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의 후티 반군, 무슬림형제단 물리치고 집권세력으로

2014-12-04     로랑 본푸아

 

예멘의 후티 반군, 무슬림형제단 물리치고 집권세력으로

 

로랑 본푸아 ┃교육연구혁신센터(CERI) 연구원, 유럽연구이사회(ERC) 회원

 

2014년 9월 21일, 북부 시아파 후티(houthi) 반군은 예멘 수도 사나를 함락하고 2011년 아랍 혁명 이후 줄곧 무슬림형제단과 이들의 동맹 부족들이 지배하던 예멘 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많은 사람들은 군의 별다른 저항도 없이 예멘 수도가 골수 시아파 조직에 의해 갑작스럽게 함락되자 놀라움을 드러내며 추측성 가십 기사들을 쓰기도 했다.

2007년, 전 예멘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와 시아파 소수 분파 자야디(Zaydi)(1)의 일부 회원들 간에 치명적인 “사다(Saada) 전쟁”(2)의 제4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반군 지도자 압둘 말릭 알 후티가 훗날 예멘 정치권의 실세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그는 사다의 북부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해 본인 이름을 딴 무장단체, ‘후티’를 창립한 풋내기 지도자에서 불과했다.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그는 2004년 전투 중에 사망한 형과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이슬람 지도자 자야디(Zayadi)를 섬기는 시아파 소수 분파(대략 전체 인구의 3분의 1)와 또 다른 지도자 샤피(Chafil)를 추종하는 수니파 다수 분파 간에 별로 대화가 없는 국가에서 시아파가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부차적인 문제처럼 보였다. 종파들이 전례 없이 하나로 뭉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 살레를 포함한 대다수의 엘리트와 많은 자야디 출신 국민들은 보다 폭 넓은 무슬림의 정체성을 이유로 종파 간 제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

2004년 이후, 후티 반군은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시아파의 상징적인 세계에 확실히 발을 들여 놓았다. 이란과 헤즈볼라의 측근인 이들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며 1979년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서 외쳤던 것과 유사한 반미와 반이스라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또 아수라(Ashura)(4) 축제와 같은 일부 시아파 축제를 다시 주관하고 있다.

2011년 평화적인 봉기 이후,(5) 살레 대통령이 퇴진했을 때만 해도 정권이 무슬림형제단과 보수 부족의 엘리트 연맹인 주요 야당, 알 이슬라(Al-Islah)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2011년 시위가 정점에 달했을 때, 알 이슬라가 시위대에 제공한 자신들의 경험을 비롯한 물류 및 인적지원은 혁명세력에게 꼭 필요한 임계질량(핵분열 물질이 연쇄 반응을 할 수 있는 최소의 질량)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2011년 11월 살레 대통령의 사임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다스리기 위해 출범한 거국일치내각(전쟁이나 경제 공황 따위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당파가 연합하여 조직한 내각-역주)엔 다수의 알 이슬라 의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국가 안보 기관들이 점차적으로 이 당 측근 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요컨대, 이 정당의 지도자들은 당시 혁명의 정당성을 부르짖으며 정국을 관장하던 대통령 권한 대행, 압드 라부 만수르 알하디의 주요 정치 파트너처럼 등장했다. 이후, 정부군이 사나 지역에서 무슬림형제단의 반격에 연이어 격퇴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알 이슬라의 정권 창출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따라서 반(反) 알 이슬라 세력인 후티 반군이 사나를 함락함으로써 이 같은 꿈도 조기에 사라졌다.

알 이슬라 지도부는 2013년 7월 3일 이집트 대통령에 당선된 무슬림형제단 소속의 모하메드 모르시가 겨우 1년 남짓된 시점에 축출되자, 이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정치무대 전면에 등장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자신들이 혁명기에 실세라는 인상을 풍기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예멘 사회에 정착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했던 동맹군, 즉 부족과 군부는 이들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현재 예멘의 무슬림형제단은 본인들의 야망과 조직을 재정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후티 반군이 사나를 공격한 주된 목적은 알리 무신을 겨냥하기 위해서였다. 살레 전 대통령의 측근이자 옛 정치 고문인 무신은 후티 반군과 치른 사다 전쟁 때 최전방 기갑사단을 지휘한 사단장이었다. 2011년 3월, 그의 패배는 곧 독재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무신의 본거지인 사나의 함락과 그의 사우디아라비아 망명(2014년 9월 21일)은 그에 대한 후티 반군의 복수 의지를 반증했다. 많은 이들은 살레 전 대통령이 아직 자신을 따르는 군인들에게 후티 반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방식으로 은밀히 이들 세력을 도왔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사나가 함락되던 날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환하게 웃는 자신의 사진을 올린 살레의 알쏭달쏭한 태도를 누가 알 수 있으랴!

