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수용소 어둠 속의 빛

2009-05-06     밀레나 마냐니

망한 서커스 /  밀레나 마냐니 지음
“한 남자의 인생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의 인생은 하나의 이미지로 남겨진다. 아이들 5명이 원을 그리며 쭉 둘러앉아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들은 돌 위에 앉아 있다. 갑작스럽게 고통에 사로잡히는 이미지, 어디선가 이미 본 이미지다.”
이탈리아 출신 밀레나 마냐니의 처녀작인 <망한 서커스>는 삶의 의미와 문화 및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과거의 전쟁, 학대, 보복심이 바탕을 이룬다.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작가답게 집시에 대한 인종차별이 자행되던 시기의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용소 밖의 세상은 중심 배경이 아니다. 수용소 밖의 세계는 단순히 주민들이 이 안을 바라보는 단편적인 장면으로만 등장한다. 그러나 중심이 아니라 해도 ‘외부 세상’은 수용소와 너무나 멀기도, 가깝기도 한 묘한 곳이다.
 
집시의 피와 불행한 가족사 
이 소설은 주인공 브란코 프라발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는 아무리 바닥에 쓰러지고 죽도록 맞아도 꿋꿋이 버텨 살아간다. 사람들과의 만남, 전쟁과 죽음에 대한 경험, 저항, 살고자 하는 욕구, 과거를 알아가려는 욕망이 작품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 주인공은 자신이 집시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과 불행한 가족사를 알게 되는데 이 이야기 역시 작품에서 주요한 내용이다.
주인공의 부친은 유명한 서커스단 ‘케크 시르쿠츠’에서 일한 헝가리 출신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나 그 사실을 몇십 년 동안 비밀로 간직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과 같은 집시 출신의 오랜 친구 라츨로의 배신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게 되고 부모를 모두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라츨로에게 복수해야겠다는 생각도 잊고 살아간다. 그는 집시 출신이란 것을 숨기고 평범하게 돈을 벌며 살아간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자세히 묘사되는 부분은 바로 상자들 속에 꼭꼭 보관된 서커스 소품들이다.

아름다운 언어로 울리는 서커스 


주인공 브란코는 자신이 집시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후 그의 삶은 달라진다. 브란코는 가족을 뒤로한 채 라츨로를 찾아가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렇다고 복수가 이 소설의 중심 테마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수용소에 갇힌 아이들이 저녁마다 듣는 마법처럼 환상적인 서커스 이야기다.
서커스 소품들에 대한 묘사 덕분에 서커스 장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나치의 박해에도, 무관심과 무시를 당하는 현실에서도 ‘케크 시르쿠츠’ 서커스단 이야기는 저녁 시간을 기쁘게 해주는 존재다. 간혹 내레이션은 음악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동유럽 언어를 반복하며 음악적인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비극을 다룬 작품이지만 단순히 우울하지만은 않고 마법 같은 빛을 잃지 않는다. 음악과 이야기가 곁들여진 아름다운 언어로 된 작품이다.

요약번역 및 정리/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코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엔돌핀 경영>(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