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는 죽지 않는다

2014-10-30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자신의 자유주의 정책이 실패했음에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를 단념하지 못하고 있다.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당원과 생태당원 사이에서는 그 같은 고집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불안감이 점차 고조되는 상황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좌파 진영이 노선을 급선회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최근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들은 대개 한심한 이야기들뿐이고, 자못 위험한 이야기들도 눈에 띈다. 통탄을 금치 못할 이 같은 소식들은 일군의 전문가와 논설위원들의 입을 통해 친절히 전해진다. 그중 가장 ‘해로운’ 이야기는 “필경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고, 좌우파가 서로간의 정치적 대립 관계를 완전히 초월할 것”이라며 짐짓 심각한 어조로 점치는 내용들이 아닐까한다. 그렇다고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극우 세력과 ‘좌‧우파를 초월한’ 극단적인 중도파가 확실히 어떤 면에 있어 유사성을 보이는지, 또 분명히 어떤 면에서 서로 결탁하고 있는지 짚어내고 있지도 않다.

사회당과 좌파의 운명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후자의 경우 ‘프랑스’라는 불멸의 국가 정체성을 내세우며 만장일치적 화합이라는 환상을 쫓고 있고, 전자는 관료적 발상의 굴레에서 ‘포괄적 합의’를 이끌어낼 궁리만 하고 있다. 고집스레 이 ‘만장일치’의 환상을 두둔하던 언론 진영에서 ‘포괄적 합의’를 두둔하던 상대 언론 진영과의 명백한 공통점을 인식하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그러면 일단 “좌파가 죽을 수도 있다”(1)고 예언한 마뉘엘 발스 총리의 말부터 살펴보자. 총리는 ‘암울한’ 예언의 형태로 자신의 ‘음흉한’ 계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나, 그가 이 같은 발언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개 납득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망연자실한 몇몇 지식인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쳐줄 때면 그의 예언에 더더욱 무게가 실리는 듯하다. 레지스 드브레만 하더라도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좌파는 이미 죽었다. 현재 살아남은 좌파 세력은 오기로 버티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저 좌파 시늉만 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다른 일에 신경을 써보는 건 어떤가?”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하나는 일반적인 정치적 범주로서의 좌파를, 보잘 것 없는 좌파 정당과 혼동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레지스 드브레의 문장을 재구성하여 표현하자면) 당신이 좌파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경우 우파가 당신에게 신경을 쓰게 되리라는 점이다.

좌파가 이렇듯 암묵적으로 ‘사회당’ 정도에 국한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잖이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제 우파적 성향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보이는 사회당이라면 물론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사회당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당의 운명과 좌파의 운명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둘은 일단 서로 신분 자체가 다르다. 좌파는 하나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에 좌파의 수명은 사회당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구현하는 이념, 그것이 바로 좌파라는 이념이다. 그러한 사상이 한물 간 생각이라는 점을 납득할 수 있으려면 두 눈이 멀었거나 정신이 마비되었거나, 아니면 완전한 자포자기 상태여야 한다. 좌파라는 이념은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사실 그 같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다시 말해 좌파는 우리의 경제적 현실 속으로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와야 한다.

좌우파의 존재 부정에 맞서 그 경계를 재정립하려면 우선 좌파가 의미하는 바를 다시금 확실히 정의하여 오늘날의 좌파가 세계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속해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이 같은 맥락은 한 마디로 꽤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즉, 이 사회가 사회적 논리로서 뿐만 아니라 이익 집단으로도 인식되는 자본의 무한한 지배하에 놓일 때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이 모든 걸 장악하고자 하는 이유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프로세스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 같은 자본의 축적은 그 끝을 모른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자본이라는 개념 안에서는 그 어떤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자본에 경계선을 그어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닌 그 외부에 있다는 뜻이다. 절제와 고갈의 개념으로 자본의 무한성에 제약을 걸든지, 아니면 정치적 대척점을 만들어 자본에 맞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축적이라는 과정을 통해 탐욕스럽게 세를 확장하느라 여념이 없을 테고, 강도로 보나 규모로 보나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괴물 같은 성장을 거듭할 것이다. 끝도 없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여 강도 높은 성장을 추구하는 한편, 그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으로 침범하여 지리적 반경을 넓혀감으로써 규모 있는 성장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아시아에 이어 이번에는 아프리카가 자본의 잠식 대상이 될 수 있고, 나아가 더욱 폭넓은 상업 분야가 자본의 침략을 받을 수 있다.

