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탈리아 우파

2014-12-04     라파엘레 라우다니


이탈리아 정치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민주당 당수이며 현 이탈리아 총리인 마테오 렌치는 쫓겨났다고 생각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손잡고 개헌에 동의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동맹군이었던 극우 정치인 지안프랑코 피니는 무대 뒤로 사라졌지만 그의 사상은 이탈리아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라파엘레 라우다니 | 볼로냐대 정치사상사 교수

 

이탈리아 우파는 드디어 2011년 얌전한 옷으로 갈아입기로 결정하고 지난 20년 동안 진행한 변화 프로세스를 마무리 지었다. 변화 프로세스는 움베르토 보시의 북부동맹(Lega Nord), 지안프랑코 피니의 포스트파시스트 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연합한 새로운 당의 출연으로 시작되었고 베를루스코니가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 하지만 결과는 7년형 선고와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영예롭지 못한 퇴진이었다. 이렇게 막이 내린 베를루스코니의 20년은 이탈리아 우파의 양대 축의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안프랑코 피니와 그의 당은 베를루스코니에게서 벗어나면서 그의 유산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 정치에서 사라져야 했다. 부패 스캔들이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유권자들의 외면이었다. 당시 하원의장까지 지냈던 정치인이 ‘중도’를 표방하는 것을 유권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후에 파시스트들이 창당한 이탈리아 사회운동당(MSI, Moviemento Sociale Intaliano)을 어둠 속에서 구해 낸 장본인이 베를루스코니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1공화국(1947~1994)에 파시스트 정당이라는 이유로 활동 금지 당한 사회운동당은 베를루스코니의 등장으로 드디어 정치무대에 발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베를루스코니와 사회운동당 당수 피니의 밀월관계는 유일한 중도우파인 자유국민당(PDL) 창당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자유국민당은 1994년 국민연합(Alleanza Nationale)으로 이름을 바꾸고 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우파의 특징인 반유태, 친아랍 성향을 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안프랑코 피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전진 이탈리아당)와 북부동맹이 포함된 자유진영(Polo delle Libertà)에서 ‘쫓겨난’ 후 미래와 자유당을 만들어 중도 성향의 민주기독당으로 연합했다. 2013년 2월 총선에서 이 중도연합은 몬티 리스트(유럽집행위원이며 전 총리인 마리오 몬티의 이름을 딴 선거연합)로 선거를 치렀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미래와 자유당은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고(2) 피니 자신도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당 대표직에서 사임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미래와 자유당 소속 정치인들은 당 대표와는 달리 이권 때문이었든지, 신념 때문이었든지 베를루스코니와 좀 더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탈리아 형제당(Fratelli d’Italia)을 창당했다. 이탈리아 포스트파시스트 전통에 더 가까웠지만 선거 결과는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다.(3)

북부동맹 역시 사법 스캔들로 타격을 받았다. 특히 당 대표인 움베르토 보시 계파의 주요 정치인들이 이 사건에 많이 연루되었다. 스캔들 이후 북부동맹은 현명하게 지역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지방선거에서 전 내무부 장관인 로베르토 마로니와 새로운 당수인 마테오 살비니의 당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북부의 이익수호, 새로운 이민의 물결로부터 ‘파다니아’(이탈리아 북부를 가리키는 말) 민족 보호, 반유럽 같은 당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시 채택했다. 북부동맹은 북부의 거대 지역인 피에몬테와 베네치아를 잘 관리한 덕분에 당당하게 북부를 대표하는 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부에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서로 뒤를 봐주는 후견(clientelisme) 조직망을 확고히 했다. 그 결과 전국 무대에서는 소외되어 외국인 혐오와 인종 차별 발언을 할 때만 전국적인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표적은 엔리코 레타 정부에서 기회평등 장관을 지낸 아프리카 출신의 세실 키안주였다. 출생지주의 법안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북부동맹의 한 당원이 키안주 장관을 ‘파다니아 민족’의 백인성과 맞지 않는 피부 색깔을 가진 ‘흑인성 장관’이라고 저속하게 불렀다.

 

좌파에 실망한 사람들과 급진 우파의 일부가 오성운동으로 모여들었다

 

전통적인 우파 정당의 위기가 극우파의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극우파는 반등했다. 1994년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시작된 정체성 세탁 프로세스가 끝난 덕분에 이제는 지난 20년 동안의 과거 행적을 제도권에 맞게 포장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2013년 12월 신문의 1면을 장식한 포르코니(forconi, 쇠갈퀴) 운동이 벌인 성공적인 시위가 새로운 극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칠리아의 운송업자들과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칠리아 만종사건 때 프랑스인들을 죽인 것처럼 정치가들을 죽이자’(5)라는 구호를 외쳤다. 포르코니 운동은 사회적으로 상이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정치인들과 세금인상 반대 같은 모호한 주장을 하지만 포르차 누오바(Forza Nuova)나 카사파운드(CasaPound) 같은 네오파시스트 조직의 정치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6)

하지만 세탁 프로세스는 아직 진행 중이고 미래에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통 극우파의 위기로 가장 큰 수혜를 본 사람은 베페 그릴로라는 것이다. 그릴로는 실망한 수많은 좌파 유권자와 꽤 많은 수의 급진우파 유권자를 동시에 끌어들여 오성(五星) 운동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좌우 구분과 거리를 두면서 법 존중, 이민과 EU 트로이카(유럽집행위,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정책 반대, 국가이익 수호 등 우파 고유의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그릴로의 논쟁적인 어조와 반체제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표가 그릴로에게 이동되면서 현 체제가 ‘불안정하지만 안정된’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유럽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기술’ 내각, ‘국가 통합’ 내각이라고 자랑하는 이탈리아 내각은 하락하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그릴로가 주장하는 좌우극단 결합 모델이 장기적으로 극단성을 완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전혀 새로운 형태로 변할 것인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는 오성 운동의 슬로건은 의회의 불필요성을 극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실제로는 이탈리아 기술관료들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극우파는 자신들의 사상이 이탈리아 사회에 수평적으로 퍼져 이제는 정착 단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정부나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날을 아니 적어도 사회적으로 다수세력이 되는 날을 꿈꾸고 있다.

 

글‧라파엘레 라우다니 Raffaele Laudani

미국 듀크대학교와 볼로냐 대학 공동으로 2014년 6월 23일부터 7월 4일까지 볼로냐 대학에 정치 여름학교를 개설했다.

번역‧임명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Laurent Bonelli, Raffaele Laudani ‘성가신 과거를 처리하는 기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월호

(2) 미래와 자유당은 0.47% 득표했다.

(3) 전 장관인 지오르지아 멜로니가 이끈 새로운 정당은 2%도 득표하지 못했고 그나마 베를루스코니와의 연합으로 의회에서 10석을 얻었다.

(4) <La Repubblica>, Rome, 2014년 1월 14일

(5) 1282년 부활절 당시 시칠리아를 다스리고 있던 프랑스 앙주 왕가의 확정에 대항하여 시칠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6주에 걸쳐 3천여 명의 프랑스인들이 살해당했는데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의 교회 저녁기도 종소리를 기점으로 봉기해서 시칠리아 만종(晩鐘)사건이라 부른다.

(6) Cf. Tommaso Cerno, Giovanni Tizian, ‘Forconi, l’anima nera marcia su Roma’ <L’Espresso>, Rome, 2013년 12월 7일

(7) ‘이탈리아를 구해줄 구세주를 기다리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