, 시네마투게더, 마스터클래스, 핸드프린팅 행사를 준비했다. 영화의 전당 두레라움 광장과 해운대 백사장 야외무대에서는 매일 앞에서 언급한 행사들이 진행된다.

영화제 프로그램 중 특히 마니아층의 관심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다. 회고전 또는 특별전이 바로 그것이다. 부산영화제는 회고전의 경우 ‘한국영화 회고전’이라는 섹션을 따로 두고, 지난 18년간 한국영화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부산영화제의 과거 ‘한국영화 회고전’ 중에는 해외에서 주목을 받은 사례가 많다. 1997년 2회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 김기영 감독, 2005년 10회 부산영화제의 회고전 주인공 이만희 감독 등은 이듬 해 여러 주요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등, 과거 한국영화가 배출한 뛰어난 작가를 세계무대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올해는 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제작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정진우 감독의 회고전을 마련했다. 기대하건대, 정진우 감독 회고전도 내년쯤에는 여러 여타 주요 영화제에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회고전도 그렇지만, 특별전은 보통 1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친다. 올해 두 개의 특별전 ‘터키특별전: 뉴터키시네마-21세기의 얼굴들’과 ‘조지아특별전: 여인천하-조지아 여성감독의 힘’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터키특별전’의 경우 올해 칸영화제에서 누리 빌게 제일란이 ‘윈터슬립’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마침 올해가 터키영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 그 의미가 각별하다. 또 다른 의미는 누리 빌게 제일란이나 예심 우스타오글루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감독들보다는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독립영화 감독을 부각시키는 특별전이라는 점이다. ‘조지아특별전: 여인천하-조지아 여성감독의 힘’은 그 어느 곳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주제의 특별전이다. 이미 1930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던 조지아 여성감독들의 발자취는 상상 이상이다. 1930년부터 현재까지의 여성감독들의 대표작 12편을 소개하는데, 특히 3대에 걸친 여성감독들이 눈길을 끈다. 누차 고고베리제와 라나 고고베리제, 살로메 알렉시가 그들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들의 대표작 상영과 함께 라나 고고베리제, 살로메 알렉시 모녀가 부산을 찾아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1대인 누차 고고베리제는 이미 타계). 지난 1년 동안 부산영화제는 조지아 국립영화센터와 소재가 불분명했던 프린트를 찾고, 복원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이번 특별전으로 인해, 조지아 역시 자국의 영화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또한, ‘터키특별전’과 ‘조지아특별전’ 모두 대담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특별전에 초청된 감독들과 함께 그들의 특별한 영화사에 대해 관객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획일화되어가는 영화문화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담아

영화제는 참가자에 따라 그 의미가 각기 조금씩 다르다. 영화인들은 관객들과의 만남, 평단의 반응을 궁금해 하며, 세일즈사나 제작사는 비즈니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관객은 새로운 영화를 만나고, 영화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에 대한 기대가 클 것이다. 영화제는 이러한 참가자들의 바람이나 욕구를 여하히 조화롭게 충족시키는가를 늘 고민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제는 점차 획일화되어가는 영화문화, 영화산업구조의 왜곡화 현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 동시대, 더 나아가 미래의 영화매체가 당면한 문제, 혹은 당면할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 부산영화제는 이러한 고민과 희망을 함께 안고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글·김지석

영화계간지 <영화언어> 편집장과 NETPAC(아시아영화진흥 네트워크)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