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인들이 분노하는 ‘쩨쩨한’ 이유

2014-09-30     카를로스 파르도

 

프랑스 영화계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물론 2013년 프랑스 총 영화 제작편수는 209편으로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 가운데 154편은 프랑스 국내 자본으로 제작됐다. 반면 프랑스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확실히 감소했다. 프랑스 영화를 관람한 관객 수는 모두 6,450만 명으로, 지난 10년 이래 최저 수준인 33.8%를 기록했다. 2004~2013년까지만 해도 평균 39%에 달하던 수치다.(1) 한편 2004년 이후 연간 1.5%씩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던 투자비 역시 4.3%가량 줄었다. 그렇다고 2014년 전망이 그리 밝은 것도 아니다. 2014년 상반기 촬영 중이라고 신고된 영화는 2013년 동기 대비 32% 줄었다. 가장 시름이 깊은 분야는 가내수공업에 비견할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되는 독립영화들이다. 사실상 작가주의 영화는 TV 방송사에 문전박대를 당하는 통에 기껏해야 국립영화센터(CNC)가 주는 ‘수익근거 사전대부식’ 선별지원금(2)이나 도의회 보조금에 의존해 가까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실정이다. 그만큼 오늘날 영화 제작을 중도 포기하는 영화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13년 9월, 근래 최고의 수작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네가 치유해준 내 영혼>이 개봉되었을 당시 감독 프랑수아 뒤페롱은 “TV 방송사의 전체주의적 행태”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2003년부터 공영방송국들이 번번이 내 작품에 모조리 퇴짜를 놓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민영방송사인 ‘카날 플뤼스’도 2007년부터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결국 뒤페롱 감독에게 믿음을 보여준 이는 다름 아닌 포르투갈 제작자 파울로 브랑코였다. 당시 제작자를 찾지 못한 감독은 결국 작품을 포기하려고까지 마음먹었지만, 결국 파울로 브랑코가 손을 잡아준 덕분에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1백만 유로(2013년 평균 제작비의 5분의 1)가 채 되지 않는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는 많은 속박이 따랐다고 감독은 토로했다. “종종 의사결정권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영화에 대해 판단을 잘못했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잘못 판단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수년째 똑같은 자리에 앉아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수많은 시나리오를 거절했다. 어떤 것은 욕설이 난무한다며(나도 실제 겪었던 경우다), 어떤 것은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또 어떤 것은 어떤 장르로도 분류하기 난해한 영화라며 문전박대한다. 그들은 오로지 수치와 캐스팅으로만 영화를 판단한다. 그것은 곧 문화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잠재적으로 다양한 병폐를 품고 있는 유전자변형 영화일 뿐이다. 사실상 우리는 영화가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흔히 간과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작 이야기되는 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무엇이다. 그 또 다른 무엇이 때로는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차기작 찍는 경우 32.5%

하지만 영화인들은 이런 비판적인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경우가 드물다. 인맥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되는 이 바닥에서는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루저의 이미지를 덧씌우거나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늘어놓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러니 작품 한 편을 세상에 내놓은 전도유망한 한 신예감독이 취재에 응하면서 익명을 요구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두 번째 영화는 첫 번째 영화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라고 주변에서 이야기할 때 나는 그저 그것이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2013년 첫 영화를 찍은 감독이 차기작을 찍는 경우는 32.5%, 두 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이 차기작을 찍는 경우는 18.7%에 불과했다. 더욱이 이 신예감독의 경우에는 여러모로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계획 중인 작품은 저예산 영화였고, 출연배우들과도 모두 협의가 끝난 상태였으며, 대형 배급사와 계약을 맺은 데다, 한 투자펀드까지 제작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립영화센터(CNC)나 TV 방송사, 지자체와 같은 기존의 ‘지원창구’에 지원금을 요청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자 별안간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첫 영화 때 굉장히 호의적인 파트너였던 ‘카날플뤼스’사가 새 작품에는 퇴짜를 놓았다. 최종 결정권자가 이제는 영화계가 아니라 방송사가 된 셈이다.” 국영방송사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아르테’ 방송국은 다소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프랑스 텔레비전’은 아예 작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국립영화센터(CNC)가 주는 ‘수익근거 사전대부식’ 선별지원금을 받는 것마저 녹녹치 않았다. 1차 시나리오 심사에서 탈락한 뒤 줄거리를 모조리 뜯어 고쳐 재심사를 받았지만 결국 소중한 지원금을 받아내지 못했다. “작가주의 영화는 대중에게 인기가 없다. <7월 14일의 소녀>나 <솔페리노 전쟁>처럼 지난해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무수한 호평을 받았던 영화들마저도 5만 명의 관객을 채 동원하지 못했다.(3) 그러니 영화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의사결정권자들이 입을 댈 때마다 시나리오를 수없이 고쳐 쓰는 게 다반사다. 편집담당자들 사이에 ‘뼈를 깎는 작업’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얼마나 작가들에게 줄거리, 즉 영화의 뼈대에만 집중하도록 압박하는지, 편집은 기존의 서사 기능은 저버린 채 오로지 영상의 짜깁기로 전락해버렸다. 지금 우리는 일종의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많은 기업이 영화제작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지원금 창구에 줄을 서야 하는 처지인 독립영화사들은 게임판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영화인이 된다는 것은 흡사 소설가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영화인으로 생계를 꾸리기란 불가능하다.”

