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당신들 모두가 죄인이오"

소비자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마케팅

2009-05-05     마티아스 루 | 언론인

               “기름진 것 먹는 죄로 우리 운동화 신고 뛰라”
               공기업도 시민의 부주의와 무책임만 탓해

  2009년 3월 어느 날 아침, 지하철을 이용하던 파리 시민들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겪는 각종 운행 장애가 바로 자신들의 시민의식 부족 때문임을 파리교통공사(RATP)의 홍보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수백만 지하철 이용객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무수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차량의 노후와 몇몇 노선의 혼잡을 그 원인으로 생각했으며 가끔은 운이 나빴던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글쎄 그게 아니란다! 홍보 게시물은, 반복되는 지하철 운행 지연의 주범은 다름 아닌 피해자 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암시한다. 즉, 문이 닫히는 걸 방해하고, 열차 내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다가 내릴 때가 돼서야 부랴부랴 밀치고 나오는 승객들이 문제란다. 파리교통공사는 이런 불편사항들을 마냥 좌시할 수 없어 캠페인 공세를 펴게 됐고 그 일환으로 차량 내에 스티커까지 붙이게 된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1분 낭비�전 노선의 운행 지연’, ‘미리미리 준비해야 내릴 때 편함’.

 반면 수도권 지역인 일드프랑스 교통노조(Setif)의 예측 및 준비 소홀이나 파리교통공사의 만성적인 투자 부족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벌써 20년 넘도록 시민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공권력의 홍보 방식은 더 이상 놀라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죄책감의 영역이 어찌나 확장되었는지 이제는 시민 각자에게 자신의 행동을 ‘홍보 규범’에 맞춰 스스로 내재화하도록 강요까지 하는 실정이다. 전통적인 죄의식 고취 수법은, 공적 지출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거나 사회적으로 싸워 쟁취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활용돼왔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강력한 심리적 원동력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집단이 뒤따라 등장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 분야 못지않게 경쟁이 치열해진 ‘자선 비즈니스’도 이런 방식으로 인도주의 본연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 잠재적 기부자를 쫓아서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심지어 여가 공간도 마다 않는다. 2007년 1월 영화관에서는 ‘세계의 의사들’ 협회가 만든 공세적인 광고가 상영되었다. 여기에는 (출퇴근·근무 등) 일상에 몰두하는 어느 평범한 서양 남자가 등장한다. 기아에 허덕이는 한 아프리카 어린이의 유령이 그림자처럼 뒤를 쫓자 남자는 기를 쓰고 피한다. 마지막에 삽입된 슬로건(“사람이면 잊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면 행동합니다(즉, 기부금을 낸다는 뜻)”)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구호 수요의 절박성이 아니며, 어차피 관객의 책임과 무관한 그러한 실상의 원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보다는 ‘개발 지원’에 대한 각국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금 마련을 위해 관객의 양심을 불편하게 하는 간단한 수단을 택한 것이다.

 공공 홍보·예방 부문도 이러한 어조를 활용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저녁 8시 이후 공영 텔레비전 방송에서 상업광고가 폐지되면서 시청자의 뇌도 좀 쉴 수 있게 됐다 싶더니 이제 그 휴식의 일부를 대장암 진단, 인터넷의 위험 등에 관한 각종 방송 캠페인들이 앗아가고 있다.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른 도로 교통안전에 관해서도 문제를 범죄와 폭력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예방 메시지들이 수시로 전해진다. 이들 메시지의 기저에 깔린 원칙은 운전을 제대로 하려면 운전대를 잡은 자신을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방영된 어느 텔레비전 캠페인이 보여주듯 이러한 잠재적 범죄자화는 이제 부모들까지 겨냥하고 있다. 인터넷을 배회하며 자녀들을 위협하는 아동 성도착증 환자나 나치주의자들과 얼결에 공모자가 되는 부모들 말이다. 광고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문을 열어주는 주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과 약속이 있다며 찾아온 유쾌한 손님 무리(변태성욕자·매춘부·스킨헤드족…)를 맞아들인 주부는 이들을 자녀 방으로 안내한다. 이때 슬로건이 등장한다. “위험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보호하십시오.”

