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공간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2014-10-30     올리비에 피로네

 

나블루스에 도착하자 자동차 타이어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붙은 고무타이어에서 피어나는 검은 연기 소용돌이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돌들 때문에 합승택시 운전사들은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인 수십 명이 이틀 전에 발생한 알라 아와드 살해에 항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셰바브’(‘젊은이’라는 뜻)로 불리는 청년들이었다. 30세 상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아와드는 자타라 검문소(1) -나블루스를 에워싸고 있는 유대인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나블루스 주변에 설치한 작은 보루들 중 하나- 앞을 걸어가다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살해됐다. 아와드는 휴대폰이 들어있는 택배를 수거하러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우리 가이드가 데려온 운전기사는 “이스라엘군 말로는 그가 군인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군인들이 대응 사격 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라며, “그들은 자기들이 편한 대로 말한다. 언제나 그렇다”고 통렬히 비난했다.

시위대로부터 몇 백 미터 거리에 주차된 철갑지프 안에서 날아오는 돌들을 피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은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으며 빈정거리는 눈빛으로 시위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루탄 세례가 이어지면 시위대는 흩어지곤 했다.

그들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셰바브’ 중 일부는 발라타 난민촌 출신이다. 우리는 발라타 난민촌 책임자 중 한 명인 파예즈 아라파트를 만났다. 아홉 아이의 아버지인 이 50대 남성은 야파 문화센터를 이끌고 있다. 야파 문화센터의 목표는 “난민촌 내 청소년들에게 사회적, 교육적,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향권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텔아비브 인근의 야파 지역에서 추방된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0년에 건설된 발라타 난민촌은 요르단 강 서안지구의 경계가 되는 행정구역인 A구역, 즉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는 구역에 위치해 있지만 이스라엘 군은 오슬로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제멋대로 작전을 벌이곤 한다. 발라타 난민촌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압축해 놓은 곳이다. 빈곤(주민의 55%), 실업(53%, 그중 65%가 교육받은 청년층)뿐만 아니라 비좁은 공간과 비위생 문제는 거의 모든 가정이 겪는 문제다. 1km2당 약 28,000명의 주민(그중 60%는 25세 이하)이 밀집해 살고 있어 인구밀도로 보면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 가장 높다. 대부분 먼지투성이인 골목길-어떤 골목길은 폭이 겨우 몇 십 센티미터인 것도 있다-을 따라 층층이 올려 쌓은 비좁은 콘크리트 건물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햇빛도 간신히 새어들 뿐이다.

이곳은 1976년 점령에 대항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스라엘에 의해 ‘테러리스트의 보루’로 규정되고 특별 감시 대상이 되면서 최근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여러 차례 수감된 경험이 있는 아라파트는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인의 반(反)이스라엘 독립투쟁) 이후 대략 400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한다. 난민촌 출신 300여 명이 현재 이스라엘에 투옥돼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스라엘군은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나 정치활동으로 수배된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혹은 유수프의 능 근처라는 이유로 이 구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발라타에 쳐들어온다. 유수프의 능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이 똑같이 숭배하는 왕릉이다.

 

“우리는 분출 직전의 화산과 같다”

아라파트는 점령군과 정착민 사이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주민들이 ‘탈진’ 상태에 처해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가 기댈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 이스라엘인들이 가택을 수색하고 정치투사를 생포하러 들이닥칠 때면 우리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곳에는 아직도 무기가 있지만 사람들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경찰은 나블루스 주변에 많이 있는 가장 공격적인 정착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1993년 마련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치안협정 때문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경찰은 유사시 정착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고 이스라엘 행정당국에 일임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잠정적 위험’이 되는 팔레스타인 전사를 적발, 체포하는 데 협력해야 한다. 이들은 주로 이슬람 단체인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에 속해 있거나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의 당인 파타당 분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아라파트는 “점령군과 정착민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치안군 역시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왜 사람들이 분노를 터트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출 직전의 화산과 같다. 우리들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술타’(아랍어로 ‘정부’라는 뜻) 책임자들 역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이었다.