좌파는 자본의 탐욕스러운 지배를 거부한다

일반 논리로서, 동시에 사회 집단으로서 이해되는 자본은 곧 하나의 권력에 해당한다. 하지만 자본은 무한한 세력 확장을 추구하고자 하며, 자신의 권력을 막아서며 이를 한정짓는 또 다른 권력을 만나지 않는 한, 계속해서 그 세력을 키워간다. 따라서 제대로 자본을 견제해 줄 반대 권력이 없을 경우, 자본은 사회 전체로부터 주기적으로 돈을 뜯어내는 폭군이 되고 만다. 물론 소비와 향락이라는 달콤한 가면을 쓰고 있긴 하나, 그래도 폭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로부터 자연스레 좌파의 개념을 도출해낼 수 있다. 좌파는 자본의 반대 입장에 놓인 하나의 세력이며, 좌파에 속해 있다는 것은 곧 자본과 어느 정도 대척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중점적으로 추구하며 자본이 잠재적으로 전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그 같은 평등과 민주주의 사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의 통치에 거부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좌파에 속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걸 뜻한다.

2007~2008년 경제 위기가 촉발한 일련의 사건들은 은행이나 ‘책임 및 연대 협약’(*), 실업 보험 분야 등 여러 단위에서 나타난 이 같은 문제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본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완전히 이를 종속시키려는 자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균형을 맞추어주는 세력이 바로 좌파이다.

2009년, 은행들에 대한 구제가 이뤄졌을 때 이에 대한 비난이 제아무리 정당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비난의 초점이 제대로 맞춰진 건 아니었다. 문제는 파렴치한 은행들을 구제해주었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은행들에게 최소한의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이들을 구제해주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앞으로도 또 다시 그렇게 크고 작은 밀거래를 할 수 있도록 은행에 백지 서명을 해준 셈이다. 우리 스스로가 무너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은행을 구제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는 은행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은행이 총체적으로 무너져버리면 지불 상환 체계뿐만 아니라 신용 체계도 모두 타격을 입게 된다. 공적 화폐 보유고도 증발해버리면서 불과 며칠 만에 생산 및 교역 체계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경제적으로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단순히 은행을 구제하는 수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은행을 수렁에서 건져내고 아울러 우리도 이 나락에서 빠져나온 뒤, 우리는 은행이 다시금 우리를 그 나락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갈 수 없도록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즉, 은행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 구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므로 은행이 폭주할 경우 그에 따른 비용을 치러주든지, 아니면 은행과 함께 죽든지밖에 대안이 없다는 점을 분석하고 나면 이에 따라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이 같은 상황을 우리 모두가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으로 정의할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구조에 따른 끔찍한 영향을 인지한 좌파가 즉각 이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결론짓고 이에 대처하는 것이다.

금융권에 볼모로 잡힐 가능성을 배제해야

사실 지금과 같은 은행 및 금융권의 지형에서는 이 사회 전체가 볼모로 잡혀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경제가 굴러가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민간 금융 자본으로부터 끌어오도록 방치해서도 안 되고, 이 사회의 자금 조달 구조를 민간 자본의 그 통제되지 않는 남용적 기질에 내맡겨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2009년 은행을 구제해줄 당시, 우리는 은행을 구제해주는 대신 그에 대한 급부로 은행 구조 전체의 탈(脫)민영화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국유화의 형태로, 이어 그 다음에는 사회화의 형태로 은행 구조를 변경하여 우리가 은행의 볼모로 잡힐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은행의 ‘개혁’과 관련하여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피에르 모스코비치 전 재무장관, 미셸 사팽 현 재무장관이 내놓은 정책에 대해 제대로 된 규명은 이 측면에서의 문제 인식만으로도 충분하다. 프랑스 경제 정책을 주무르는 이 ‘아기돼지 삼형제’는 기껏해야 자리에서 물러나는 정도고, 최악의 경우 금융권과 손을 잡고 한 통속이 되기도 한다(세 사람 모두 통통한 핑크빛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모습 그대로 돼지 저금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끼리끼리 화기애애한 가운데 조금씩 분위기가 해이해져가는 요즘, 자본주의의 기수들을 중심으로 액상 프로방스 지역에서 열린 연례 경제 컨퍼런스 자리에서 마지막 새끼 돼지 한 마리는 금융계가 “우리의 좋은 친구”라는 떡밥을 흘렸다.(2) 사실 그의 기조연설은 끝까지 들어볼 필요도 없다. 그의 생각은 결국 이 같은 단어들의 반복적 나열이 근간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 기능이 마비된 논객들의 무리라고도 규정할 수 있는 이 세 사람은 철도와 우편을 볼모로 한 ‘인질극’을 예정해두고 있으며, 이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책임 및 연대 협약’을 찬양하는 것도, 예의 그 ‘공급형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기업이 살아야 국민이 사는 것이니 기업에 모든 것을 내어주자면서 최소한의 보루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자는 것 아닌가? 인질범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훌륭한 발상인가? 단순히 은행 하나만이 아닌, 간단히 말해 자본 그 자체의 뿌리 깊은 논리로써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그 모든 상황들은 협박이나 최후통첩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늘날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개별적으로 자본에 인질로 잡혀 있다. 오로지 교역으로써만 물질의 재생산이 가능한 분업 노동 경제 구조에서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일단은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은 오로지 급여의 형태로써만 손에 쥘 수 있으므로, 임금제의 본질은 머리에 들이 민 총구나 다름없다.

