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와 텔아비브의 이상한 밀월 관계

2014-10-30     이고르 들라노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국제 관계는 불명확한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성되고 있다. 국가 간 전략적 동맹관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각 국가들은 새로운 지정학적 입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동맹국들이 특정 사안으로 대립하는가 하면 적국들이 공동의 이해가 달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동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건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14년 3월 27일, 모스크바의 크림반도 합병을 규탄하기 위해 개최된 유엔 총회에 이스라엘 대표는 불참으로 자리를 빛냈다. 미국에 해를 끼쳐가면서까지, 텔아비브는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반대하는 결의안 투표에 불참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복잡한 관계를 확인시켜줬다. 왜냐하면 양국이 시리아 문제나 이란의 핵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서로 ‘건설적인’ 대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중동 무대에서 포위된 요새로 전락해온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락하는 데 반해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붕괴 직전까지 갔던 2011년의 시리아 사태는 모스크바가 중동 무대로 회귀하는 데 발판이 되었고, 결국 이는 ‘아랍의 봄’ 이후 이 지역의 필연적인 지정학적 재편으로 이어졌다. 중동 국가들뿐만 아니라 텔아비브에서조차도 늑장 대응으로 일관하는 서구식 외교에 대비되는 실용적인 러시아식 외교에 관심을 보였다. 이스라엘은 특히 미국과 힘겨루기에 들어간 러시아의 단호함과 끈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1)

푸틴, “이스라엘은 러시아어권 국가”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긴밀한 경제교류와 ‘인적 교류’를 통해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 구소련 출신의 이스라엘인들이 대략 100만 명이나 되고,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양국을 오가고 있다.(2) 1980년대 후반 이후, 이스라엘 국민의 7분의 1은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이중국적자들이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러시아어권” 국가로 부를 정도다. 러시아 출신의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단독적으로 운영하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의 문화, 정치, 경제에 동화되어 있다. 1898년 키예프에서 태어난 골다 메이어(1969~1974년 이스라엘 총리 역임)를 비롯해 초기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들과 1958년 소련 몰도바의 수도 키시너우에서 태어난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외무장관처럼, 이스라엘 정치 지도층은 줄곧 러시아 이주자 출신이었다.

2008년 9월 양국 간 비자 제도가 폐지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 갈수록 많은 러시아 관광객들이 이스라엘을 찾고 있다. 러시아인 관광객 수는 미국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으며, 이스라엘 경제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2012년, 38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찾았다. 이는 전체 관광객 수의 13.2%(미국 관광객은 전체 20.2%)에 해당했다.(3) 이러한 관계는 상호간 이해를 촉진시키며, 동부 지중해의 중심이자 중동의 관문에 위치한 이스라엘을 ‘러시아어권’ 국가로 만들고 있다.

1991년 1,2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 간 무역규모는 2013년 35억 달러로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이는 2012년 대비 20%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따라서 2009년 경제위기 여파로 추락했던 이들의 교역량 수준이 대부분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2013년 러시아의 대 이스라엘 수출은 2008년도 수준을 회복했다. 러시아의 대 이스라엘 수출이 다시금 20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대 러시아 수출도 지속적으로 상승해 거의 15억 달러에 달한다.(4) 한편 이스라엘은 러시아로부터 주로 다이아몬드 원석과 석탄(이스라엘 총 수입량의 46.5%에 해당)을 수입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농산물(16%)을 비롯한 전자제품(10%)과 의료기기(8.5%) 등을 고루 균형 있게 수입하고 있다.