베들레햄에 있는 아이다 난민촌의 상황도 마찬가지 불만이 퍼져있다. 700m2의 고립공간인 이 난민촌은 이스라엘이 건설한 분리장벽이 둘러쳐져 있다. 마을을 옥죄고 있는 장벽의 높이는 때로 8m에 달하기도 한다. 약 6천 명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고, 그들 중 반 이상이 25세 이하다. 아이다 난민촌 난민센터 활동 진행자이며, 23년의 수감생활 끝에 2013년 석방된 팔레스타인 투사의 막내 동생이기도 한 니달 알-아즈라크는 “몇 십 년 전부터 장기 수감돼 있는 포로들 수는 계산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 청년 150명-그중에는 13세 소년도 있다-이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돼 있다. 수많은 정치지도자와 저항운동가 역시 제2차 인티파다 동안 체포됐다”고 알려주었다. 알-아즈라크는 난민촌을 감시하는 이스라엘군 망루를 ‘셰바브’들이 불태우자 이스라엘군이 “매일 이곳에서 야간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센터 소장인 살라 아자마는 몇 달 전에 이스라엘 점령당국이 오슬로 협정을 무시한 채 “A구역에 있는 아이다 난민촌을 점령군이 전적으로 통제하는 C구역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고 그 주변 구역을 ‘폐쇄 군사구역’으로 결정했다”고 전해주었다. 팔레스타인 경찰은 더 이상 그곳에 들어갈 권리도, 주변을 순찰할 권리도 없다. 14세에 수감된 경험이 있는 아자마에 따르면, 최근 팔레스타인 경찰이 수많은 반대파들을 체포하면서 -때로는 “이스라엘인이 명령한 대로”- 관계가 악화된 까닭에 경찰이 난민들의 적대감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경찰이 이스라엘 점령자의 의지를 따르고 심지어 우리에게 위협이 되기조차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2013년 초에는 주민들이 난민촌 내의 경찰초소를 부수고 경찰들을 쫓아냈다. 아자마는 “우리는 오직 팔레스타인 깃발 아래에서 봉사하는 사람만이 이스라엘 군인과 차별화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격한 어조로 항변했다.

이런 비판은 팔레스타인 사회와 파타당을 포함한 주요 정당들의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5월 28일에 평화주의 운동가, 언론인, 이스라엘 사업가들이 라말라에 모였을 때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이 다시 한 번 밝힌 대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경찰과 이스라엘군의 치안협력 중단은 의사일정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치안 협력은 신성하고도 신성한 것이다. 이스라엘과의 의견 일치와 무관하게 앞으로 계속될 것”(2)이라는 그의 말은 파타당 일부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하청업자로 전락한 자치 치안서비스

1993년 오슬로 협정에 포함돼 있는 양자 간 치안협력은 1994년 5월 카이로에서 협정이 서명된 후(오슬로1) 발효됐다. 이 협력은 팔레스타인 군경이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폭력을 부추기는 모든 선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정착촌에 대한 “모든 적대적 행동을 막아야” 하며, 특히 정보교환과 공동작전을 통해 이스라엘군과 “활동을 조정”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2차 인티파다 동안 일시 중단되었다가 압바스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되면서 재개된 이 정책은 살람 파야드 전 총리(2007~2013 재임)의 치안서비스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단계를 맞았다.(3) 다양한 종류의 경찰과 헌병대에 약 3만 명이 속해 있어 수가 지나치게 많았던 -이 비율은 주민 80명당 경찰 1명꼴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 중 하나(프랑스의 경우 주민 350명당 1명)- 치안서비스는 미국의 감독 하에 완전히 개조되어 특수부대가 창설되고 현대적 차량과 첨단 설비, 고도의 정밀무기가 보급됐다.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는(4) 치안서비스 예산은 자치정부 전체 예산-2014년 32억 유로-의 30%를 차지해 교육, 보건, 농업 예산을 합친 액수를 넘어선다.(5) 팔레스타인 사회학자 스베이는 “치안서비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핵심 축”이며 “오슬로 협정은 치안서비스를 이스라엘 점령의 하청업자로 변모시켰다”고 설명했다. 사실 그것이 여러 목표들 중 하나가 아니었겠는가? 1993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일부 치안 임무를 팔레스타인에 이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며, 이스라엘군 스스로 그 임무를 수행해도 되지 않게”(6) 해줄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치안협력 조치에 대해 사이드 아부 알리 팔레스타인 전 내무장관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널찍한 장관사무실에서 두 명의 자문위원과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온후한 모습의 그는 “협력 정책은 양측 모두에게 성공”이라고 단언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의 질서 재정립 노력으로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어느 정도 안정이 보장되고 테러와 과격주의가 억제될 수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와 이스라엘의 협력을 비난하거나 세계 2차대전 당시 비시 정부의 ‘대독협력’으로 단죄하지만 절대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고, 치안은 기본 지주 중 하나다.” ‘안정’과 ‘치안’은 상대적인 것이다. 2013년에만 4천여 회의 이스라엘군 개입으로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 4,6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체포됐다. 그리고 30여 명은 사살됐다. 같은 해 이스라엘 정착민이 저지른 폭력행위(319건의 사고)는 2012년에 비해 8% 증가한 것으로 1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부상자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농민들이었다.(7) 한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경찰은 주기적으로 비리와 권력남용으로 비난받고 있으며 정적들을 임의적으로 구금하고 있다(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이끄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치안당국과 함께 수백여 차례의 공동작전을 펼쳤다.(8) 라말라의 비르제이트대 아바헤르 엘 사카 사회학 교수는 “미래의 국가라는 이름으로 우리 지도자들이 정당화하고 있는 이 정책은 사실 자치정부가 재정적으로 예속돼 있는 ‘국제사회’에 증거를 제출하고 팔레스타인 영토 내에서의 모든 소요를 막기 위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하지만 이 정책은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감만 더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팔레스타인의 사회상황은 진정되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2011년과 2012년에 특히 정부의 경제정책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IMF와 세계은행, 기부국들의 지원을 받아 파야드 전 총리가 2007년 도입한 자유화 개혁으로 이 작은 영토의 경제 전체는 민간분야의 위협에 처하게 됐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야드 전 총리는 ‘충격요법’을 시행했다. 공무원 일자리 4만 개 철폐(현재는 15만 개로 추정), 사회복지예산 삭감, 월급 삭감, 사회보장제도 재조정, 은행분야 개혁 등의 조치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일자리를 없애 버렸으며, 급격한 생활비 상승을 초래했다.