이런 비유가 극단적으로 보일 만큼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 같은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소비의 환상을 부추기고 내적으로는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부추기면서 자본이 사람들의 고된 삶을 눈속임한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를 망각하게 된다면, 언젠가 자본이 가면을 벗고 ‘해고’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희롱할 때, 노동자들은 갑작스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될 수도 있다.

좌파는 자본의 협박 구조를 손질해야

뿐만 아니라 노동자 전체가 자본에 인질로 잡혀 있기도 하다. 경제 기반 사회에서의 그 입지로 말미암아 자본은 생산을 유발하고 프로젝트를 실시하며 투자를 주도하는 주체가 되었다. 또한 자신의 요구 사항이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 그만둘 것”이라고 선언한 뒤 ‘파업’을 결정할 수 있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자본은 그 지위 덕분에 사회 전체와 이 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으며, 자본과의 이 같은 알력 관계 때문에 사회는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모든 사항에 잠재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다 그만둘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통에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자본이 이 사회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담론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이 자본의 전략적 이동과 개입에 막대한 가능성을 열어준 세계화 시대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분담금을 낮춰주지 않으면 난 그냥 가버릴래”라거나, “노동 시장을 유연하게 해주지 않으면 난 그냥 가버리겠어”라고 하거나, “이 사람들에게는 배당금을, 저 사람들에게는 스톡옵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지불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면 난 그냥 갈래”라고 생떼를 쓰는 것이다.

자본이 자기 맘대로 사회의 번영 조건이나 빈곤화 조건을 정해버리는 상황에서, 사회 전체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실질적으로 쥐고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리는 민간 자본이 그같이 멈출 줄 모르는 위력을 남용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경제에 제동을 걸어가면서까지 그 끝없는 요구 사항을 강요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러한 자본에게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부들이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자본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면 여기에 합리적인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자신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었다고 해서 자본이 제자리로 돌아갈 리 만무하며, 성실하게 본래의 일터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한함이란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자본 역시 이와 같다. 지난 30년간 자본이 얻어낸 것들의 끝없는 리스트가 이를 방증한다. 하물며 역사적 참패를 맞았던 순간에도 자신의 이득을 경이로울 만큼 증대시켰던 게 바로 자본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좌파’라고 불릴 수 있는 무언가의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도 자본은 계속해서 배를 불려갔다.

앞서 언급된 ‘좌파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을 정리해보자면, 좌파라는 건 이 만성적인 협박 상태에 머물러있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자본의 이 같은 협박을 부추기는 구조를 손질하고 사회 내에서 자본의 입지를 한정짓는 것이다. 가령 이러한 차원에서 고려해볼 수 있는 부분은 1- 우선 자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이다. 기업 이전이나 자본의 이동, 본사 이전, 해외 현지로의 접근 등 자본이 전략에 따라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에 제한을 걸어두는 방안이다. 2- 이어 주주들의 총 수익 상한선을 정하는 ‘주주이익 한정 인정제(SLAM)’(3)와 같은 형태로 세금을 부과하여 주주들의 수익을 제한하는 방법이 있다. 3- 또한 현재의 금융 구조에서 탈피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주식 시장을 폐쇄(4)하는 한편 ‘레코뮌(récommune, 재공유)’(5)의 방식을 통해 생산을 지배하며 군림하던 금융 자본의 지위를 강등시키는 것이다. 4- 끝으로 합리적인 보호주의라는 방식도 있다. 그 동안 노동자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양상에서 나타난 무한 경쟁에 제동을 걸어줄 보호주의를 발동시키는 것이다.