 

“아랍혁명을 보호하려 무슬림형제단을 공격”

 

2,007명이 사망한 부족 연맹의 유명인사이자 알 이슬라 정당 설립자인 압둘라 알 아마르의 10명의 아들들도 예멘 수도에 정착한 후티 반군을 압박하는 대상이었다. 알 아마르의 세력은 후티 반군과의 전투로 인해 점차 수도 북부 부족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는 곧 이들 부족연맹 진영의 전면적인 재편성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사나의 주인들(후티 반군)은 오사마 빈 라덴의 전 동료인 압둘마지드 알진다니가 운영하던 알 이맘 이슬람 대학을 눈엣가시로 여겨 서둘러 폐쇄시켰다.

이들은 또 이슬람 진영의 자유주의 투사이자 201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타우왁쿨 카르만과 2000년대 초반 사회당(6)과 자야디를 지지하던 일부 정당, 알 이슬라 간 가교 역할을 했던 알 이슬라의 중진의원 무함마드 카타니의 주택 등을 파괴했다. 후티 반군이 무슬림형제단에 징벌적인 공세를 취한 셈이다. 이는 요즘 대세인 시아파 자야디 추종자들과 수니파 이슬람주의자 간 종교 긴장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다.

알 후티와 그의 대변인 알리 알부카이티는 자신들의 무슬림형제단 공격에 좀 더 폭넓은 의미를 부여했다. 예컨대, 자신들은 2011년에 발발한 아랍혁명을 보호하기위해 무슬림형제단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2014년 7월, 석유 제품에 대한 정부 보조금 단절 발표는 후티 반군이 사나 공격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알 후티와 그의 지지자들은 연료 가격의 2배 인상과 구매력 하락에 항의하며 부패한 정부의 해산을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가 2014년 대국민 담화 때 야심차게 발표한 결정들, 이를테면 부패와의 전쟁,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 정권 공유 등과 같은 당시 자신들이 지지하지도 않았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 덕에, 후티 반군은 자야디 세력의 위치를 뛰어 넘는 사회적·정치적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 한편 후티 반군이 이 같은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은 사나에 유입되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야디 세력이 아니어서, 이들의 사나 진격에 저항할 만한 내부의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후티 반군에 대한 살레 전 대통령 추종자들의 방임, 하디 대통령과 “국제사회”의 이들에 대한 수동적인 지지는 이들 무리(국제사회와 전·현직 예멘 대통령, 이들의 추종자들)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적대적인 전략을 쓰고 있다는 반증이다. 물론 이들은 소통 단절과 난무하는 폭력을 피하기 위한 화해의 의지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지난 9월 21일, 유엔과 모로코 출신 특사 자말 벤 오마르가 개입해 후티 반군과 현 정부 간 휴전 협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은 첫 총리 후보를 총리에 임명하는 데 실패한 이후, 전격적으로 칼리드 바하흐를 신임 총리에 임명했다. 칼리드가 주도하는 기술관료 정부는 후티 반군을 끌어안으며 혼란 정국을 일부 정상화시켰다. 비록 후티 반군은 과거 공공건물을 점거한 무장 민병대 조직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더 이상 지리적·사회적 변방 출신 반군이 아닌 권력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종교분쟁을 정말 피하고 싶다면, 후티 반군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 특히 수니파 세력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어 이들의 책임도 막중해졌다. 사나가 함락되고 며칠 후, 아라비아반도의 알 카에다 전사들은 후티 반군에 보복하겠다고 경고한 뒤, 실제로 이를 실행했다. 지난 10월 9일, 탈레반 전사 한 명이 사나 한복판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해 47명이 사망했다. 또 사나 남부에서 터진 2차 테러로 인해 20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같은 시각, 다마르주의 살라피스트(이슬람 원리주의자) 연구소의 전 소장 야야 알하주리는 수니파의 본거지인 아덴과 태즈에서 강연회를 개최해 라와피드(rawafidh, 시아파를 비하하는 말) 타도를 위한 시위를 벌이자고 호소했다.

우리가 사나 주민들의 후티 반군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전략적 지지를 분석하다 보면, 문제가 되고 있는 종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미묘한 변화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분석이 유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종파분쟁의 논리를 완전히 와해시킬 수는 없다. 이런 논리가 와해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2004년 사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후티 반군이 직접 살레 정권으로부터 받은 유산이 그것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후티 반군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원인 자야디 세력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던 자신의 초기 동맹군인 이란을 내치게 하고,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도구화하도록 하고 있다.

