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키나파소에 민주화 바람이 불까
[아프리카 특집]
부르키나파소에 민주화 바람이 불까
지난 10월 말, 48시간 동안 지속된 시위가 헌법 개정을 막아내면서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의 5선 연임이라는 열망이 좌절되고, 부르키나파소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도기를 맞게 되었다. 콩파오레의 사임을 보면서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하려는 이웃 아프리카 국가수반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안느 프린츠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2014년 10월 30일 목요일. ‘블레즈는 떠나라!’고 외치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부르키나파소 국회의 창문을 부수고 국회의원장 아폴리네르 숭갈로 우아타라의 관저에 불을 질렀다. 이에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은 자신의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 투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콩파오레는 다음날 곧장 사임을 발표하고 프랑스가 마련해준 헬리콥터를 타고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했다.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데에 분노한 시민들은 27년 동안 장기 집권해 온 현 정권의 모든 상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IMF에 따르면 2013년 부르키나파소의 경쟁성장률은 7%에 가까웠다). 집권당인 민주진보회의(CDP) 사무총장 아시미 쿠안다와 콩파오레 대통령의 동생으로 ‘작은 대통령’으로 불리며 정부의 경제 자문 역할을 하는 동시에 다수의 식료품 공기업 및 민간 기업을 소유한(1) 프랑수아 콩파오레의 관저가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도 와가두구에 위치한 포드 자동차 부지와 프랑수아 콩파오레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는 와가두구의 남서부 비사(Bissa) 금광이 시위대에 약탈 당한 사건은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리의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의 분노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약탈이 있은 후, 다수의 금광에선 열악한 노동 조건과 낮은 임금에 반대하는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와가두구의 실업자들이 10월 말에 일어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와가두구에서 만난 10여 명의 행상인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평화와 건강한 삶이다. 우리는 저렴한 약, 학교, 청년 일자리, 직업, 직업 연수가 필요하다. 콩파오레가 30년 동안 우리를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목소리로 절규한다.
와가두구 대형 시장에서 간단한 옷가지를 파는 살리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화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18세의 살리는 심각한 청년 일자리 부족과 석유, 식량의 가격 상승은 정치인들의 의지가 결여된 탓이라고 주장한다. 살리는 2013년 말부터 헌법 ‘변조’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부르키나파소의 노동조합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 1966년 당시 오트 볼타(Haute-Volta)로 불리던 부르키나파소의 초대 대통령 모리스 야메오고는 카톨릭계 노동조합원이었다. 그러나 야메오고가 일련의 긴축 조치를 취하면서 어려운 경제는 더욱 곤두박질쳤다. 1975년 쿠데타로 야메오고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육군 중령 상굴레 라미자나는 여타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면서 단일 정당을 꿈꿨으나 노동조합의 항의에 밀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라미자나는 그후에도 1980년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혁명동지 상카라 총살 후 장기집권한 콩파오레
블레즈 콩파오레는 ‘살인 창시자’로서 통치를 시작했다. 1987년 10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군대 형제이자 부르키나파소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식민지 탈피’의 길을 열었던 토마 상카라를 13명의 장교와 함께 총살한 것이다. 전 라이베리아 반군지도자 프린스 존슨은 시에라리온특별재판소(SCSL)에서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상카라를 총살하게 한 자는 콩파오레다”라고 증언했다.(2) 정권을 장악한 콩파오레는 경제 자유주의 노선을 취했다. IMF, 세계은행과의 논의 후 다수의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민영화로 인한 이득은 친정권 기업인들에게 돌아갔다. 행정권과 군에서는 가혹한 ‘친상카라’ 숙청이 시작되었다. 언론인 뱅상 우아타라는 쿠데타가 일어난 1987년 10월 15일부터 1998년까지 적어도 50명이 사망했다고 전한다.(3)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낡아빠진 콩파오레 정권을 뒤흔드는 세 번의 국민 봉기가 있었다. 1999년과 2000년 사이, 대통령 동생이 연루된 정치적 암살사건을 취재하던 기자 노베르 종고의 암살사건이 일어났으나(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그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자 거대한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2008년에는 노동조합, 대학생 단체, 인권 기관들이 살인적 물가에 대항하는 시위를 일으켰다.(4) 2011년 2월 20일, 한 중학생이 헌병대에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규탄하는 침묵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는 등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르키나파소에 아프리카식 ‘아랍의 봄’이 불어 닥치는 것을 우려한 정부는 중학생의 사인은 뇌막염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이 부르키나파소 정부를 유사 독재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콩파오레 정권을 뒤흔들었다.(5)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의 요구는 경제적 요구로 변했다. 토지, 물, 아스팔트 도로, 좀 더 나은 노동 여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은 25년간 얻어 내지 못한 것을 단 몇 달 만에 얻어낼 수 있었다. 2011년 4월 18일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어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여전히 고되고 힘든 채로 남아 있다.(6)
콩파오레, 권력유지 위해 친서방 추구
부르키나파소를 관찰하는 전문가들은 모두 “블레즈는 사람들이 좋아하기보다는 우려하는 인물이다”라고 입을 모은다.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30%를 넘은 적이 없었다. 야당연합위원이자 진보변화당(PDC) 당수인 사란 제르는 “정치에 낙담하고 염증을 느낀 부르키나파소 청년들이 정치에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인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은 차라리 투표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고 분석한다. 첫 보통선거는 1991년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라 볼(La Baule) 연설 직후 치러졌다. 연설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민주화를 아프리카 국가지원의 조건으로 내세웠고, 콩파오레는 80%라는 구소련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득표율로 7년 임기 대통령직에 선출되었다. 1998년, 2005년, 2010년도 마찬가지였다.
