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청양처럼

2014-12-29     성일권
2015년, 히말라야의 청양처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을 강제해산 판결을 내린 그날 아침. 차를 몰고 한강다리를 달리다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재판관의 판결문 낭독에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교각을 들이받을 뻔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연내에 지지율 30%대 정권의 마지막 국면전환용 카드는 통진당 해산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정치에 문외한인 저는 “설마,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1월호 편집회의에서 통진당 문제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통진당 해산이 발표되자 저는 당원도 아니고, 그쪽 인사들과의 교류도 없는 처지였음에도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뽑혀나간 허망함에 답답증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함성을 떠올려봤습니다.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한 저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경찰 곤봉과 최루탄에 피와 눈물을 흘리면서 쟁취한 것이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적 법질서였습니다. 그때 민주주의 수호의 절대적 소임을 부여받아 탄생한 것이 헌법재판소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의 시계를 수십 년 전의 전체주의 시대로 꺾어놓았습니다. 외신에 비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민주국가가 아닙니다. 뉴욕타임스, BBC 등 주요 외신은 “한국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정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며 “이로써 한국에서는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통진당 인사들은 보수 단체들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고발당하는 등 ‘빨갱이’ 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한 일과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인사 사형…. 불행하게도 그런 공포의 징후들이 지금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섬뜩합니다.사실, 우리는 수년째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피의자의 이메일과 SNS 몇 년치가 압수 수색되고, 그 내용이 판결에 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개되고 있으며, 인권위원회의 주요한 조치들이 지켜지지 않거나 무시되고 있습니다. 교육이나 의료 등 복지시스템은 무너지고 있고, 대신에 많은 예산이 의혹투성이인 이른바 ‘사자방’(4대강, 자원개발, 방위산업)에 투입되었고, 여전히 그 수렁에서 헤매고 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저희는 “왜 <르 디플로>냐”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 다수에게 고통을 주는 양극화가 오히려 성장 담론의 기반으로 이용되고, 사익화된 언론권력과 시장권력의 야합에 의해 시장담론적 유토피아가 확산되며, 더욱이 시장권력에 맞선 진보정치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암담한 현실에서 르 디플로의 시대적 책무는 엄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칼 폴라니(1886~1964)는 시장 유토피아에 의한 ‘가격화’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파시즘의 출현을 경고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격화하는 시장이 사회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면서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형태를 파시즘으로 보았습니다.현 정권의 정치형태를 독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르 디플로>의 시대적 사명이 칼 폴라니의 주장대로 시민 권력의 확장을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데 일조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을미년 청양띠의 해를 맞아, 빠르고 진취적인 자세로 눈 덮힌 히말라야의 산야를 달리는 청양처럼, <르 디플로>는 오로지 진실의 힘을 믿으며, 독자님과 더불어 뚜벅뚜벅 전진할 것입니다. 성일권/<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