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획일주의 강박증
최근 병영참사가 연이어 터지자 ‘병영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병영문화 개선을 요구하는 이들은 병영의 문제를 흔히 “일제의 잔재”라고 말한다. 식민지 경험에서 이어진 ‘적폐’를 끊어낸다면 한국군은 ‘정상화’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도 7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일제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전전(戰前) 일본군의 병영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적폐’를 일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면 옳을지 모르겠지만, 일소해야 할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부추기는 일이 될 것이다. 병영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참사를 불러일으킨 병영문화의 역사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일제의 잔재”가 형성된 과정부터 되짚어보자.
일본 군부의 극단적인 정신주의
메이지유신으로 권력을 잡은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은 징병제로 대표되는 군대 개혁을 단행했다. 내부적으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독점적인 권력을 확고히 하고, 외부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또 하나의 제국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의 새로운 지배 엘리트들은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가장 효율적인 군사제도로 받아들여진 징병제를 통해 ‘천황의 국가’를 지키고자 했다.
일본은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근대적인 군대체계를 급속히 갖추기 위해 극단적으로 획일성을 강조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하루 속히 근대적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던 일본군의 형식주의는 어떠한 자율성도 허락하지 않는 강박을 보였다. 사병들의 작은 행위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형식적인 통일을 이루려고 했기에 장교 양성에서도 오로지 군사기술의 기능적인 면만 요구되었다. 따라서 사관학교에서도 틀에 박힌 형식에 가장 잘 적응한 자가 고급장교로 올라갈 수 있었다.(1)
한편, 총기 등의 화포 공격으로 전쟁이 진행되면서 생산력은 승패를 가르는 요소가 되었다. 청국·러시아와 잇따라 전쟁을 치렀던 일본의 군부는 생산력 문제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생산력 증강을 당장에 성취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의 군부는 생산력 문제를 정신력에 대한 강조로 넘어서고자 했다. 러일전쟁 직후에 개정된 육군 교범들이 유독 ‘공격 정신’, ‘필승의 신념’, ‘군기’ 등을 내세웠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본의 군부가 서구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제국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적인 요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2)
이처럼 일본 군부에 의해 추진된 근대화의 성격은 극단적인 획일성을 요구하는 정신주의에 집약되어 있었다. 사회적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급속하게 형식의 통일을 강조했기 때문에 군기가 유달리 요구된 것이다. 병사들 개개인의 얼굴을 지우고 획일적으로 규율된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사적 제재는 당연시되고 용인되었다.(3)
국가에 대한 무한한 책임성을 요구했던 일본군의 정신주의는 생산력 등의 제반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군사적인 팽창을 지속하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중국에 이어 미국과 전면전을 벌여 결국 패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극단적인 정신주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정신주의로 대표되는 군사정책을 반성하게 되었다.
해방 후 잔존한 “일제의 잔재”
그러나 일본군의 병영문화는 한국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해방 후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이어진 근대성의 뿌리를 부정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과거 일본군에서 장교로 양성된 이들이 한국군의 지휘부에 포진하며 인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역인식의 연속성이었다.
1942년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는 식민지에서 시행될 징병제의 의의를 설명하는 담화문에서 일본의 징병제가 지닌 특성을 역설했다. 그는 조선인에게도 확장된 병역이 “신성한 본질”을 지녔다면서 “보편개념 하에 사용하는 ‘의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일본의 국민개병주의 관념에서 징병제는 “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특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병역을 ‘특권’으로 설명하여 의무를 이행하더라도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고자 했다.(4) 병역을 오히려 권리로 설명했던 것은 식민지의 조선인들이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 일본군의 정신주의가 지닌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에서 병역은 다시 한 번 ‘특권’으로서 제시되었다. 병역법 제정을 알렸던 <국회보>는 다음과 같은 말로 병역을 권리로 주장했다. “국민개병! 국민된 자 내 나라 내 강토를 위하여 내 민족을 위하여 총검을 메고 나설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된 권리를 법으로서 약속받을 때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5) 당시의 신문기사들 역시 징병제 실시의 의의를 “징병적령자의 광영”, “자진참가의 영예”나 “대망의 군문은 열리다”와 같은 언표로 설명했다.(6) 물론 당시의 신문들은 식민지시기에 시행되었던 징병제와 다르다는 주장을 덧붙이기도 했다. 식민지배 하의 징병제가 “군국주의에서 발로된 징병”이었지만, 새로운 징병제는 “우리의 힘을 모아 우리의 국토를 방위”하는 것이었다.(7) 그러나 병역을 ‘특권’으로 설명하면서 의무 부과에 따르는 권리주장을 차단하는 인식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이와 같은 병역인식 속에서 사적 제재 역시 잔존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중 한미 간의 조정
“일제의 잔재”가 한국군의 습속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한국전쟁 중에 한국군의 병영문화를 추인했던 미국의 역할도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은 고착되었다. 핵전쟁의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미국과 소련은 전면전 대신에 지구전을 선택했다.(8) 미국은 계속되는 중국 지원군의 남하로 완전한 승리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정전전략을 세웠다.(9) 또한 한국의 육군을 장기적으로 20~30만 명 정도의 규모로 증강하려는 논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10) 1951년 2월 미국 국무부는 ‘한국에 대한 행동지침(outline of action regarding Korea)’을 제출하여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동안 한국군을 훈련시켜 미군을 대체하는 휴전전략을 제안했다.(11) 장기적으로 미군의 지상군 병력의 대부분을 증강된 한국군이 대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특히 1952년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국 군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국군으로 교체하겠다던 아이젠하워의 공약은 미국 시민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한국군 장교 훈련은 주한미군사고문단이 담당하여 진행하였다. 미군식의 효율성과 규율을 요구했던 훈련은 부하들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며 구타와 즉결 처분을 필요악으로 여기던 한국군 장교들의 관행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자국의 군대를 한국군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미국의 국방당국은 이러한 관행을 “한국인의 방식”으로 용인하면서 훈련을 지속해나갔다. 훈련을 맡은 미군 고문관들은 한국군이 미군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병영문화는 한국군 장교들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일제의 잔재”가 미국의 출구전략에 의해 한국군의 공식적인 전통으로 인정된 것이다.
