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가 감옥에 갔다면

2014-12-29     알랭 가리구

 

 


 

 

만약 하이데거가 감옥에 갔다면

알랭 가리구|<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한 논란이 반복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나치 부역 전력과 반유태주의 입장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를 놀라울 정도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하이데거 옹호자들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에 취임할 때 학생들에게 나치에 참여하라고 연설을 했고, 1945년까지 나치 당적을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한 강의와 연설, 나치 고위층과의 관계, 부인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올 초에 출간된 하이데거의 비밀일기 <검은 노트>를 통해서도 친나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옹호자들은 그가 의무적으로 나치당에 가입해야 했던 ‘수동적 방관자(Mitlaufer)’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동적 방관자’는 1945년 이후 나치시대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탈나치화 작업에서 부역자들이 주로 한 변명이었지만 설득 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설득적인 이유였다.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더욱 반박하기 힘들다. 그는 신념을 가지고 나치당에 입당했고 또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에 동조했다(최소한 침묵했다). 물론 <검은 노트>의 편집자가 그랬던 것처럼 전체 1,200쪽 가운데 반유대주의 내용은 열두 쪽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안의 심각성을 단어의 수로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데거의 옹호자들은 하이데거가 몇몇 유대인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거나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정부(情婦)였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이데거의 명성을 보호해 왔다. 그렇다면 자신의 변명이 담긴 회고록에 어느 유대인에게 애정을 느꼈다고 밝힌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는 100% 반유대주의자는 아니라는 말인가!

하이데거의 옹호자들은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찾는 대신 (하지만 승산은 없어 보인다) 철학자들의 실수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논란은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하이데거를 변호하면서 자신들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나치당원이며 반유대주의자(동어반복이다)인 철학자를 어떻게 찬미하고 선전할 수 있었을까?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설명은 이렇다. 철학과 정치활동은 분리시켜 생각해야 하고, 하이데거의 저작에서 나치즘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철학자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고 그렇다고 그것이 철학자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하이데거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감옥에 갔다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이데거는 탈나치화 작업을 통해 정직처분만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동료이자 법학자이며 정치학자인 카를 슈미트처럼 곧바로 불법으로 사설 강의를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감옥에 가야 했었다. 그가 감옥에 가지 않았던 이유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지 덕분이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호에 실린 에티엔 클랭의 ‘소르본대 철학교수, 왜 레지스탕스가 되었나(Jean Cavailliès, une pensee explosive)’를 보면 독일 바덴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프라이부르크에 군정(軍政)을 설치하고 탈나치화 작업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피에르 펜느 군정 사령관은 하이데거의 나치 부역 전력에 대한 평가 임무를 장교이며 독일문학 교수였던 자크 라캉에게 맡겼다.(1) 하이데거가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잘 알려진 철학자였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임무였다. 라캉 자신도 1945년 7월 18일자 편지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마르틴 하이데거 교수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의 주창자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이고 특히 프랑스에서 명성이 매우 높아 르세느와 사르트르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하이데거를 표방했거나 표방하고 있다. 소르본 대학의 장 왈 교수는 그가 ‘매우 중요한’ 철학자라고 내게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하이데거의 사례는 다른 사람들과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

빅토르 파리아스(2)에 따르면 바덴지방에 주재한 프랑스 군정은 하이데거에 대해 완강한 태도를 보였고 그래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특히 철학부)가 프랑스 군정의 태도를 누그려뜨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3) 라캉이 제안한 대로 하이데거에 대한 징계가 결정되었고 지역 일간지인 바디쉬차이퉁에 “정치정화작업의 일환으로 철학자이며 교수인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강의금지 조치가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4) 하지만 하이데거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고 그래서 투옥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는 더 깊은 상처를 남겼고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어렵게 했다. 라캉은 편지에 이 사실을 다르게 설명했는데 하이데거가 구제된 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지 덕분이었다고 적고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가 복잡하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진실에 대한 부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라캉은 주장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피고인들은 가장 문제가 되는 행위를 숨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특이하거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니고 탈나치화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규범 같은 행동이었다. 라캉은 하이데거가 자신은 ‘수동적 방관자’였다는 관례적인 이유로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 “내가 하이데거를 오게 해서 면담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을 하더니 대학을 새롭게 바꾸고 싶었고 나치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5)

위급한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의 변명에서 영웅적인 것은 찾을 수 없다. 라캉은 하이데거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 후고 오트, 빅토르 파리아스, 엠마뉘엘 파이에 같은 학자들은 철저한 연구조사를 통해 하이데거가 나치당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얼마나 깊게 나치와 관계를 맺었는지, 특히 동료교수들과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에게 보여준 태도를 통해 그가 얼마나 심각한 반유대주의자였는지 밝혀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아들이 철저하게 아버지의 개인 기록물을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가 인종과 독일 민족, ‘총통’의 최후의 해결책(final solution, 대량학살) 등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이상화한 글도 찾아냈다.

자크 라캉은 징계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여러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비켜가야 했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책임은 최소화하지 않으면서 매번 그 중요성은 상대화했다. 이를테면, 하이데거는 나치가 정권을 잡고 취임한 첫 대학 총장이었지만 나치는 그의 선거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독일 대학을 수호하자는 취임 연설은 부인할 수 없는 나치부역의 증거지만 동시에 하이데거가 히틀러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들은 증인도 있다고 주장했다. 1934년 2월 총장 사임과 나치와 거리를 둔 것에 대해서는 (1938년 학회에 나치당국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봤을 때) 이유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나치당적 갱신 사실 역시 소홀히 다루었거나 아니면 알지 못했다.