양국 관계를 진일보시키길 희망하는 이스라엘과 러시아는 2013년 12월 발리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담 때, 두 정상이 별도로 만나 자유무역지역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2014년 3월 이후, 한 싱크탱크는 이스라엘과 러시아-벨로루시-카자흐스탄 관세 동맹 간의 자유무역지역 설립 협약에 대한 실현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증대되는 러시아-이스라엘 경제협력

모스크바와 텔아비브는 드론(무인비행기) 부분에서 다양한 군사기술 협력을 성사시켰다. 러시아는 자국의 뒤쳐진 최첨단 기술부문을 끌어올리길 희망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드론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을 갖춘 국가로 알려져 있다. 2009년 4월, 러시아는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으로부터 12대의 드론 정찰기를 5,300만 달러에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이어 2010년 10월, IAI는 다시 러시아 방산기업 오보론프롬과 4억 달러의 판매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러시아가 3년 동안 드론(Searcher Mk-II와 Bird Eye-400)을 이스라엘로부터 구입하고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 드론 조립공장을 세우겠다는 내용이었다. 2012년, 이 공장은 자신이 첫 생산한 드론을 러시아 군대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부문에서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약 1조4천 억 ㎥의 가스가 매장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되면서 양국 관계가 돈독해졌다. 2010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들만 이스라엘의 가스전 개발에 참여하였지만, 자금 공급원을 다양화하고 싶은 텔아비브는 러시아 국영기업인 가스프롬을 끌어들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이 거대 기업은 자국이 가장 우선시하는 에너지 전략 중 한 축을 세우고, 증대하고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시장에서 주도권을 갖게 됐다. 2013년 2월, 가스프롬의 자회사는 이스라엘의 하이파 연안 타마 가스전에서 추출한 LNG를 20년간 구매하기로 이스라엘의 레반트 LNG 마케팅회사와 단독계약을 맺었다.

물론 모스크바와 시리아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밀월에 지속적인 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리아의 위기는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제휴관계가 건재함을 보여줬다. 이들이 서로 간 입장 차이를 극복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계기도 되었다. 2011년 3월 시리아 사태가 불거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운명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고 점친 미국과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다. 시리아의 붕괴는 이란과 레바논 그리고 이라크와 시리아를 잇는 ‘시아파 벨트’의 파괴로 이어져, 결국 헤즈볼라는 심도 있는 전략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이들의 세력은 레바논에서는 약화될 것이며 테헤란에서도 고립될 것이다. 러시아는 처음부터 시리아를 지지하는 주요 국가 중 하나였다. 어쨌든 시리아의 ‘이라크화’(장기전 돌입)와 예상치 못한 시리아 대통령의 집권 연장은 오히려 이스라엘에 득이 되고 있다.(5)

시리아 대통령 알 아사드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낮지만, 그의 축출문제는 더 이상 양국 간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텔아비브가 이를 지적하고 나서자, 모스크바는 급진적인 단체의 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는 시리아 화학무기의 이동을 감시하고 있다. 게다가 시리아군과 헤즈볼라가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지원받고 있는 지하드 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안보에 득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전투가 시나이 반도 서쪽에 이어 북쪽에서도 치외법권 지역을 새롭게 등장시키는 것을 막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압박하는 러시아 외교 카드

양국 간 무기 공급이라는 까다로운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러시아가 자신을 해칠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임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이스라엘로부터 공급받는 최신식 무기를 시리아와 이란에 팔아넘겨, 이중 일부가 헤즈볼라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다. 사실, 러시아가 시리아에 무기를 판매한다면 그것은 하찮은 돈보다는 워싱턴과 텔아비브를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카드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2009년 모스크바는 시리아에 미그-31E 8대를 5억 달러에 판매하기로 한 2007년 계약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력에 따라 중단했다. 이후 2012년 1월 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모스크바는 또 다시 시리아 정부와 야크-130 36대, 즉 5억 5천 달러 규모에 달하는 전투훈련기 판매 협상에 들어갔다. 2012년 여름 모스크바는 이들 전투기에 대한 판매중지를 발표했지만, 2014년 3월 러시아가 주문받은 전투기의 전달 문제가 또다시 3개국(미국, 러시아, 이스라엘)의 의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요컨대 크렘린은 전략적인 문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시리아와 이란에 대한 무기 공급 방식을 변경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크렘린이 지난 3월 시리아로부터 주문받은 야크-130의 전달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나선 것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5월 25일에 치른 우크라이나 대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모스크바가 텔아비브와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 테헤란과 제휴관계를 맺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란의 핵문제는 러시아와 이스라엘 간의 주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들 양국은 어느 쪽도 이란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러시아는 민간 핵에너지 부문에서 이란과 공조하며, 이를 서방국과의 관계에서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

