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의 연못에 물 붓는 미국

가짜 수요에 취해...진짜 소비 늘어야 경기회복

2009-05-06     하상주
하상주/경제 칼럼니스트
지금의 세계경제를 보려면 미국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세계 인구의 5% 정도를 차지하지만 세계경제 생산액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달러는 전세계 모든 상품과 자본 거래의 기본 단위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나라들이 이 달러가 부족해서 미국에 무릎을 꿇어왔다. 반면에 미국은 잘만 하면 이 달러를 그냥 인쇄기에서 찍어내 외국이 힘들게 일해서 만들어낸 물건을 거의 공짜로 이용할 수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달러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그러나 미국의 달러가 처음부터 이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여러 나라 정상들이 모여 세계 통화체제를 결정했다. 그곳에서 달러는 금 1온스에 35달러로 고정되고, 다른 통화들은 모두 달러에 고정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다른 나라들에 달러를 가지고 와도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때부터 달러는 금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다. 더불어 미국 경제는 자유로운 달러에 공격받기 시작했다. 세계경제도 마찬가지였다.
달러 발행 뒤에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냥 허공에서 인쇄기를 돌리면 달러가 나온다는 말은 그 종이 달러가 미국이라는 국가 또는 정부의 신용 아래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통화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미국이 국내나 국외 거래에서 신용을 잃어버린다면 달러는 금방 가치를 잃고 종이 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미국은 대외거래와 국내 예산에서 균형을 갖춰야 하며, 실업률도 낮게 유지하고 물가도 높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런 조건에 변화가 생기면 그때부터 미국의 신용이 흔들리고, 달러 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국은 대외무역 적자가 국내총생산액의 6%에 이르고, 재정적자 또한 국내총생산액의 3%에 이르는 어려움에 빠져 있다. 이런 적자는 당연히 미국 경제 주체에게 부채를 분담시켰는데, 특히 정부와 개인의 부채가 크다. 정부의 부채는 대부분 전쟁 부채였고, 개인 부채는 모기지와 소비 부채였다.
이렇게 정부 부채와 개인 부채가 커지고 금융기관들끼리 만들어낸 금융상품 부채가 커지고만 있는데 미국의 중앙은행은 금리를 낮게만 유지했다. 낮은 금리는 더욱더 신용을 키워 부채를 늘려갔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에 인터넷 거품이 꺼지자 당시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은행(FRB) 의장은 불황이 찾아올 것을 두려워해 6%이던 연방기금금리를 1%까지 낮췄다. 그래서 주식 거품은 이제 국채 거품, 부동산 거품으로 옮아갔다. 이 거품이 만들어낸 가짜 수요는 가짜 생산, 가짜 고용, 가짜 무역거래량을 만들어내 경제는 계속 호황으로 굴러갔다.
이처럼 낮은 금리, 과잉 신용, 가짜 수요에 의해서 굴러가던 세계경제는 그 수요가 원자재 가격으로 가서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을 올리자 드디어 손을 들고 말았다. 미국 중앙은행은 소비자 물가 상승을 두려워해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고, 시장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지고 말았다. 가짜가 터진 것이다. 원유 가격이 절반 이상 떨어지자 미국 중앙은행은 다시 금리를 0% 근처까지 낮췄다.
그러나 이미 부채의 연못에서 물을 너무 많이 먹은 물고기들은 배를 뒤집은 채 물 위에 뜨고 말았다. 신용이 높을 때는 사적인 계약서도 현금처럼 사용되던 것이 신용이 없다고 밝혀지자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많은 파생상품들이 그 원천을 찾아헤매고, 유동성은 점점 말라가고, 개인은 파산하고, 금융기관이 넘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경제 주체들이 부채를 줄이고 있다. 부채 디플레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중앙은행과 재무부는 엄청난 유동성을 집어넣고 있다. 그러나 이 유동성은 민간 대출로는 잘 퍼져나가지 않고 있다. 민간 시장에서는 아직 신용이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 대출이 잘된다고 해도 문제다. 이미 지나친 부채를 안고 있는데 여기에 다시 더 부채를 안는다는 것은 부채를 지고 뒤로 넘어지라는 말과 같다.
부채 축소 과정은 필연적이다. 미국 정부는 이 과정을 가능한 한 길게 가지고 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경기 축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0%인 민간 저축률이 6% 전후로 올라가기까지 개인의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필연이다. 미국의 국내 총수요 중 개인의 소비가 약 70%를 차지한다. 이 개인 소비가 움직이지 않는 한 미국의 경기 회복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글/하상주 
달러 패권과 부채경제의 허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해왔으며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국내에서 처음인 2006년 8월 예견했다. 미국 보스턴대 MBA 출신으로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을 역임했고 현재 ‘하상주투자교실’ 대표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영업보고서로 보는 좋은 회사 나쁜 회사>(2007)  <펀드보다 안전한 가치투자>(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