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공허함은 현실성 부족 탓

2014-09-30     김수현

바디우와 지젝에 대한 환호성, 그리고 최근의 피케티 열풍에 이르기까지. 좌파 지식인들의 사유가 마치 메시아적 메시지처럼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진다. 아마도 지난달에 <21세기의 자본>을 들고 나타나,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지적 타격을 가한 피케티 역시 머잖아 잊혀질 게 분명하다.

애초부터 사변적 좌익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 역시 공허한 사변주의자들이고, 그들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우리 역시 실천성이 부재한 사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 있어 부족한 것은 실천적 현실성일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 브루노 보스틸스는 ‘현실성’이란 말 없는 단순한 사실과 구별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현실성’이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현실 아래에서 현실화되려는 가능성, 혹은 현실을 형성하려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또한 저자는 사유를 통한 이론과 거리에서의 실천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될 때에만 현실성은 존재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로망스어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코넬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좌파적 사상과 그 역사적 맥락에 무지한 여느 미국 학자들과는 달리,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의 부활을 이끄는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론가들의 새로운 사유에 관심이 많다.

그에 따르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언급한, 당시 프롤레타리아들이 처한 사실은 “살이 곪아 터지고, 과로에 지치고, 폐병에 걸리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사람들의 무리”였다. 이 사람들을 눈앞에서 바라볼 때, 관념적 유물론자는 “고차원의 지각 작용 속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공산주의를 지평에 놓고 사유하는 사람들은 “산업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변혁해야 할 필요성과 조건을 발견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변혁은 “살이 곪아 터지고, 과로에 지치고, 폐병에 걸리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추악한 현실을 무시하지도 뛰어넘지도 않고 마주하되, 그 단순한 사실 다음에 올 것에 대해 그 필연성과 조건을 사유하는 일을 건너뛰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어떤 것이다.

공산주의는 현실의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반대로 오늘날 우리의 추악하고 말없는 사실 가운데 깃든 현실성이야말로, 철저한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 깃든 현실성이야말로 공산주의일 수 있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의 현실성>을 읽다보면,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일반적인 패배주의와 당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제한적 문화운동을 넘어서 다시 한 번 우리 사회에 깃든 현실성에 대해 멈춰 사유하게 된다. 보스틸스에 따르면 우리가 공산주의에 대해 사회주의와는 구별되는 “투쟁과 욕망, 그리고 충동의 집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의 목표는 열정과 배신 사이를 오가는 의회민주주의 좌파를 뛰어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좌파가 처한 의회민주주의적 숙명을 뛰어넘으려는 이 투쟁과 욕망과 충동의 집합이 모든 사회적 질문을 피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한,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는 종종 다른 종류의 좌익주의, 이른바 ‘사변적 좌익주의’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이 좌익주의에서 사변적인 것이란 옛날의 소박한 관념론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자크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는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의식을 순수하게 이론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태도를 ‘사변적 좌익주의’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보스틸스는 이처럼 사변적 좌익주의를 처음으로 거론하며 비판한 랑시에르와 바디우 등의 사상가들조차, 공산주의라는 문제를 순수하게 이론적인 이데아나 가설로 간주함으로써 사변적 좌익주의의 덫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예를 들어서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고치려고만 들려는 바디우의 시도가 사변으로 빠질 위험에 대해서 보스틸스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이념(Idea)은 특이한 정치적 경험의 역사적 ‘기입’을 보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념을 통해 공산주의의 활력은 철학자의 실행이라는 독점적 권한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만다.”

이 책의 1장, 2장에서 보스틸스는 이들의 이론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좌파 사상에 두드러진 철학적‧존재론적 편향(혹은 귀환)이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갖고 있는지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실행의 의미는 단순한 것이 될 수 없다. 브루노 보스틸스는 이 책의 4장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의 실행과 관련한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 사이의 대립을 철학자와 정신분석가의 논쟁으로 그려내면서, 두 사람 중 지젝의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사용하는 ‘진정한 실행’이라는 말에 담긴 여러 겹의 억양을 동시에 검토하고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볼 때, 철학자 바디우의 바보 같은 착각은 진리의 위력을 사랑하는 일에 있으며, 반면 분석가 라캉의 담론에서는 실재가 참인 것(진리)보다 강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성이 담보된 좌파는 어디에 있는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보스틸스는 현재 공산주의의 지평이 실행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라틴 아메리카 볼리비아의 정치와 이 정치를 보장하고 실행하는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가르시아 리네라를 소개한다.

현재 볼리비아의 부통령인 알바로 가르씨아 리네라는 우리가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 같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9월호 참조). 보스틸스의 평가처럼,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로서의 자기 과거와 연결된 모든 것들을 존재하지 않았거나 사멸해 버린 것으로 부인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실제로 과거의 유산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 양 옹호한다.

보스틸스의 평가대로라면, 지젝 역시 사변적 좌익주의로 지적당할 만하지만, 이 책에 대해 의미있는 평가를 내놓았다. 지젝다운 발언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자신의 무덤을 또 한 번 박차고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결국 무엇이 될 것인가? 보스틸스는 오늘날의 좌파 사상가들과 비판적 대화를 나누면서, 또한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부 같은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과 비판적으로 교감하면서, 어떤 신기루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이 문제와 맞닥뜨린다. 현대의 좌파에게 무엇이 남아있는가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아름답게 쓰인 작품이다.”

 

글‧김수현

파리8대학에서 정치사상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유럽정치사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