2010년, 당시 러시아 연방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7년 대략 10억 달러를 받고 해외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던 러시아의 방공 시스템 S-300에 대한 매각을 대통령령으로 취소했다. 크렘린은 또 테헤란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요구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시리아 사태는 이란과 러시아가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2013년 9월, 미국의 이란 공격이 임박한 것처럼 느끼던 시기에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상하이 협력기구 정상회담 때 이란 대통령 하산 로하니와 따로 회동했다. 이들 양국은 만약 미국과 프랑스가 이란을 침공한다면, 이란은 러시아로부터 방공 시스템 S-300을 비롯한 신무기를 조달받고 부쉐르에 두 번째 원자로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6)

이 같은 위협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이스라엘은 러시아와 협상에 돌입했다. 지난 6월 1일, 이들 정부는 양국 간 상시 통화가 가능한 암호화된 핫라인을 개설했다고 발표했다. 이를테면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양국의 주요 현안이 담긴 다양한 문제에 대해 서로 토론할 수 있게 된 셈이다.(7)

텔아비브는 모스크바가 이란 문제에 대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또한 모스크바가 미국과 힘겨루기에서 밀릴 때마다 이란 문제를 운운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알고 있기에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진 초기부터, 이스라엘은 조용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에 개최된 유엔 총회에 이스라엘이 불참했던 것은 자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은 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게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만일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규탄하면 러시아는 그 보복으로 시리아에 대한 무기판매와 이란의 핵무기 문제에 관련해 이스라엘 측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 내 러시아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

한편,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이스라엘의 러시아 공동체가 심하게 분열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계, 벨로루시계, 러시아계, 코카서스계 이스라엘인들 간에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일부는 친(親)유럽 성향을 드러내고 있고, 다른 일부는 키예프에 반유대인주의 성향을 보이는 극우파 활동가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걱정하며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2차 대전 중에 자행된 유대인 학살 프리즘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본다. 그래서 이들이 우크라이나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2012년 6월,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네타냐에 건립된 나치 독일군과 전쟁 중에 사망한 러시아 붉은 군대의 병사들을 기리는 추모비 개막식을 함께 거행하며, 양국이 공동으로 반(反) ‘홀로코스트 부정’ 투쟁을 펼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우크라이나에 부모들이 살고 있는 러시아계 이스라엘인들을 필두로 일부 이스라엘의 러시아 공동체는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공동체의 안전을 우려하고 있다. 이들의 규모는 대략 20만 명에 달하며 주로 키예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는 1만여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는 크림반도를 합병하며 이스라엘 내의 러시아어권의 분열을 가중시켜,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문제 타결이 지체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내의 러시아 공동체의 분열을 볼 때, 네타냐후가 푸틴을 공개적으로 비난해도 얻을 게 전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한다면 네타냐후 반대로 1991년부터(8) 이스라엘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부 러시아계 이스라엘 유권자들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키예프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강조한 미국 심리학자 리버만의 주장은 모스크바와 좋은 관계를 훼손하지 말라는 의지 표명이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긴장감을 이스라엘 사회에 끌어들이는 것을 우려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은 단순한 동맹관계를 넘어 러시아와 다각적인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은 주변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쇠락함에 따라 외교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대안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워싱턴 정부가 추진한 평화 프로세스, 즉 2013년 11월에 체결한 이란 핵 협정,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지지 표명은 미국과 이스라엘 간에 많은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경쟁관계는 텔아비브에겐 즐거운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2013년 9월,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와 미 국무장관 존 케리가 성사시킨 시리아의 화학무기 제거 협약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러시아가 이러한 공조를 재개해 이란의 핵무기 문제도 타결해주길 염원하고 있다.