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것은 자본이 이 사회에 초래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자본에게 묻는 것을 뜻한다. 자본이 전부 다 외면하고자 했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본에게 지우는 것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생겨난 문제가 아닌, 자본이 하나의 세력으로서 내재적인 성격상 끊임없이 모든 분업 체계를 움직인 것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본이 이룩한 혁신 못지않게 자본에 의해 초래된 파괴와 분란에 대한 책임을 자본에게 묻는 것이다.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이 점에 주목했다. “끊임없이 생산 구조를 뒤흔들고, 모든 사회 계층을 지속적으로 전복시키며, 불안정하고 항구적으로 움직이는 것, 이는 부르주아 시대가 앞선 모든 시대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공산당 선언> 중)

자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폐단은 결코 사전에 대비할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자체의 전형적인 모순이다. 자본의 움직임에 따라 결과적으로 이득이 생긴다고는 해도, 이 같은 이득이 그에 따른 손해를 실시간으로 보전해주지는 않으며, 이 손해는 곧 지체 없이 물질적 피해로 이어진다. 아프리카는 곧 세계화에 진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은 과거에 자신이 유럽에 입혔던 것과 똑같은 손해를 아프리카로부터 입게 될 것이다. CD가 LP를 밀어낸 것과 똑같이 MP가 CD를 밀어내며,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에 밀려난다. 그리고 이제는 스마트폰이 디지털 카메라를 위협한다. 자본주의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끊임없이 동요되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절름거리는 패잔병들의 무리가 한없이 양산된다.

 

자본은 창조한 것만큼이나 파괴를 일삼아

사회 집단으로서의 자본은 분명 자신의 ‘놀음’을 일반 논리로 만들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는 듯하다. 이에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도 ‘창조적 파괴’를 주창하며 자본의 이 같은 놀음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파괴’라는 단어는 등한시한 채 오로지 ‘창조’라는 단어에만 집착하며 자기변명을 부풀린다. 하지만 이제는 저들에게 이 그럴 듯한 표현의 진의를 있는 그대로 일러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즉, 자본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파괴를 일삼으며, 심지어 그 자신이 초래한 폐허 위에서도 끊임없이 창조라는 걸 해낸다는 점을 일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 ‘창조적’ 열정에만 오롯이 전념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에 따른 파괴적 결과는 모르쇠로 일관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평온하게 살아가길 바란다(즉 ‘착취’를 전제하는 것이다).

사리사욕에 눈이 먼 이 지적 장애에 맞서기 위해 ‘연대 및 책임 협약’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방향은 무엇일까? 이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파형 좌파의 조건 없는 비참한 항복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과 결론 도출의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만일 자본이 ‘끊임없이 생산 구조를 뒤흔들고’ 하는 본래적 성격상 꽤 바람직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질서를 계속해서 폐기한다면, 자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놀음’에 투자하는 욕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자본이 ‘창조’ 행위에 따라 초래한 ‘파괴’에 대해 온전히 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실업보험인 상공업 고용조합(UNEDIC)을 고용과 관련한 개별적 사고에 대비한 보험으로 보는 것과, 이 조직을 자본의 놀음에 대한 강제적 보상책으로 설정하는 것은 서로 같지 않다. 전자의 경우, ‘조합’적 성격의 중립화를 통해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 반해, 후자는 자본의 놀음을 한시적으로 받아들여주되, 그에 대한 대가를 덧붙여놓았기 때문이다. 푸조, 알스톰, 프랄리브, 컨티넨탈, 굿이어 등의 대기업들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는 모두 물질적으로 유복한 자본주의자들이 열정적으로 놀음을 벌이고 난 결과였다. 경쟁 놀음, 자본 이동 놀음, 인수 합병 놀음 등 요컨대 스릴 넘치는 리얼 어드벤처 게임이나 전쟁 게임을 방불케 하는 세계화의 광기가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탄생 200년 남짓의 좌파는 아직도 성장 중

