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하이테크 포퓰리즘

2014-12-04     크리스토프 자프를로 l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인도의 하이테크 포퓰리즘

서방국가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경제성장률(5~6%)에도 불구하고 경기 둔화와 정부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힌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인도국민당(BJP, Bharatiya Janata Party)과 당 대표인 나렌드라 모디에게는 호재였다.

인도국민당 정치인 나렌드라 모디(1)는 힌두민족과 인도를 동일시하는 힌두 민족주의 단체인 민족의용단 출신이다. 실제로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힌두가 전체 국민의 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도의 정체성은 힌두문화로 구현되어야 하며 인도에서 기원(基源)하지 않은 무슬림(14%)과 기독교(2%)와 같은 소수민족의 종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믿을 수 있지만 공공장소에서는 주류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 정치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의용단(1925년 결성)은 과거에 무슬림과 폭력사태를 빚기도 했다.

구자라트 주(州) 출신인 모디 주지사는 의용단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며 경력을 쌓았다. 단순한 ‘의용병’에서 시작해서 ‘간부 선전병’이 되었는데 간부가 되면 직업은 물론 결혼도 포기해야 한다. 한 마디로 의용단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간부는 의용단 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먼 지방에 보내질 수도 있고 학생조직이나 노동자조직 또는 관련 정당인 인도국민당에도 파견될 수 있다.

모디 주지사는 여러 지부를 거친 후 인도국민당으로 보내졌다. 선거에는 한 번도 출마하지 않았지만 구자라트 주에서 당을 조직하는 데 헌신했고 2001년까지는 인도국민당사(堂舍)에서 일했다. 당시 수상이었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를 비롯해 인도국민당 지도부는 모디를 구자라트 주지사로 임명했고 주지사가 된 후 그는 곧바로 힌두 민족주의, 자유주의 경제, 하이테크 포퓰리즘을 결합한 새로운 전략 실험에 들어갔다.

나렌드라 모디가 구자라트 주지사가 된 지 5개월도 안 되어, 1947년에 발생했던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영토분할 학살사건 이후 가장 규모가 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2002년 2월 27일, 고드라 기차역에서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타고 있던 객차에 화재가 발생해 59명이 사망했는데 이 사건이 촉매제가 되어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무슬림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가장 믿을 만한 비정부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는 2천 명이 넘는다. 인도 정부는 천 명 정도로 발표했다.

 

구자라트 주에서 인도국민당의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공포감 조성 전략이 쓰였다

화재사고가 학살로 번진 것은 힌두민병대가 무슬림을 학살하는 것을 방조하라는 명령을 주 정부가 경찰에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던 경찰은 불이익을 당했고 학살을 방조했던 경찰은 오히려 승진했다.(2)

무슬림 학살사건으로 구자라트 주를 분열시켜 대부분 힌두교도인 유권자들을 인도국민당으로 집결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디 주지사는 지체 없이 주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선거를 실시했다. 무슬림의 위협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공격적인 선거운동을 통해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다.

공포심 전략은 인도에서 ‘허위 교전(fake encounters)’이라 불리는 경찰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조장, 유지되고 있다. 경찰은 테러리스트라고 의심하는 사람을 불신검문에 응하지 않았다고 체포하거나 총을 발사했다는 이유로 대응사격을 했다(그래서 ‘교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구자르트 경찰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가 20명이 넘고 대부분 무슬림이다. 폭탄을 설치하려 했다거나 모디 주지사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사법부는 무죄 판결을 내렸고 현재 약 스무 명의 경찰 간부가 사실 왜곡으로 소송 중에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모디 주지사는 보다 온건한 이미지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1심에서 28년 형을 선고 받은 주 장관 마야 코드나니 같은 무슬림 학살에 연루되어 형을 선고받은 민족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었고 다양한 공동체 사이의 조화(사드바하나)를 외치며 무슬림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2011년에는 ‘사드바하나 미션 투어’라는 프로그램까지 시작했지만 현실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구자라트의 인도국민당은 한 번도 지방선거에 무슬림 후보를 공천한 적이 없고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무슬림 학생 장학금 지원도 거부했다. 구자라트가 유일하다. 종교 차별정책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갖지 못한 무슬림의 4분의 1이 빈곤선 아래서 살고 있다

사회, 경제적으로 무슬림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용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이후 믿을 수 있는 공식통계자료는 발표되지 않고 있다) 구자라트 주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의 4분의 1이 빈곤선 아래에서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위 카스트와 토착민의 17~18%가 빈곤선 아래에 살고 있는 것에 비해 높은 수치다. 이들 역시 사회 하층민을 구성하고 있지만 정부기관과 공기업 우선고용과 같은 ‘긍정적 차별정책’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무슬림보다 사정이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다.(2)

모디 주지사는 이프타르 파티(3) 전통을 폐지했는데 라마단 종료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전임 주지사들이 주최했던 것으로 상징성이 큰 행사였다. 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상관없이 많은 무슬림들이 도심을 떠나 아메다바드나 바도다라 같은 도시 외곽으로 이주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그 지역이 게토화 되었다. 2002년 학살사건 이후 안전을 염려한 무슬림들이 도시를 떠난 것이라는 이유로 들었지만 진짜 이유는 거주자 대표들이 건물에 무슬림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해서 주택을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디 주지사의 힌두 민족주의 사상은 농촌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그는 끊임없이 구자라트 지역을 방문했고 가장 선진적인 기법을 사용해 사람들과 소통했다. 인터넷을 통해 메시지를 배포하고 문자 메시지를 한 번에 수천 명에게 전송했다. 방송국도 만들어 선거기간 내내 공약 설명과 연설을 내보냈고 2012년에는 3D 기술을 이용해 홀로그램으로 구자라트 주의 20개 도시에 동시에 나타나 가상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모디 주지사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독재자들의 이미지 세탁으로 유명한 미국 홍보회사 APCO 월드와이드와 2007년에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능한 최대한의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며 관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이 이렇게 탄생했다. 물론 여기서 유권자는 힌두민족을 말한다.