2000년대 말의 비약적 발전(2008년 7% 성장, 2013년 1.5% 성장)은 외국의 지원에 힘입은 것으로 -자치정부 예산의 반이 외국 지원으로 충당– 기실 눈속임에 불과했다. 서구 전문가들이 찬양했던 ‘팔레스타인 호랑이’의 ‘경기번영’은 출자자들의 기여가 끊기자마자 2010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실업률은 가파르게 상승했고(자료에 따르면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는 20~30%, 가자지구에서는 40% 이상), 주민의 4분의 1 가까이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요르단 강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의 20%가 하루 1.5유로 이하로 생활). 반면 최상위층의 소득은 2007~2010년 사이 10% 증가했다.(9) 엘 사카 교수는 “팔레스타인 경제의 대부분이 명문가와 신흥부자 손 안에 집중돼 있다. 그들은 대부분 권력과 결탁돼 있고 인맥을 이용한다. 전화, 건설, 에너지, 식품 등의 분야를 장악하는 기업의 선두에 서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이스라엘 시장과 산업정착촌에 투자한다. 투자의 대가로 그들은 자치정부 관계자들과 마찬가지 자격으로 검문소 우선 통행 등 이스라엘이 부여하는 특혜를 받는다”고 꼬집었다.(10) 특히 라말라에는 번쩍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도심을 돌아다니는 ‘VIP’들이 난민촌에서 멀리 떨어진 고급 구역에 살고 있다.

군사, 경제 이중 점령에 종속된 현실

무엇보다도, 요르단 강 서안지구의 경제발전은 점령, 분리장벽,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소구역으로 나누는 바리케이드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의 경제적·재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의정서(1994년)의 범위 내에서 팔레스타인의 무역 역시 장악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공산품의 70%를 이스라엘에서 수입하고 그들 상품의 85%를 수출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자치정부에 귀속되는 관세 또한 압류한다. 협박 또는 보복을 빌미 삼아 마음껏 몰수한다. 스베이는 “우리는 군사적, 경제적, 이중의 점령에 종속돼 있다”면서 “치안정책과 경제압력은 오슬로에서 만들어진 동일한 논리의 두 측면”이라고 한탄했다.