자본이 놀음을 즐기는가? 그렇다면 그에 따른 피해의 비용도 자본이 치르는 게 맞다. 이는 끊임없이 자본에 적용해야 할 ‘책임’ 원칙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이 자본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자본이 사회의 존속에 있어 치명적인 필수적 관건들을 자신의 욕구 달성 재료로 삼는다는 점을 우리 사회가 감내해야만 한다면, 사회 또한 상위적 차원에서의 이해관계를 보전해야 할 보호권을 갖는다. 자본의 야욕에 완전히 사로잡히지도 않고, 자본에 의해 종속되지도 않으며, 자본에게 손을 잡혀주는 대신 몇 가지 제한 조건을 부과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같은 제한 조건들이라고 해봐야 지극히 기초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 집단이 전체의 이익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도록 허용 받은 상황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허용해줬다면,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본은 자기가 ‘즐기면서’ 망쳐놓은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실업자와 공연계 비정규직 고용자에 대한 수당 지급, 소득 인하에 대한 보상, 유연화 정책에 대한 배상, 무너진 생활 리듬과 불안정한 삶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자본이 이러한 부분을 도외시하려 할 때면 우리는 자본에게 우리가 어느 정도의 선처를 베풀어 자본이 그렇게 놀 수 있었는지를 깨우쳐주어야 하며, 아울러 군소리 말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일러주어야 한다. 4조 규모에 이르는 세금과 사회보장 분담금을 감면해줄 때가 아니라는 소리다. 더욱 역겨운 것은 ‘연대 및 책임 협약’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놓은 모순적 행태이다. 사실 이는 자본의 무책임을 옹호하는 비열한 반어법이 아니던가?

따라서 진부한 말이긴 해도 좌파란 문제 인식도 하지 않은 채 자본을 그저 하나의 명백한 실체로 받아들여 구석으로 몰아 세금 빗자루로 쓸어버리고 마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좌파의 자본에 대한 관계는 좌파의 특징적 ‘신분’을 규정해주는 것으로서, 하나의 정치적 권력 관계에 해당한다. 자본의 지배에 반대하고 스스로의 통치 주권을 확인하고자 하는 권력으로서의 좌파는 부정 이득을 취하는 자본에 맞서 비자본주의적 성향의 민중이 다스리는 통치 권력을 확보한다.  

우파로 옮겨 붙은 좌파 보충병을 배제하고 있기는 하나, 그래도 좌파에 대한 이 같은 개념은 꽤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개념에 해당한다. 지금 이대로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수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미리 정해두지 않고 있고,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에 대한 -특히 호의적인- 논의의 여지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적 통치권을 확보하는 것은 곧 -오늘날의 현실이 가하는 압박 속에서- 자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자본을 무장 해제시켜 기세를 꺾어놓고, 자본이 총체적으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본 반대진영의 정치적 긴밀도가 중요

이는 자본의 지배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 또 자본주의를 아예 폐지해버리는 것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가령 ‘레코뮌’ 원칙의 일반화나 입법화를 통해, 아니면 공공 부채에 관한 한 디폴트를 무기로 하여 우리는 즉각 은행을 무너뜨려 이들을 초토화시키고 우리 식으로 재편할 수도 있다. 일단은 몰수에 의한 국유화로, 이어 채무를 사회화하는 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6)

남은 건 적절한 지역적 규모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자본에 대한 좌파의 입장을 어느 권역에서 설정할 것인가? 국내적 차원이나 유럽적 차원에서?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차원에서? 자본과의 싸움에서 좌파가 통치 주권을 확보하고 본연의 정의대로 자본에 대항하는 권력으로 나설 수 있으려면, 자본의 절대적 지배에 반대하는 진영의 정치적 긴밀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상호작용이나 토론, 회의, 조직화된 행동들이 긴밀하게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같은 언어 공동체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긴밀한 정치적 논의가 국내적 차원에서 더 활발하게 이뤄지리란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지난 6월, 일드프랑스 지역 임시직 및 공연계 비정규직 노동자 협회는 파리 필하모니 공연장의 공사 현장에 난입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건너 온 불법 체류 노동자들이 분명했다. 극도로 취약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들은 서로 이야기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었고,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함께 힘을 합쳐 투쟁에 나서는 것도 가능할 리 만무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유약한 대중은 전제 군주로 군림하는 사장의 도마 위에 놓인 가련한 먹잇감이다. 사장은 언어권별로 떨어뜨려 놓아야만 자신의 통치가 한결 수월해지리란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현주소다. 하지만 이는 사실 총체적 무능력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례에 더 가깝다.