어쨌거나 시리아 화학무기의 파괴는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한 중동 지역 건설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이에 대해 모스크바와 텔아비브는 다각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2013년 9월 IAEA 연례회의 때, 러시아 대표는 이스라엘이 핵비확산조약(NPT)에 서명하고 자국의 핵시설에 대한 유엔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고 아랍 국가들이 제출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푸틴은 “이스라엘도 언젠가는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포기했듯 핵무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9) 이 같은 푸틴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말해주듯 이스라엘과 러시아는 몇 년 안에 자신들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글‧이고르 들라노에 Igor Delanoë

러시아의 보안 및 국방 문제 전문가, 역사학 박사

번역‧조은섭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Jacques Lévesque, ‘국제무대로 회귀한 러시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1월호

(2) ‘러시아와 이스라엘, 애증의 관계에 대한 도전’, <해외정치>, vol. 78, n° 1, 파리, 2013년 봄호

(3)  <Visitors arrivals by country of citizenship and mode of travel>, Central Bureau of Statistics of Israel, Tel-Aviv, www.cbs.gov.il

(4) 러시아 연방 정부의 통계 서비스 www.gks.ru

(5) Nir Boms et Asaf Hazani, ‘시리아 전쟁에 당황한 이스라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호

(6) Vladimir Radyuhin, <Moscow to sell Iran S-300, build second n-reactor>, The Hindu, New Delhi, 2013년 11월 11일

(7) Pierre Razoux, <이스라엘은 핵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취할까?>, 프랑스 파리 군사학교의 전략 연구소(Irsem), n° 9, 2014년 6월, www.defense.gouv.fr

(8) Cf. <러시아와 이스라엘, 상호 불신과 상호 공조 사이를 오고가는 애증의 관계>, Recherches & Documents, n° 06/2010, 파리, 2010년 7월

(9) Akiva Eldar, <How long will Israel stay off the nuclear hook?>, Al-Monitor.com, 2013년 10월 16일

 

<박스기사>

소련, 이스라엘 건국에 인적·물적 지원 제공

미셸 레알 | 역사학자

 

1948년 5월 17일, 소련은 3일 전에 탄생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했다.(1) 시온주의 단체는 이 같은 러시아의 승인을 자신들이 수년간의 노력 끝에 쟁취한 위대한 승리로 간주했다. 이들 양국은 1941년 런던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였지만, 세계시온주의연맹 회장 하임 와이즈만은 런던 주재 소련대사 이반 마이스키를 만나 팔레스타인의 장래에 대해 논의했다. 와이즈만은 유대인 국가건설을 위해 투쟁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파키스탄 유대인 공동체(Yichouv)의 지도자이자 미래 이스라엘의 첫 총리인 다비드 벤구리온이 소련 측과 교류를 이어갔다. 소련 공산주의 단체가 시온주의자들의 계획에 강력 반대하고 나서긴 했지만,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신생국의 탄생이 자국의 이익에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1946년까지 유대인 국가건설에 대한 지지 표명을 보류했다.

전환점은 1947년 5월에 찾아왔다. 1922년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권을 부여 받은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이 유엔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소련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한 젊은 외무부 차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이중국적 문제 타결이 불가능하다면, 소련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는 안을 제안한다고 했다.

이후 1949년까지, 이스라엘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으로부터 정치, 군사, 인구통계학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 후 스탈린은 자국의 정권다툼에 휘말리며 유대인 억압정책을 펼쳤다. 외교무대에서도 소련은 1947년 11월 29일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채택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소련은 또한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두 자원, 인적자원과 무기를 제공했다.

인구통계학적 투쟁은 시온주의 지도자 프로젝트에서 성공을 좌우하는 열쇠였다. 1946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총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0만 명뿐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힘의 역학관계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소련은 이들이 힘의 역학관계를 전환시키는 데(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수를 늘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우선, 소련은 2차 대전 종식 후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전쟁난민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냈다. 1946년에는 소련은 폴란드계 유대인 15만 명을 당시 미국이나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독일 지역으로 보내, 이들이 그곳에 흩어져있던 가족들과 조우하게 했다.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난 생존자들은 전쟁이 종식된 이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던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진영을 선택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모스크바가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영국을 당혹스럽게 했다. 런던은 시온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도 강한 압박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2차 대전 난민들의 미국행을 반대하며, 영국 정부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불법 이민자들을 배에 태워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한 것이 자국의 여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노심초사하며 지켜봤다.