 기업과 광고 제작자들도 이러한 전략을 질세라 구사하고 있다. 광고에서 제품의 기초 영양 정보를 의무적으로 표시하게 된 식품 업체들은 ‘영양적으로 올바름’에 모든 것을 내걸고 있다. 아이들에게 온갖 식품을 꾸역꾸역 먹게 한 업체들이 이제 부모들을 훈계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다논은 소비자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원인이 바로 영양 섭취 불균형임을 고수답게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병 주고 약 주고인 셈이니 다행이다. 어떤 요구르트를 먹으면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이처럼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더 이상 유익성과 쾌적성을 겸비하는 걸 추구하지 않고 양심의 거리낌을 대놓고 활용하고 있다. 한 예로 어느 운동화 광고는 빈 피자 상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어젯밤에 이걸 먹었으니까요.” 소비한 것을 속죄하는 의미로 또 다른 것을 소비하는 셈이다. 기름진 식품을 집요하게 제공하는 이들이야말로 소비자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책임이 있는데도 말이다.

 신문이나 방송 매체들도 여기에 공모해 근심스러운 과학적 연구들을 소개하면서 ‘생활’ 섹션을 확대하고 있다. 물론 그만큼 일간지의 다른 지면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 연구 결과들은 상식적 원칙을 준수할 필요성을 부각시키거나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지난 3월 9일치 <르파리지앵>은 70살 이후에는 낮잠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대수명이 줄어든다는 과학 연구 결과를 장황하게 기사로 다루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다지 참신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다. 은퇴 노인은 낮잠도 마음대로 자면 안 된다는 얘기다.  
 이리하여 딱히 피해자가 없는 경범죄 또는 중죄의 개념이 새로이 탄생했다. 마치 신성모독이나 자살을 그 자체로서 도덕적 잘못 혹은 과오로 인정하던 시대처럼 말이다. 양심 범죄의 자리를 슬그머니 비양심 범죄가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혁신은 앞으로 무지, 무관심, 회피도 범죄로 취급할 것임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각 개인은 책임감 고취라는 허울 아래 자기가 겪는 문제들의 원인 제공자로 자신을 탓하게끔 하는 메시지들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 기본적인 법리 원칙들과 달리, 유죄 추정 원칙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가 한 행위의 영향을 받기만 하면 성립된다.

 언젠가는 비만인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될지 모른다. 이미 정신병자들에 대한 재판은 다시 시작됐다. 이는 중요 법률 개념인 행위의 귀책성이 유죄 인정에서 더 이상 필수 요소가 아님을 보여주는 우려스러운 신호다. 이것이야말로 신중의 원칙을 그릇되게 해석한 결과가 아닐까?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신중의 원칙을 일종의 책임 고취 원칙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대놓고 말하진 않으면서 일차적 책임의 소재 혹은 예방 차원 과실이라는 희한한 개념을 규정하는 이상적인 기회로는, 이러한 원칙을 언급하는 것만 한 게 없다.
 ‘지금, 여기에서’ 식별 가능한 실제적인 피해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세계관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필연적으로 잠재적이며 가상적인 피해자들이 나와줘야 한다. 결국 우리는 무기력 속에서 끊임없이 동원되는 기이하고도 모순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이 어느 스타벅스 매장 입구에서 본 거대한 안내판을 통해 얼마 전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 안내문은, 스타벅스 체인의 수익 중 절반가량이 과테말라 아동을 돕는 의료단체에 전달되며 결과적으로 음료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어린이 하나를 살린다고 주장한다.(1) “동일한 윤리적 절박성이 좌파의 자유주의적 인도주의 담론에도 스며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초마다 여성 한 명이 성폭행을 당한다’, ‘당신이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동안에도 10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 그 기저에 깔린 의도는 바로 우리가 짬을 내어 현실을 숙고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즉, 생각할 시간조차 없으니 당장 행동을 취해야 한다며 다그치는 것이다.”(2)
 
글/마티아스 루 Mathias Roux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지면의 상당 부분을 광고에 할애하는 주간지 <르피가로 매거진> 파리판 2009년 4월 10일치 표지는 “지구를 위해 나무를 심읍시다”라는 제목과 더불어 “한 권 구입=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라는 문구를 싣고 있었다. 수익의 일부는 기부금으로 이브 로셰르 재단에 전달된다.

(2)<리베라시옹>, 2006년5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