두세 개 외국어는 기본으로 능통하고 해외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데에 익숙하여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안 세계화주의 간부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활동은 전적으로 가능하고 또 전적으로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일단 국내적 차원에서의 활동과 똑같은 긴밀함을 기대하긴 어렵다. 따라서 파급력도 같지 않을 테고, 똑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할 것이다. 반대로 국내적 차원에서의 활동은 분명 상호 보완을 통한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려 들 것이며, 국경을 초월하여 대항 의식을 더욱 키우고자 할 것이다. 이들은 단지 국내적 차원에만 국한된 ‘하나의’ 좌파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곧 포스트 민족주의의 세계를 구축하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그보다는 ‘다수의’ 좌파 연대를 결성할 가능성이 높다. 각 지역별로 현지에 뿌리를 두되, 상호간의 대화를 간절히 원하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자 하는 좌파가 될 것이다.

‘국내적 차원’을 도외시하고 ‘국제적 차원’만을 부르짖는 것은 ‘대학교수’스러운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이 지닌 특징을 의식하지 못한 이들은 이러한 점에 있어 구체적 행동에 대한 구체적 조건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국내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경멸하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국내에서 이뤄지는 거의 모든 ‘실질적인’ 투쟁, 단순히 공상에 불과한 게 아닌 실질적인 투쟁 모두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환상만을 끊임없이 쫓아간다. 한정되지도 않고 형태도 없는 ‘국제적’이라는 차원의 공간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자본주의 정책은 ‘국가 간(inter/national)’에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이 같은 논란이 얼마나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논란들이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논란의 해법은 항상 실질적인 행동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이념을 위해 주권을 확보하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양식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행동을 통해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다. 주권 운운하는 이유는 특히 자본의 지배와 같은 억압적 지배에 맞서는 상황에서 집단 전체가 한 가지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고 집단 의결권을 갖는 것을 두고 우리는 ‘주권’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좌파와 우파를 프랑스적 문화 안에 녹여낼 수 있으며 둘의 구분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며 정체성에 집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좌파와 우파’를 초월하겠다면서 정작 우파적 행동만을 반복하는 눈먼 경영자 마인드가 아니라면, 또 언론에서처럼 좌파와 좌파 정당을 혼동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짐짓 좌파를 두려워하는 척하면서도 좌파를 죽일 생각밖에 하지 않는 몇몇 ‘정치적 암살범’의 악의적 행위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좌파라는 이념은 죽지 않는다. 사실 좌파의 역사는 고작 2세기밖에 되지 않았으며, 좌파는 아직 성장 중이다. 상황의 흐름을 통해 봐도 좌파가 옳다는 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으며, 오늘날 터져 나오고 있는 대형 스캔들 또한 절대적으로 좌파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미래는 좌파에게 달렸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근저로 <불온 정책: 유럽 통화와 민주 주권>(2014)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 정부는 기업의 사회분담기여금을 줄여주는 대신 기업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한 정부-기업 간 협약(역주)

 

(1) 2014년 7월 14일 사회당 평의회 앞에서 마뉘엘 발스 총리가 한 발언

(2) 2014년 7월 6일, 액상프로방스에서 열린 경제 컨퍼런스 자리에서는 미셸 사팽이 “금융계는 우리의 친구다. 그것도 좋은 친구”라고 주장했다.

(3) ‘고삐 풀린 금융자본에 고삐 채우기-주주이익 한정 인정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2월호

(4) ‘증시 대차대조표, 자본주의에 마이너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2월호

(5) ‘공공의 것’을 뜻하는 단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공화국’을 뜻하는 단어 ‘레퓌블리크(République)’가 파생된 것과 마찬가지로 ‘레코뮌(récommune)’이라는 단어 역시 ‘레스 코무나(res communa)’에서 파생된 조어로, ‘재공유’를 의미한다. 즉 ‘전체에 속한 공동의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집단에 속한 구성원 모두는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가령 생산 공동체인 하나의 ‘기업’ 또한 그 자체로서는 ‘레코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레코뮌’이란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 활동에 도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cf. <넘치는 위기, 파산한 세계의 재건>(Fayard, Paris, 2009)

(6) ‘우리의 충돌 전략’, <불온 정책: 유럽 통화와 민주 주권>, La Malfaçon,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