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의 열두 번째 쿠데타
서구 사회는 태국 군부의 쿠데타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받아 들였다. 태국 군부는 지난 5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고서, 이틀 후에 중요 정치책임자들을 억류해버린 뒤 모든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군부는 외면상으로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선거에 패배한 방콕 엘리트들의 편에서 행동하고 있다.
1932년 태국에서 절대 왕정이 폐지된 이후, 군부가 17번의 쿠데타를 일으켜, 12번을 성공시켰다. 군 참모총장 프라윳 찬오차 장군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이틀 후인 2014년 5월 22일 마지막 쿠데타가 일어났다. 지난 7개월 동안 방콕은 ‘옐로우 셔츠’ 시위대의 반정부 데모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노란색은 불교력(佛敎曆)에서 라마 9세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생일인 월요일을 상징하는 색이다. 민주당의 수텝 터억수반 전 부총리가 이끄는 민주주의 개혁 위원회가 조직한 시위대의 목적은 군사 쿠데타와 사법 쿠데타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결국 쿠데타를 한 번 더 하자는 부추김이었다.
그러나 1992년 다수가 중산계층에 속하는 반체제 시위자들이 군부에 의해 통치되는 정부를 규탄하기 위해 방콕의 거리를 점령하고, 푸미폰 국왕이 결국 사태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악순환의 고리가 마침내 끊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 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1998년 ‘국민헌법’이 제정되자, 사람들은 현대 민주주의가 도입될 것으로 기대했다. 헌법조문은 신(新)세습정치 시스템의 과도한 조항들을 삭제하고, 프로그램에 따라 정당들을 창설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2001년 선거에서 대중정당인 ‘타이락타이’(Thai Rak Thai, ‘태국국민이 태국국민을 사랑한다’는 의미)당이 승리하였다. 이 당의 설립자는 ‘아시아의 베를루스코니’라고 할 수 있는 탁신 친나왓이었고, 그는 곧바로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국계 태국 거물 사업가로 전직 경찰 대령이었고, 근거지는 방콕이 아닌 북부의 치앙마이였다. 그의 선거 승리는 대부분 중산층인 ‘옐로우 셔츠’(탁신 반대파)가 인정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태국의 정치 모델은 태국의 정치를 중재하기 위해 설립된 헌법재판소, 선거위원회, 국가 반부패 투쟁위원회 같은 기구들에 대해 먼저 총리가, 그 후 그의 반대파들이 휘두른 당파적 영향력 때문에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이미 세기 초부터 불안정해진 의회 민주주의는 방콕 출신의 경제·군사·관료 엘리트들의 출세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 이 엘리트들은 사회질서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군주제 뒤에 숨어서 집결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2006년의 쿠데타를 위한 무대장치를 준비하여 탁신 정권을 붕괴시켰다. 탁신은 그 당시, ‘대(對)마약 전쟁’이란 이름으로 재판 없이 2천 명을 처형한 심각한 인권유린 사건과 부패혐의로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 재선되었던 시기였다.
유사하면서도 다른 2006년과 2014년 쿠데타
한눈에 보면 2014년 5월의 쿠데타는 2006년의 쿠데타와 비슷하다. 이번에도 역시 군부는 국가 통일의 수호자와 군주제 옹호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양 쿠데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2006년의 쿠데타 가담자 중에는 국왕의 비공식 자문위원회 의장이며 푸미폰 국왕을 대리하는 전직 장군이며 총리였던 프렘 틴수라논다가 끼어 있었다. 지난 5월 쿠데타에서 쿠데타 가담자들은 왕궁의 묵시적인 후원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86세의 국왕과 ‘맥베스 여사’(Lady Macbeth, 권력욕이 강한 여성을 의미)라 불리는 82세의 왕후 시리킷 둘 다 모두 병세가 심각하여, 2년 전부터 어떤 공개 성명도 내지 못했다.