인기전술과 부정, 부패 그리고 (70여 개에 이르는) 야당의 분열로 콩파오레는 자신의 권력유지를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2012년 12월 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변화동맹(UPC)의 제피린 디아보레가 크게 성공하자 콩파오레 정부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UPC는 선거를 통해 전체 27개 의석 중 19석을 차지하게 되었고, 90년대 콩파오레 정부의 장관을 지낸 디아보레는 야당 지도자로 부상하여 시위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정치 판도에 변화를 가져온 디아보레는 자신의 극단적 자유주의 노선을 감추지 않는다. 2014년 10월 7일 와가두구 연설에서 디아보레는 “UPC의 정치 계획은 출자자의 계획이라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콩파오레는 친서방 인물이었다. 1993년 콩파오레는 서아프리카 내 프랑스 이익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고(故)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의 후임자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콩파오레의 국제 중재가 시작되었다. 중재는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니제르, 토고, 코트디부아르, 기니, 말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콩파오레도 남부 아프리카를 황폐화시킨, 여전히 피해를 주고 있는 내분과 무관하지 않다. SCSL의 심문 결과, 콩파오레는 1989년 말 무하마드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과 함께 부르키나파소에 망명 중이던 찰스 테일러의 반 라이베리아 유혈 공격을 도운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2001년 유엔은 앙골라완전독립연맹(Unita)을 위해 무기와 다이아몬드 밀수입에 개입한 혐의로 콩파오레를 고소했다.(7) 2002년에는 코트디부아르 국회의장인 기욤 소로의 반군신체제(FN)가 부르키나파소에서부터 아비장을 공격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2011년까지 내전을 겪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부르키나파소는 카카오를 팔 뿐이었다.
헐벗은 세계 최빈국 부르키나파소
2013년에 일어난 말리 사태는 사헬 지대에서 콩파오레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콩파오레가 이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밀매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와가두구에 수용한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 투아레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콩파오레는 미국과 프랑스의 정보국 역할을 맡고 정보국 첩보원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미국은 콩파오레의 장기 집권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두 국가는 부르키나파소의 사회 동요가 말리 사태로 이미 불안정해진 아프리카에까지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4년 10월 7일자 서신을 통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합의 없는 헌법 개정’을 피하면서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모범’ 국가가 되는 데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콩파오레에게 전했다. 올랑드 대통령이 콩파오레가 그의 ‘경험과 능력’을 ‘국제 공동체’를 위해 쓸 경우, 프랑스가 부르키나파소를 지지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한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4년 8월 워싱턴에서 열린 아프리카-미국 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는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 강력한 제도가 필요하다’며 콩파오레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8)
임시정부 수반으로 나선 아이작 지다 육군중령은 대통령 경호부대의 질베르 디엔데레 장군의 부관으로,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와 아프리카연합(AU)의 압력 하에 ‘신속하게’ 정권을 이양하고 선거를 치를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지다가 정부수반 자리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폐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미 SNS에 불을 붙인 부르키나파소 폭동은 아프리카에 경보를 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룬디에서는 야당 지도자 파시픽 니니나하즈웨가 피에르 은크룬키자 대통령에게 “정부가 매수한 민병대가 있다”며,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는 것을 눈 감고 봐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9) 브라자빌 콩고의 야당지도자 파스칼 차티 마비알라도 “부르키나파소에서 헌법 조작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콩고의 민주주의에도 정권교체가 필요하기 때문에(10) 모든 헌법 조작에 대항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냉과 DR콩고, 르완다, 토고의 대통령들도 분명 헌법 개정을 통해 집권기간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려 했을 것이다.
글·안느 프린 Anne Frintz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수영 ksy_french@naver.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Rémy Carayol, ‘부르키나파소: 또 한 명의 콩파오레, 프랑수아’, <Jeune Afrique>, Paris, 2012년 7월 18일
(2) Bruno Faffré, ‘프랑스 신식민주의의 중심, 부르키나파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월호
(3) Vincent Ouattara, <콩파오레 시대: 범죄, 정책, 권력 관리>, Klanba, Paris, 2006년
(4) Anne-CécileRobert, ‘코나크리에서 나이로비까지, 투표는 하지만 결정은 하지 않는 아프리카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2월호
(5)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 <콩파오레가 있는 혹은 없는 부르키나파소, 불안의 시간>, 2013년 7월 22일 보고서 205호, www.crisisgroup.org
(6) Lila Chouli, <부르키나파소 2011년. 사회 동요 연표)>,
http://tahin-party.org/chouli.html에서 다운로드 가능
(7) 천공 아야포르가 주관하는 시에라리온 관련 무기 및 다이아몬드 밀매 연구 전문가 그룹의 보고서
(8) <부르키나파소: 정권이양헌장>, 2014년 11월 8일, .www.rfi.fr
(9) Radio France International(RFI), 2014년 11월 2일
(10) RFI, 2014년 11월 8일
<박스기사>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인간개발지수 순위에서 부르키나파소는 187개국 중 18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하루 1.25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고, 성인(15세 이상) 문맹퇴치율은 30%, 청소년 문맹퇴치율은 40%를 넘지 못한다. 한편 이 청소년들이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UNDP에 따르면 부르키나파소의 5세 미만 유아사망률은 10%가 넘고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3명꼴이다. 또한 유엔인도지원조정국(OCHA)에 따르면 1,700만 인구 중 130만 명에 가까운 부르키나파소인이 식량 불안정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면적 272,000km²의 이 아프리카 국가도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금 수출은 국민총생산(GDP)의 5%를 차지하고 있으며, 부르키나파소는 전 세계적으로 면 가격이 하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제1의 면 수출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