나바 알라시는 베들레햄 데이셰 난민촌에 살고 있다. 시위 도중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으로 친구 한 명이 자신의 품 안에서 죽는 것을 지켜 본 이 30대 남성은 “자치정부와 그들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에 대해 격한 분노를 내비쳤다. “널찍한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나 사륜구동차를 타고 으스대는 라말라의 엘리트와 자본주의자들은 우리를 대변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점령에 저항할 뿐인데, 그들은 우리를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로 취급한다. 우리는 자치정부를 해체시켜야 한다. 쓸데없는 협상을 진행하는 것 말고 그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협상이야말로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그들의 비즈니스다.”

20년 전부터 각종 정상회담, 회의, 토론회, 외교순방이 이어지면서 원칙 선언과 국제 결의안, 장엄한 약속들이 무수히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실제로 효력이 없는 사문(死文)이다. 아자마는 “그들이 우리 땅을 계속 지배하고 있는데 우리의 적과 대화를 계속하고 ‘국제사회’에 보여줄 사진을 찍기 위해 그들 옆에 서서 미소를 짓고 악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무익하고 헛된 협상에서 이스라엘 말고 누가 이득을 본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아이다 난민촌의 알-로와드 사회문화센터의 압델파타 아부스루르 소장은 “우리는 매번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던져주는 부스러기에 만족한다. 마치 점령이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양 독립국가 문제는 최근 토론 메뉴에는 등장도 하지 않는다”면서 씁쓸해 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중재 아래 진행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가장 최근 협상(2013년 7월~2014년 4월)은 이런 관례에서 어긋나지 않았다.(11) 하지만 이스라엘이 점령지 내의 정착촌 건설 중단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압력 행사를 포기한 상황에서 협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파타당의 고위관계자이며 전 협상대표로 평화협정, 특히 치안 관련 협정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기도 한 나빌 샤트는 “미국은 오슬로 협정 이후 그 어떤 합의도 도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정착민의 입장만을 편드는 정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 수반에게 나의 회의적 의견을 전달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왜 협상 테이블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선택이 없다’는 것이었다.” 요르단 강 서안지구의 하마스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최근 이스라엘군에 체포되기 며칠 전 라말라에서 우리와 만난 하산 유세프는 “우리는 협상 재개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이스라엘은 우리를 조종하고 현장에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협상을 이용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인티파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정착촌 건설 지속, 군사점령체제 유지, 협상 실패, 그리고 자치정부의 신용 실추로 제3차 인티파다에 대한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엘 사카 교수는 “인티파다가 단기간 내에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팔레스타인 치안군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시위는 그냥 내버려두지만 전반적인 봉기를 막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둘째, 2014년 6월 파타당과 하마스의 ‘화해’로 연립정부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에는 여러 분파들이 계속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사회를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 전략과 계획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사카 교수는 “현재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보이콧 이스라엘 운동(12)과, 국제형사재판소 등에 제소해 군사 및 정치 책임자들을 재판받게 하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작은 불씨, 촉매가 되는 사건 하나로도 충분히 새로운 인티파다가 출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FPLP 열성활동가로 1989년부터 1993년 사이 여섯 차례나 투옥되었고 현재 가이드와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아만 아부 줄로프는 “우리는 인티파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베들레햄 인근 베이트 사후르에 위치한 그의 집은 같은 행정구역에 위치한 하르 호마 이스라엘 정착촌과 마주보고 있다. 예전에 숲으로 덮여 있던 언덕은 그가 어린 시절 뛰놀던 곳이지만 이제 그곳에 콘크리트 요새 같은 이스라엘 정착촌이 우뚝 솟아있다. 이스라엘은 1997년에 이 구역을 합병한 후 숲을 베어냈다.

예수 탄생을 지켜 본 도시 베들레햄은 순조롭게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20여 개의 정착촌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부 줄로프는 올리브 나무가 늘어 서 있는 계곡을 응시한 채, “그들도 건설하지만, 우리도 건설한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이곳,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우리의 선조들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던 이 땅에 남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는 이 땅을 지킬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투쟁 방식이다”고 다짐했다.

글‧올리비에 피로네 Olivier Pironet

언론인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등이 있다.

 

(1)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는 500개의 이스라엘 검문소와 300개의 정착촌이 있다. 그 총면적은 프랑스의 센에마른(Seine-et-Marne) 도(道) 면적과 같다.