매일매일 군주의 죽음이 예상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2014년의 쿠데타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정권을 급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 목표는 3가지다. 우선적으로 ‘옐로우 셔츠’가 반대하는 탁신이 권좌에 복귀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런 후에 2001년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하나의 정부와 나약한 국가를 만들어, 군부·관료·경영계의 엘리트들이 실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부가 일단 병영으로 되돌아가 자신들이 누릴 특권을 결정하고, 임박한 정권 승계에 대해 자신들의 태도를 드러낼 기회를 주는 것이다.
군부는 1948~1972년 사이에는 계엄령 하에서, 그 후에는 민간 주도 정부 하에서, 항상 군주제를 합법성의 최후 원천으로 생각해 왔다. 군부는 군주제의 이름으로 정국에 개입해 왔다. 푸미폰 왕은 지혜가 넘치고 자비로운 아버지 같은 왕인 ‘다마 라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연구원 던칸 맥카고가 이름 붙인 것처럼, ‘네크워크로 이루어진 군주제’(1)는 표면상 중립성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권력을 갖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한 경제 권력도 갖고 있다. 군주의 부는 대략 300억 달러(약 31조 원)에 달하며, 왕국재산관리국이 그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상당수 사람들이 정신건강 상태를 의심하는 마하 와찌랄롱꼰 왕세자는 평판이 좋지 않다. 그런데 방콕에서 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왕세자가 총리에서 해임된 잉락 친나왓과 망명한 그의 오빠 탁신을 그의 동맹군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군부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자신들이 미래의 군주를 옹호할 수 없는데 어떻게 군주제의 신화를 유지시킬 수 있을지 걱정인 것이다.
국왕의 통치기간이 끝나가는 상황이 최근의 쿠데타 시점을 설명해 준다. 반정부 활동단체들의 관점에서 보면 쿠데타가 객관적으로 불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잉락 친나왓 여사와 8명의 장관들이 5월 6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이미 해임되었다. 그 다음날 ‘국가 반부패 투쟁위원회’는 상원(다수가 야당으로 구성됨)에서 잉락 친나왓 총리를 해임하고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모든 여당 당원들의 피선거권도 마찬가지로 제한될 처지였다. 잉락 전 총리의 지지자들인 ‘레드 셔츠’와 반대파인 ‘옐로우 셔츠’ 사이의 대치가 대부분 저지되었고, 폭력의 수위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탁신에 호의적인 정부(해임 후 나머지 장관들로 구성)가 공석 기간을 대행하고 있었다. 2014년 2월 총선은 야당이 보이콧해서 무효화되었다.
달리 말해 의회 밖의 야당인 ‘옐로우 셔츠’는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헌법 개정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목표를 대부분 달성한 것이었다.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면 정부와 의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앞으로는 선출되지 않고 임명받게 된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의회의 야당 입장에서 볼 때, 민주당이 20년간 한 번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고, 전복된 정부가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이다. 쿠데타는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지방 엘리트와 방콕 엘리트 간에 악화되는 권력 투쟁
여기에 방콕의 정치·경제 엘리트들과 지방의 엘리트들이 전력투구하고 있는 권력 투쟁 문제도 덧붙여진다. 절대군주제가 폐지된 이래, 이 경쟁은 항상 존재해 왔다. 이 경쟁은 관료가 전문화되고, 군부가 여전히 잠재적으로 개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무대에서 사라진 1970~80년대에 격화되었다. 초기에는 왕궁의 동의를 얻어, 군부와 공무원의 지지를 받은 방콕의 기존체제 구성원들이 차례로 편안하게 권력을 분점했다. 나약한 정부가 계속 이어지면서 군부와 동맹을 맺은 관료가 방콕의 재계에 대해서는 가능한 최소한의 규제를 부과하면서, 권력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재계는 규제 축소를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르하른 실파 아르차 전 총리같이 권력기반을 지방에 둔 사업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80년대에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탁신과 그 여동생 잉락은 이런 사회·정치적 과도기의 완벽한 본보기들이다.