 

후원자 사우디의 애매한 역할

 

아랍지역의 강국이자 예멘의 역사에 간섭한 적이 있는 사우디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역할을 예멘에서 하고 있다. 아랍세계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후티 반군에 대한 사우디의 늑장 외교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후티 반군의 적대적인 논리와 이란과의 전략적인 제휴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만으로는 현 예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충분치 않다. 사우디 정부가 테러행위로 규정한 무슬림형제단의 범죄는 사우디 국내정치와 경쟁국인 카타르, 이집트군 수장(현 이집트 대통령) 압델 파타 알시시 등이 만들어 낸 산물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사우디 외교관들은 여러 번에 걸쳐 예멘의 무슬림형제단 운동은 사우디 국내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사우디가 무슬림형제단을 퇴치하기 위해 암암리에 후티 반군과 마음에도 없는 연맹을 맺고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기보다는, 사우디의 이러한 방임은 자국 외교의 구조적인 약점 때문일 수도 있다. 예멘에서의 사우디 외교는 정책목표도 설정하지 못한 채 무능함만 드러냈다. 사우디만 이러한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중동 국가들처럼 전환기를 맞은 예멘과 하디 대통령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또한 예멘을 강타하고 있는 커다란 정치적 위기에 쩔쩔매고 있다. 이들은 분명 예멘 중앙 정부를 지지하는 알 카에다에 드론을 이용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과 이들에 대한 이민제한 정책 사이에서 무슨 정책을 쓸 것인지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사우디의 전통적인 권력이양의 위기, 특히 아마르 가문의 권력 이양문제를 비롯한 알 카에다와 남부 분리주의 세력의 득세가 사우디의 외교활동과 정세 파악 능력을 대폭 위축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 왕자, 종교 지도자, 준 국영업체 등으로 다각화된 사우디의 외교 채널이 종종 서로 경쟁하며 자국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시아파의 위협’을 가공하고 이 위협을 종교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낙인찍는 데 수년간 참여했던 다양한 사우디의 외교 채널이 이란과 가까워지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글‧로랑 본푸아 Laurent Bonnefoy

프랑스 정치대학 산하 교육연구혁신센터(CERI) 연구원 겸 유럽연구이사회(ERC) 회원. 저서로 <예멘의 살라피즘, 다국적주의와 종교의 정체성>(2012) 등이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1) 자야디즘(zaydisme)은 예멘의 특정 시아파 분파이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이 분파는 1962년 예멘 공화당 혁명 때까지 예멘 고지대를 천 년간 지배한 종교지도자 자야디의 정치 및 종교 철학과 연관이 있다.

(2) Pierre Bernin, ‘예멘에서의 비밀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0월호

(3) ‘융합, 저항, 도구화로 구분되는 예멘의 현대 종교의 정체성’, <이슬람 세계와 지중해에 관한 잡지>, 2008년 4월

(4) 아수라 축제는 예언가 마호메트의 손자 후세인의 순교를 기리는 행사이다. 이 축제는 또한 수니파의 압박에 대한 저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어서 수니파가 종종 이 행사를 비판하고 있다.

(5) Laurent Bonnefoy, Franck Mermier et Marine Poirier, <혁명의 전환기를 맞은 예멘>, Karthala, 파리, 2012년

(6) 1990년 남‧북 예멘이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사회당이 예멘인민민주공화국(남예멘·PDRY)을 집권했다.

 

 

예멘의 통일에서부터 후티 반군의 승리까지

 

1990년: 1978년부터 북예멘을 집권하고 있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주도 아래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과 예멘인민민주아랍공화국(남예멘) 통일

1994년: 남예멘의 분리 독립 시도가 무력으로 진압됨

2002년: 미국, 예멘에서 알 카에다 소탕작전 캠페인 시작

2012년: 미국 특수부대 예멘 주둔 시작

2009년 1월: 아라비아반도 알 카에다(AQAP)란 이름으로 사우디와 예멘 알 카에다 지부 합병

2011년 1월: 살레 대통령에 대한 반대시위 시작. 이따금 무력충돌을 빚기도 한 이 시위는 1년 이상 지속됨

2011년 3월: 2004년부터 위세를 부리던 후티 반군의 사나 함락

2011년 10월: 자유주의 투사 타우왁쿨 카르만 노벨 평화상 수상

2012년 2월 27일: 살레 대통령은 면책 특권을 보장받고 정권을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신임 대통령에게 이양

2012년 4월: 이란 아비아네에서 정부군과 AQPA 간에 격렬한 교전

2013년 3월: 국민과의 대화 시작. 2014년에 마무리된 이 대화는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의 결정적인 계기가 됨

2014년 9월 21일: 후티 반군 사나 점령

2014년 10월 13일: 칼리드 바하흐가 주도하는 새 내각 구성. 하디는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함

 

글·로랑 본푸아

번역·조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