개인을 쥐어짜 권력을 보호하라?
한국군의 비민주적인 병영문화는 일본군의 정신주의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일본군의 정신주의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자 개개인에게 극단적인 획일성을 강요했던 국가의 생존전략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잔재”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고유의 병역인식으로 전유되면서 해방 후에도 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의 출구전략이 필요했던 미국에 의해 비민주적인 병영문화는 한국인의 방식으로 공인되어 버렸다. 결국 사적 제재, 상명하복의 군기, ‘하면 된다’는 식의 정신주의는 군사정부를 거치며 더욱 만연하게 되었다.
미셸 푸코는 신체형을 피하는 것이 구체제의 과시적 폭력과 다른 근대적 규율권력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푸코의 설명이 무색하게도 한국군의 병영문화는 일상적인 신체형을 통해 군기를 잡아왔다. 신체형을 통한 규율화는 군사적인 필요성에 따른 급속한 근대화가 남긴 결과물이었다. 천황의 국가를 제국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공산주의로부터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동아시아 질서 구상을 위해, 징병 대상자 개개인은 입대와 동시에 고유한 얼굴을 지워야만 했다. 규격에 맞는 병사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를 향해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폭력도 필요악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폭력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 정당해졌다.
그러나 ‘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행해지던 폭력을 감내해야만 했던 입대자들은 무수히 죽어나갔다. 전두환 정권 동안 구타 등의 이유로 6,39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87년 이후에도 매년 200~300명이 죽임을 당했다.(13) 민주화 이후에도 군대 내 구타로 인한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국방부는 1993년 <구타 및 가혹행위 근절 지침> 훈령을 제정했다. 또한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최전방 초소에서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하자 민·관·군이 참여하는 ‘병영문화개선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당시 사병 간의 명령을 금지하는 등 사적 제재를 근절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후임병이 잘못하면 선임병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명령만을 금지하면서 사병 간의 갈등만 더욱 커졌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북한의 침략으로 ‘적화통일’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전쟁이 난다면 북한의 위협적인 재래식 무기는 남한의 최첨단 무기들과 함께 한반도를 공멸로 이끌고 말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보다 훨씬 현실성이 높은 쪽은 한국이 시나브로 북한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청바지와 코카콜라가 소련의 체제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켰다면, 한국군의 획일성에 대한 강박은 자유민주주의를 밑동부터 갉아먹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생존을 위해 때려서라도 개개인을 쥐어짜도 된다는 믿음, 권리주장을 애초에 봉쇄하는 ‘특권’으로서의 병역인식이야말로 시급히 청산해야 할 ‘적폐’일 것이다.
글·백승덕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 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상)>, 제이엔씨, 2013년, 110~112쪽
(2) 후지와라 아키라, 위의 책, 169~171쪽
(3) 요시다 유타카, <일본의 군대>, 논형, 2005년, 109쪽
(4) <매일신보>, 1942년 5월 12일
(5) 채근식, ‘병역법논설’, <국회보>1, 1949년, 136쪽
(6) <동아일보>, 1949년 11월 6일; <동아일보>, 1949년 11월 25일
(7) <동아일보>, 1949년 11월 25일
(8) 존 루이스 개디스,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사회평론>, 2002년, 190~193쪽;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창비, 407~413쪽
(9) “Notes Prepared for the Secretary of State by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1950. 12. 1), FRUS 1950 vol.Ⅶ, pp.1281~1282
(10)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란1년>, 1951년, C166~167쪽
(11) “Menmorandum by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1951. 2. 11), FRUS 1951 vol.Ⅶ, pp.165~167
(12) 그렉 브라진스키, 나종남 역,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07년, 149쪽
(13) 김종대, ‘일제 군사문화가 초래한 악몽, 병영 내 총기 난사 사건’, <민족 21> 125, 2011년,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