1948년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유대인 단체가 동유럽, 특히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추진한 비밀 이민 작전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다. 1946년과 1948년 사이, 팔레스타인에 유입된 유대인의 3분의 2는 이들 두 국가 출신이다.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를 선포한 1948년 5월 15일 이후, 이민 문제는 더욱더 중요해졌다. 이제 이스라엘은 젊은 군대를 채울 신병들이 필요했다.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의 전쟁 준비에 참여할 이주민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1948년과 1951년 사이, 동유럽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만도 30만 명이 넘었다. 이는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유입된 총 이주민의 절반에 해당했다.

또, 모스크바는 다른 측면에서 젊은 유대국가의 인구정책을 지원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추진한 국민 동질화 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정책을 빌미로 아랍계 팔레스타인 70만 명을 이스라엘로부터 추방했다. 런던이 이 문제를 제기하자, 소련은 이스라엘이 이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며 런던을 압박했다. 게다가 소련은 1948년 유엔 총회 때 상정된 팔레스타인 난민의 자국 귀환을 가능케 하는 ‘유엔 결의안 194’에도 반대표를 던졌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소련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부터 시온주의자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1947년 5월 이후, 이스라엘 총리 벤구리온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기 구입이었다. 소련의 압박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는 주요국가가 되었다. 1948년과 1951년 사이, 프라하는 탱크와 전투기를 비롯한 경‧중무기를 이스라엘에 공급해 이스라엘이 군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68년, 벤구리온은 “이 무기들이 이스라엘을 구했다”면서, “이 무기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지원 중 가장 든든한 지원이었다. 만약 이 무기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 달도 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고 높게 평가했다.

이스라엘과 소련이 접촉을 시작한 첫 10년 동안(1941~1951), 이스라엘은 기대 이상으로 소련으로부터 모든 부문에서 지원을 받았다. 물론 미국과 서방국가들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소련은 많은 불화 끝에, 1953년 2월에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외교관계 단절 이후 첫 징후는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이민이 전면 중단되고, 이들 지역에서 반유대인 정서가 득세한 것이었다. 1952년 11월 프라하 재판(이른바 ‘슬란스키 재판’으로 불리는 이 재판에 기소되었던 많은 유대계 체코 정치인들이 숙청되었다-역주)이 열렸다. 1948년,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 장군 사이에 금이 가며,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1951년 11월, 체코 공산당 사무총장 루돌프 슬란스키가 ‘시온 제국주의’를 꾸민 주모자로 몰려 체포되었다. 이 재판에 기소된 14명 중 11명이 유대계 체코인들이었다.

이 사건 이외에도 이른바 ‘흰 가운’ 사건이 터졌다. 1953년 1월 13일, 소련 일간지 <프라우다>는 국제 유대인 조직의 명령에 따라 소련의 정치 지도자들을 암살한 이른바 ‘파괴적인 의사’ 집단을 자신의 지면에 소개했다. 이들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체포된 유대계 인사들 가운데는 스탈린의 오른팔이었던 브야체스라프 몰로토프의 배우자 폴리나 젬추지나, 이스라엘 총리 하임 와이즈만의 누이 마리아 와이즈만, 시온주의 단체와 접촉한 핵심인물로 지목된 전 외교관 이반 마이스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양국은 갈등을 해소하고 소련은 반 유대계 소련인 탄압정책에 종지부를 찍었다. 같은 해 7월, 이들은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고 1947~1949년 사이에 양국이 경험했던 황금기가 다시 도래하진 않았다.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모스크바는 이집트와 아랍동맹을 지지하며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들의 단절된 외교관계는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몇 주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다시 복원되었다.

글‧미셸 레알 Michel Réal

역사학자

번역‧조은섭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cf. Laurent Rucker, <1948년부터 1953년까지의 스탈린, 이스라엘, 유대인들 간의 관계>,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PUF), 파리,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