1946년에 외부 인사들이 하이데거의 운명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외부 인사들은 바로 프랑스 철학자들로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정은 이들의 개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라캉도 자신의 의견을 밝힐 때 이들 프랑스 철학자들을 첫 줄에 언급했고 동시에 하이데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프라이부르크에 방문한 사실을 언급하며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반감도 숨기지 않았다.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한 프랑스 지식인들과 기자들은 자주 하이데거를 만났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 군정이 객관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이데거를 만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에 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폴 사르트르는 프라이부르크에 가지 않았다. 1944년 하이데거를 높이 평가하는 글을 쓰고 하이데거로부터 편지를 두 번이나 받았지만 그를 만나는 것에는 신중을 기했다.(6)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곳에서는 모두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나는 ‘인기 있는 철학자’이고 프랑스인들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라캉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압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정화위원회 역시 의견이 나뉘어 확실하게 제안을 할 수 없었다. 봉급이 포함된 조기퇴직안은 하이데거의 ‘입장’이 고려된 타협안이었고 상황이 매우 민감해서 하이데거 자신이 조기퇴직을 제안했다고 라캉은 설명했다. 이 제안은 피고의 동의하에 긍정적인 의견이 붙여져 교육부에 전달되었다. 라캉은 수용하기 힘든 프랑스 내에서의 지지와 균형을 맞추는 관대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 결정은 파리에서 일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이데거에 대한 온건한 징벌조치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방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현재도 그렇고 차후에라도 천재적인 철학자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규정’을 적용하지 않기 위해 사용한 하이데거의 개념인 ‘Geschik(능력)’의 번역어인 ‘천재’라는 호칭에는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라캉은 하이데거의 혐의를 없애주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상황의 복합성은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철학자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기퇴직 조치는 “젊은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하이데거를 그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나치식 경례를 시키고, 퇴직 후 제자들과 함께 슈바르츠발트 지역에서 은퇴 생활을 한 교육자로서 하이데거를 처벌하는 것이지 그의 철학과 나치주의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데거의 사상과 나치전력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는 다른 연구조사와는 달리 하이데거의 어떤 저작도 인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총장 취임연설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는 처벌을 받았지만 덕분에 ‘자신의 역작 2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모순은 하이데거의 강의내용은 학생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데 그가 쓴 책은 학생들의 정신을 오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수의 행동만이 문제가 되고 교수의 철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라캉 역시 하이데거의 철학이 완전히 무해하다는 것은 확신하지 못한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들 덕분에 감옥에 가지 않았지만 하이데거는 이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후에 발표된 슈피겔과의 인터뷰(1976년)에서 “프랑스 철학자들은 생각하기 시작하면 독일어로 말한다”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이 발언에서도 그의 지적, 정치적 일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유명한 문구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리고 존재를 독일민족과 동일시했던 1930년대의 글과 괘를 같이 하는 발언이다. 하이데거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후 독일의 수많은 독일인처럼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책임을 축소하려고 한 것은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할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철학이 자신이 매우 관대하게 표현한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철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거만한 주장이 우습지 아닐 수 없다. 하이데거 옹호자들은 하이데거를 변호하면서 철학 전체를 끌어들이고 실존주의만이 아닌 다른 여러 철학사상을 관련시켜 자신들의 논리적 사고 능력을 의심케 했다.

결론적으로 하이데거에 대한 논란은 하이데거 자체나 그의 행적과 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난 게임이다) 그의 옹호자들에 관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사랑에 눈이 멀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때가 되었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1) 자크 라캉(Jacques Lacant)은 논문 <독일에서의 마리보(Marivaux en Allemagne)>를 출간한 독일 전문가이고 1960년부터 1984년까지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쳤다. 피에르 펜느(Pierre Pene)는 레지스탕스 조직인 ‘민군(民軍) 조직(Organisation civile et militaire, OCM)’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1943년 12월부터 독일군에 체포된 1944년 4월까지 레지스탕스 무장단체인 ‘프랑스국내군(Forces françaises de l’intérieur, FFI)’의 파리지역 사령관을 지냈다. 그 후 탈출해 엔느(Aines) 도지사를 거쳐 1945년부터 1952년까지는 독일 바덴지방 사령관을 역임했다. (가족이 보관하고 있었던 편지를 내게 보여준 디디에 펜느와 올리비에 펜느에게 감사한다.)


 

(2) Victor Farias, <하이데거와 나치즘>, 파리, Livre de Poche, 1987년, Hugo Ott, <마르틴 하이데거의 전기를 위한 자료>, 파리, Payot, 1990년, Emmanuel Faye, <하이데거 철학에 나치즘을 도입하다>, Biblio Essais, 2007년


 

(3) Victor Farias, op., p.


 

(4) Victor Farias, op. cit., p.


 

(5) 외무부 음성기록물 (AOR 16/a) Emmanuel Faye가 인용, op. cit., p.


 

(6) Victor Farias, op. cit.,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