(2) ‘Abbas in firing line over security cooperation with Israel’, <Middle East Eye>, 2014. 7. 10, www.middleeasteye.net

(3) International Crisis Group report, ‘Squaring the circle: Palestinian security reform under occupation’, 2010. 9, www.crisisgroup.org

(4) 2013년에 미국과 유럽연합은 경제안보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각각 3억 3,000만 유로와 4억 6,800만 유로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지원했다. cf. Human Rights Watch, ‘2014년 세계 보고서’, wwwlhrw.org

(5) Tariq Dana, ‘The beginning of the end of Palestinian security coordination with Israel?’, <Jadaliyya>, 2014. 7. 4, www.iol.jadaliyya.com

(6) <Yediot Aharonot>, Tel-Aviv, 1993. 9. 7

(7)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UNOCHA) 보고서, ‘Fragmented lives’, 2014. 3,

www.ochaopt.org

(8) Tariq Dana, 앞의 기사

(9) Adam Hanieh, ‘The Oslo illusion’, <Jacobin Magazine>, New York, n° 10, 2013. 4

(10) 팔레스타인 VIP에 대한 특혜에 관해서는 Roger Heacock, <팔레스타인. 징계 만화경>, CNRS Editions, Paris, 2011, p. 17~19 참조

(11) Alain Gresh, ‘왜 근동의 협상은 항상 실패하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6월호

(12) Julien Salingue, ‘이스라엘 경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6월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먼 이웃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은 팔레스타인에 어떤 희망도 주지 않는다. 리쿠드(이스라엘 중도우파 연합정당)가 주도하고, 두 극우파 정당도 참여한 베냐민 네타냐후 연립정부는 역사상 가장 비타협적인 정부에 속한다. 좌파는 현저히 쇠락해 있고, 극좌파 소리는 들리지도 않으며, 평화 진영은 갈기갈기 갈라져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이스라엘 전문가는 “희망이라곤 없는 상황이다. 우파와 정착민이 승리했다. 비록 내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해도,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 사회는 과격화되어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종교적 시오니즘과 극단적 민족주의 운동이 국가의 모든 결정 기구에 침투했다.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대한 이들의 목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점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정책이다”고 털어놓았다. 유태·아랍어 전자저널 <챌린지>의 분석가인 야코브 벤 에프라트는 “이 정부는 평화협상 실패와 관련하여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 정부는 온갖 풍파를 견디며 혼자 해적질을 한다. 그리고 이 정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미국이 지지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여론은 현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 이스라엘 여론은 팔레스타인 문제보다, 세계적이지만 아주 불평등하게 영향을 미친 금융위기(1)에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은 이스라엘의 건전한 경제 상태를 더 염려한다. 또한 자국 국경(이집트, 레바논, 시리아)에 번지고 있는 긴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스라엘은 최근 국가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지난 6월 세 명의 이스라엘 10대 소년 납치·살해 사건이 발생한 후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 군사작전을 펼쳤고, 2014년 여름 가자지구에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다. 평상시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팔레스타인인과의 분쟁에 무관심하다. 나프탈리 베넷 이스라엘 경제장관의 말처럼, 이스라엘인에게 팔레스타인인은 ‘엉덩이에 박힌 가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2) 예루살렘에 근거지를 둔 평화주의 투사이며 기자인 미셸 바르사우스키는 “점령지 상황은 이스라엘인에게 일종의 습진과 비슷하다. 때때로 가렵고, 불편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점령지 상황은 여전히 질서유지와 내정 문제로 남게 된다”고 설명했다. 몇 백 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게 먼 이웃의 일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1992년 이츠하크 라빈이 가자지구에 대해 소망했던 것처럼, ‘바다 속으로 침몰하지는’(3) 않을 것이다.

 

번역‧김계영

 

(1) Yaël Lerer, ‘이스라엘 거리의 선별적 분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9월호

(2) Shimon Shiffer, ‘Netanyahu versus Bennett : It's a matter of time until the next coalition crisis’, Ynet, 2014. 1. 30.

(3) ‘Rabin expresses his frustration with Palestinian stance in talks’, Jewish Telegraphic Agency, 1992. 9. 4.

 

요르단 강 서안지구 분할

 

오슬로2 협정으로 불리는 1995년 9월 28일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임시협정은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세 구역으로 분할했다.

- A구역(18%)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이다.

- B구역(21%)은 시민의 책임은 팔레스타인인에게 부과되고 치안은 이스라엘이 담당한다.

- C구역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구역이다.

동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인 정착촌은 모두 C구역에 위치해 있다.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A구역과 B구역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