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그룹 디거, 로큰롤 해커
앙드레 브르통이 “저항에 관해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조상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1)고 말했을 때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들, 분노하는 사람들,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은 꿈이 너무 아름답거나 분노가 너무 강할 경우, 온 마음을 작품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정에 전염되거나 반대로 자신의 방식이나 문제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현대 영광의 30년 동안 반문화의 꽃이 피었지만, 이전 영광의 30년(1830년)과 달리 이 반문화가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60년대 중반쯤 미국에서는 소비 사회가 꽃피었고, 젊은 층이 사회 주역이 되었으며, 미군이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하는 베트남전이 일어났다. 1965년 2월에 말콤X가 암살되었다. 5월에는 학생들이 징집 카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8월에는 LA의 흑인 동네인 왓츠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 어느 화학자가 환각제 LSD를 발명했다. 이처럼 긴장과 기대가 어우러진 분위기 속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히피그룹 ‘디거’가 나타나게 되었다.
디거는 샌프란시스코 마임극단이 이끈 운동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마임극단은 정치적 연극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 게릴라 연극은 이름에 걸맞게 지나치게 마르크스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입장을 표현하기도 했다. 해이트 애시버리 거리를 발상지로 두는 디거는 올리버 크롬웰이 통치하는 공화국에서 공공 토지를 사유화하는 것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영국인 집단(1649~50년)의 이름에서 따왔다. 에미트 그로건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판 디거는 개인 혁명과 사회 혁명을 조화롭게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며 ‘모든 중요한 활동은 무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잡지, 병원 치료와 법률 상담, 돈 역시 무료로 누구나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콘서트, 신문도 무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거 그룹은 잭 케루악, 알렌 진스버그가 이끈 ‘비트’ 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요구사항을 지지하고 도시에서 사치스러운 무질서를 조장하고 자주 체포되며 기부금의 출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디거 그룹은 히피족의 정치 무관심을 경멸하고 신좌파의 폐쇄성을 비판했다. 개인에게 무기력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마약에 반대하지 않고 경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실패의 영광을 지지했다. 한 마디로 자유, 정해지지 않은 것, 즐거운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러한 디거의 움직임도 2년밖에 가지 못했다. 오히려 디거가 성공을 거두며 아이러니컬하게도 해이트 애시버리 거리가 관광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아 있는 디거 지지자들은 연어 보호 같은 환경 보호 운동을 주로 하고 있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번역서로는 <프랑스 엄마처럼>(2014) 등이 있다.
(1) André Breton,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 Gallimard, 파리, 1985년
(2) Alice Gallimard, <디거,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혁명과 반문화>, L'Echappée, 몽트뢰유, 2014년
(3) Emmett Grogan, <Ringolevio>, Gallimard, 1998년
(4) Laster Bangs, <유혈 축제&천박한 취향>, Tristram, 오슈,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