1980년대 프랑스 명문 영화학교 고등영화연구소(IDHEC)를 졸업한 에마뉘엘 퀴오도 “누군가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며 거침없는 일성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찍은 영화가 고작 장편 두 편(<서킷 카롤르>(1995),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2007))에 그치는 이유가 혹 그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새 영화를 구상한 지 2년이 지났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사는 한 주부가 어느 날 취직자리를 찾아 파리로 상경하지만 결국 원하던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국립영화센터(CNC)가 주는 선별지원금 심사에서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길 만한 배급사가 나타나면서 가까스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13년 8월, 감독은 마틸드 세녜르(출연작 <엄마>, <버킷리스트>)에게 주인공 역을 제안했다. 세녜르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3개월 후 돌연 캐스팅을 고사했다. 다른 영화에서 비슷한 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녀와 비슷한 연령대 가운데 ‘흥행보증수표’로 불릴 만한 여배우는 기껏해야 한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가령 카린 비야르(출연작 <폴리스>, <룰루, 벌거벗은 여인>)가 그런 흥행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감독은 다시 카린 비야르에게 작품을 제안했다. 그녀는 시나리오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매니저와 감독, 시나리오 작가와 제작자를 한데 모아 함께 의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매니저는 주인공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돋보일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흡사 미국 영화감독 존 카사베츠(대표작 <글로리아>, <영향 아래 있는 여자>)의 조언자이자 아내인 지나 롤랜즈처럼 말이다. 감독은 두 번이나 새롭게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 그러나 매니저는 이내 “엔딩에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며 출연 제의를 거절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감독은 이번에는 중간에 개입하는 사람 없이 여배우 상드린 키베를랭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 그녀와는 2007년에 함께 영화를 찍은 인연이 있었다. 키베를랭은 시나리오를 읽어보더니 정말 마음에 든다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전 세자르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을 한 직후여서 캐스팅이 물 밀듯이 쇄도했고, 2015년 6월이 되어야 스케줄이 비었다. 제작자는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카린 비야르의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매니저는 자기 고객은 작품에 출연하기 힘들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렇게 최종 답변을 들은 것이 지난 5월이었다. 그러니 2014년 가을로 예정되었던 촬영은 결국 1년이 더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제작사들의 잇단 거절로 영화인들은 절망의 늪에