결국 도시-시골 간의 대립이 존재하는 정치무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생김에 따라, 2차적 차원의 위기인 사회적 위기가 생겨났다. 방콕의 중산계층이 볼 때, 시골 사람들과 도시에 사는 그들의 가난한 사촌들은,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도 없는 정직하지만 멍청한 ‘얼간이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중산층 사람들이 2006년과 9월과 2014년 5월 두 번에 걸쳐, 정국을 혼란에 빠트렸고, 의회에서 술책을 발휘했다. 이들은 사법부를 도구화함으로써 정식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했다. 2010년 3월 탁신에게 호의적인 ‘레드 셔츠’가 방콕 중심가를 점령하자 당국이 격렬한 진압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대략 90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태국에 드리워지고 있는 내전의 위험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시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는 태국 내에 엄청나게 다양한 계층과 인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부와 북동부의 농민들 외에도 ‘레드 셔츠’의 지지자 상당수가 ‘도시 농민들’이다. 이 국내 이주민들은 방콕 지역에서 별 볼일 없는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의 출신 지역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과 캉통(면에 해당하는 지방행정구역 단위-역주)에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의료서비스에 접근시키고, 사회기반시설을 개발함으로써 탁신이 해방시켜 주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도시 농민들이었다.
탁신의 여동생 잉락 정부는 훨씬 더 급진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이 조치들에는 시장가격보다 40% 더 높은 쌀 수매 보조금, 일당 300바트(약 9,570원-역주)의 최저임금제도도 포함되었다. 피부 색깔이 좀 더 밝은 중부지역의 타이족들에게 경멸을 받고 있는 라오족에 속하는 북동부의 이산 지역 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신봉건주의 사회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2)
지금의 합법성 위기를 이해하려면, 민족-국가를 공고히 하고 현대화하기 위해 몽꿋, 출랄롱꼰, 와찌라우트라는 3명의 군주가 1850년대 중반에서 1920년 사이에 연속적으로 달성한 개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3) 이 군주들은 권력의 중심지인 방콕의 역할을 확대하였고, 국가 공동체에 귀속되는 것을 ‘태국성(thailandité)’의 가치에 찬동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국가 중심에 있는 태국 민족의 관습, 가치,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했다. 표준 태국어를 가르치면서 그리고 역사를 단일한 서술도식으로 요약하면서 효율적인 공적 교육을 통해 다민족 사회를 동질화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 태국의 당시 명칭이었던 시암(Siam)이 남동아시아의 유일한 독립 국가였던 것은 이 세 군주의 사려 깊은 통치력, 시암의 가부장적 사회질서, 시암의 군대 덕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민족주의에는 사회적·민족적 분열이 극복될 수 있었던, 독립전쟁 시에 생겨날 수 있는, 민족국가의 건국 신화가 결여되어 있다. 이 점에서 태국은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와 다르다. 결과적으로 한 국가의 시민이란 정체성이 힘없는 한 왕국의 백성이란 정체성과 대립하면서 합법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되었다. 쿠데타 선동자들과 ‘옐로우 셔츠’는 군주의 권력과 통치권을 합법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반면 ‘레드 셔츠’와 그 지지자들은 합법성의 원천을 선거 과정에서 찾는다.
글·다비드 캉루 David Camroux
국제연구센터(CERI) 연구원
번역·고광식
(1) Duncan McCargo, ‘네트워크로 이뤄진 군주제와 태국의 합법성 위기’, The Pacific Review, 18권, 4호, 2005년 12월
David Camroux & Philip Golub, ‘레드 대 옐로, 방콕의 계급투쟁’, Xavier Monthéard, ‘왕, 국민 그리고 엘리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7월호
(2) Charles Keyes, <그들의 목소리 찾아주기: 북동부 마을 주민들과 태국정부>, 실크웜북스, 치앙마이, 2014년
(3) Marc Askew, <태국의 합법성 위기>, 실크웜북스, 치앙마이, 2010년
Michael Connors, <태국의 민주주의와 국가 정체성> 2판, Nordic Institute of Asian Studies Press, 코펜하겐,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