돈이 많이 드는 홍보전은 대부분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구자라트 주는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다. 모디 주지사는 수출기업에 대해 세금을 우대해주는 경제특구를 많이 신설했다(경제특구는 연안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을 제시해 국내외 투자를 유치했다. 타타 그룹은 시장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으로 공장부지를 제공받고, 20년 동안 세금 면제와 무이자 장기 대출 혜택을 받는 대가로 저가 자동차인 ‘나노’ 생산공장을 구자라트로 이전했다.

그 같은 황금 조건과 전통적으로 사업에 유리한 환경, 잘 갖춰진 도로와 에너지 기반시설로 구자라트는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고공 성장률의 원동력이었다. 2004~2005년에 비해 2011~2012년 산업과 서비스 분야는 연평균 10% 이상 증가했고 농업생산은 8% 이상 증가했다. 전체평균이 7%인 다른 지방과 비교해서 높은 수치다.

 

재계, 상위 카스트, 중산층은 모디를 지지한다

하지만 모든 계층에 성장의 혜택이 돌아간 것은 아니다. 모디 주지사가 추진한 개발 위주의 경제정책은 사회 양극화를 낳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물론 무슬림(주 전체 인구의 9%)이다. 하지만 아디바시라 불리는 토착민(17%)과 과거에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렸던 달리트(핍박받는 자)(8)도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시골 거주자들은 더욱 그랬다. 2005년 농촌지역에 거주하며 빈곤선 아래에서 사는 토착민은 35%였고 달리트는 22%, 하위 카스트는 19%, 기타(주로 상위 카스트의 힌두교도)는 5%였다.

모디 주지사의 표적은 공공정책의 주요 수혜자인 상위 카스트, 엘리트, 도시 중산층이다. 대중교통 확충으로 시작된 도시개발 정책은 2009년 새로운 토지개발 정책으로 이어졌다. 현재 빈민촌의 면적이 전체 18%나 되는데 취약계층을 위한 지역을 5%로 제안하는 것이 이 정책의 주 내용이다. 덕분에 개발업자들은 빈민촌을 중산층 지역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2002년 학살사건에 장관들과 국회의원이 연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산층이 처음부터 모디 주지사를 지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2012년 권위 있는 인도 정치연구소(Centre for the Study of Developing Societies)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가 부유할수록 인도국민당을 지지하고 가난할수록 인도국민회의당(Indian National Congress)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지방선거에서 부유층의 57%(상위 카스트의 60%)가 인도국민당을 지지했고(덕분에 모디는 3선 주지사가 되었다), 반면 빈곤층 유권자의 44%(달리트의 61%, 무슬림의 69%)는 인도국민회의당을 지지했다.

2013년 인도국민당 지도부는 오랜 논의와 망설임 끝에 2014년 총선에 모디 주지사를 수상 후보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모디는 2002년부터 인도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고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당 내에도 적이 많다. 도시 중산층은 틀림없이 그를 지지할 것이다. 경제성장만을 숭배하는 도시중산층은 강력하고 ‘깨끗한’ 정치인(부패 스캔들로 마비되다시피 한 국민회의당과 비교해서)이 인도의 고삐를 바짝 당겨주기를 원한다. 기업가들도 같은 생각이다. 민주주의를 조금 후퇴시키더라도 말이다.

 

반부패 운동으로 인기가 높은 새로운 정당의 출현으로 선거판세가 바뀔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중산층도 이번에는 새로운 정당에 희망을 걸고 있다. 보통사람당(AAP, Aam Admi Party)은 2013년 12월 지방선거에서 당 대표 아르빈드 케지리왈이 델리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인도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2011년 시작한 대대적인 반부패운동에 뒤이은 쾌거다. 인도는 구자라트가 아니다. 도시화가 구자라트보다 덜 진행되어 있고 그래서 중산층의 영향력도 덜하고 하위 카스트(달리트를 포함해서) 조직은 북부 주에서 전반적으로 더 잘 구축되어 있다. 물론 모디는 자신이 하위 카스트 출신이고 어렸을 때 아버지 가게에서 차를 팔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겠지만 그가 속한 당은 상위 카스트가 지지기반이다.

이 핸디캡이 중대한 결함이 되지는 않겠지만 인도국민당이 의회 절대다수당이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다른 당과의 연합이 필요한데 이미 당 지도부로부터 비난을 받을 정도로 권위적인 모디 주지사가 과연 적절한 인물일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자프를로 Christophe Jaffrelot

프랑스 국제연구센터(CERI)의 연구원을 겸하고 있으며, <Narendra Modi: Saffron ‘Modernity’, and the Remaking of Gujarat>(Hurst, London, 2014)등의 저서가 있다.

 

(1) 나렌드라 모디는 2014년 5월 총선 승리로 새로운 인도 총리가 되었다. 기사는 이전에 쓰여진 것이다.

(2) ‘2002년 구자라트 힌두와 무슬림의 폭력사태’, <Revue tiers-monde>, n° 174, Paris, 2003년 4-6월호

(3) 이 자료는 은퇴한 법관인 라진더 사샤르 판사가 주도한 위원회가에 의뢰한 보고서에서 나왔다. <Social, economic and educational status of the Muslim community of India. A report>, New Delhi, 2006년

(4) ‘이프타르(Iftar)’는 라마단 기간 동안 매일 해가 진 후 갖는 첫 식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