상드린 베셋은 1996년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라는 멋진 처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4) 이후 그녀는 유세프 샤인이나 엘리아 술레이만의 제작자이기도 한 움베르 발상과 3편의 장편영화를 함께 더 만들었다. 그러나 발상은 빚더미에 오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2005년 2월 10일 회사 사무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갑작스러운 발상의 죽음은 베셋의 작품 활동에도 많은 악영향을 미쳤다. “다른 제작자들과는 마음을 맞추기기 쉽지 않았다. 번번이 작품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최근 내가 찍은 작품들이 모두 상업적으로 흥행에 실패했다며 흠을 잡았다. 또는 흥행배우를 캐스팅하지 않는다, 영화가 너무 예술성을 고집한다, 혹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고 문제를 삼았다.” 그러나 2년간의 험난한 전투 끝에 한 젊은 제작자가 가까스로 1백만 유로가 조금 못 되는 자금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베셋은 8년의 공백기를 깨고 작품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첫 영화는 오로지 국립영화센터(CNC)에서 주는 선별지원금만 가지고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영화가 대박을 치고 돈을 벌어다주길 바란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여건이나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와 비교해 너무나도 형편없는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그런데도 매번 똑같은 논쟁만 되풀이될 뿐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진작가 라파엘 닐은 청소년기부터 영화인이 되기를 꿈꾸어 왔다. 틈만 나면 존경하는 영화인들에게 편지를 써 부치곤 했다. 그가 편지를 보낸 무수한 사람 중엔 클로드 샤브롤도 있었다. 클로드 샤브롤은 그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에게 곧장 자기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시켜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실제 촬영장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다른 비슷한 경험을 몇 차례 더 해본 라파엘 닐은 그길로 시나리오 작업에 뛰어들었고, 소위 ‘창구’ 순회를 시작했다. 독립 배급사 주르되페트(Jour2fê̂te)가 유일하게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금 모집에 실패했다. 닐은 다시 레슬리 카플랑의 소설을 각색할 계획을 세웠다. 20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피버>(POL출판사, 2005)라는 소설이었다. 소설 제목은 페기 리가 부른 ‘불멸의 명곡’에서 따왔다. 대학생 둘이 철학적 질문에 천착한 끝에 아무런 동기 없이 무턱대고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줄기다. 이 이야기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1948년 히치콕 감독의 <로프>에도 영감을 주었던 한 사회면에 실린 살인사건(천재적인 두 소년이 오로지 지적 도전을 위해 인근에 사는 어린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레오폴드·로엡 사건-역주)이었다. 라파엘 닐은 “이 소설은 우리가 얼마나 지루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하품 나는 세계에서 범죄는 곧 흥미진진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이른바 ‘악의 평범성’의 또 다른 변주인 셈이다”고 말했다. 새 작품을 구상 중인 라파엘 닐은 다시금 자금 조달이라는 험난한 장애물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절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작가와 출판사를 찾아가 무료로 저작권을 따냈다. 그러곤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은 배우들에게 손수 편지도 썼다. 배우들은 그의 결연한 의지에 감명을 받아 그와 뜻을 함께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한편 그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사업 구상도를 올려 11,000유로의 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독립 배급사 ‘주르되페트’ 역시 나머지 모자란 예산을 채워줬다. 물론 그래봤자 전체 예산은, 2만 유로였다! 모든 스태프가 영화 제작을 위해 월급을 십시일반 내놓았다. 2013년 프랑스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소요되는 평균 촬영 시간이 최근 10년 이래 가장 짧은 기간인 36일을 기록했다면, 닐은 이 시간을 더 단축했다. 그는 달랑 사진기 한 대만 가지고 한 달 만에 작품 촬영을 모두 마쳤다. “과거의 기분 나쁜 경험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분노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나는 도청에 촬영 신고도 하지 않은 채 거리에서 영화를 찍곤 했다. 대체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영화 좀 찍었다고 누가 나를 설마 감옥에 처넣기라도 하겠는가?” 이렇게 하나 둘 찍은 ‘자연 그대로의 날 영화’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제 개봉 여부를 판가름하는 국립영화센터(CNC)의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또 다시 한바탕 정신없는 전투가 시작되는 셈이다.

글·카를로스 파르도 Carlos Pardo

언론인 겸 영화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미국 영화의 2013년 프랑스 내 시장 점유율은 54.24%에 달했다. 지난 10년 평균 점유율도 47.19%에 달했다. Cf. <Les dossiers du CNC>, 제330호, 파리, 2014년 5월

프랑스 영화진흥기구 ‘유니프랑스 필름’에 따르면, 2012년 프랑스 영화를 본 해외 관객 수는 4,400만 명으로 조사됐다.

(2) Eugenio Renzi,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2월호

(3) 앙토냉 페레자코와 쥐스틴 트리에가 각각 메가폰을 잡고 에마뉘엘 쇼메가 제작을 맡은 100만 유로 이하 예산이 투입된 두 영화는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았고, 세자르 영화제에는 후보작으로 올랐다.

(4) 루이델뤽상과 세자르 최우수 영화상 수상

(5) <마르타, 마르타>(2001), <원스 어폰 어 투모로우>(2006)

(6) http://blog.mondediplo.net/2014-02-04-Silence-on-tourne-malgre-t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