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과 서민층, 결별의 역사

2014-12-29     쥘리앙 미쉬

 

 

공산당과 서민층, 결별의 역사

프랑스공산당(PCF)이 약화된 배경은 매우 다양하다. 혹시 새로운 의제 설정을 통해 중산층 기대에 부응하려던 의도가 당의 약화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아닐까?

 

쥘리앙 미쉬 | 사회학자

 

2014년 1월. 파리 콜로넬파비앵 광장에 있는 프랑스공산당(PCF) 당사를 찾았다. PCF 당원과 관련한 통계자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PCF 당원은 총 몇 명인가? 아니 그보다도 더 궁금한 질문은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각종 지표에 따르면, 오늘날 PCF 상부조직의 구성원 가운데 서민층 출신자는 점점 찾아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하부조직의 상황은 어떠할까? 사실 해답을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줄 알았다. ‘정당생활’이란 이름의 부서에서 2009년 이후 연령·성별·거주지·활동분야 등 당이 보유한 각종 당원 정보를 취합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자료 중에서 당원의 사회계층 및 직급에 관한 정보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령 어떤 당원이 프랑스국영철도(SNCF)에서 일하거나 혹은 항공분야에서 일한다는 사실까지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중역인지 혹은 공장노동자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당원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 무관심한 현상은 지난 30년 동안 PCF에서 나타나고 있는 어떤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PCF 내에서는 서민층을 대변하는 문제가 비록 과거에는 중차대한 사항에 속했는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부차적인 사안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해방기부터 1970년대까지 프랑스 최대 좌파정당으로 군림해온 PCF는 스스로 노동자 계급의 대변자를 자처해왔다. PCF의 지도부 대다수가 서민층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1930~1964년 PCF 당수였던 모리스 토레즈는 광부 출신이었고, 그의 후계자 발덱 로셰는 “보잘 것 없는 채소원 운영 농민”, 1969년 대선에 출마해 21%를 득표한 자크 뒤클로는 제과제빵 견습생이었다. 1945~1953년 오베르빌리에 시장을 지낸 샤를르 티용은 조립공이었고, 후임 시장인 에밀 뒤부아(1953~1957년)와 앙드레 카르망(1957~1984년)은 각각 가스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자 프레이즈반을 다루는 직공이었다. PCF는 그동안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자들에게만 허락되던 권력직에 서민층 출신자를 전격 발탁하며 한동안 프랑스 정치계의 사회적 질서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었다. 노동자 해방이라는 기획을 당 내부에서부터 실천하기 위해서는 서민 색채의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노동조건 변화로 노동자 출신 당원 급감

 

PCF 하부조직은 1970년대 이후 서민층이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휩쓸리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고용 불안정이 확대되고 실업난이 가중되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 세계는 사회적 결속력이 약화됐다. 그럼에도 이 같은 노동자 종말론만으로 당의 위기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동자는 프랑스 전체 활동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할 뿐더러, PCF 내 노동자 출신 당원 감소 추세가 노동자 계급 자체의 붕괴 속도보다 훨씬 더 가파르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에서는 1975년 820만 명이었던 노동자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7백만 명에 이르는 반면, PCF 가입 당원 수는 5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절반이 넘게 감소했다. 더욱이 공장노동자 외에도 화이트칼라에 속하는 신종 노동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특히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부류의 서민층이 등장했다. 비록 삶(공간적 분리현상이 가중)이나 노동(노동집단의 분화)의 조건이 급변하면서 서민층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좁아졌지만, 그럼에도 공장노동자나 사무·판매직 노동자를 총망라한 전체 노동자 계층은 여전히 프랑스 활동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기계기술의 발전으로 PCF의 몰락이 불가피하며 그 어떤 반성을 통해서도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없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도 단세포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노동자’란 단어가 사라진 공산당 전당대회

 

PCF가 서민층의 냉대를 받으며 최근 선거에서 참패(1980년 대선에서 15.3%에 이르렀던 득표율이 2007년 선거에서는 단 1.9%에 그쳤다)한 이유를 알고 싶다면, 먼저 이 정당이 어떤 견해를 표방하고 있으며 또 어떤 식으로 조직을 구성하는지부터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이후,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PCF는 단순히 서민층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류의 프랑스 시민을 대변하고자 했다. 사회를 계급 측면에서만 해석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시민 참여’나 ‘사회적 관계’의 재활성화와 같은 다양한 의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가령 많은 파리 외곽도시들이 몽트뢰이 시를 본받아 ‘동네’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배제’를 의제로 선택하며 탈정치성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소속 의원들은 ‘지역민주주의’의 기수를 자처하며 그것이 정치와 ‘시민’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PCF는 본래 마르크스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기본정책을 주창하던 데서 벗어나 정치계와 시민단체의 공감을 널리 이끌어낼 수 있는 인본주의 가치들을 화려한 말솜씨로 선전하는 데 전력했다. 가령 1996년 제29회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내부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렸다. “오늘날 참여, 분배, 공유, 협력, 관여, 협의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기술혁명과 정보혁명이 확대되는 한편, 사회가 복잡해지고, 노동의 형태가 바뀌고, 시민권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각 개인의 자율성을 더욱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 문명 전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현실 진단에 대한 해법으로 “인본주의와 민주주의”, “인간과 시민이 중심이 된 연대적 가치에 기초한 혁명”을 선택한 이 전당대회가 PCF 역사상 처음으로 라데팡스 상업지구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08년 정당대회에서는 ‘노동자’라는 단어가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았다. PCF는 더 이상 노동자라는 사회집단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사실상 PCF는 “공장노동자에서 기술자, 사원이나 간부, 남녀를 불문한 모든 임금노동자, 임시직 노동자, 지식인, 불법체류자, 무직자, 농민, 창작자, 학생, 연금생활자, 장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집단을 결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PCF는 계급 관계, 혹은 피지배자들의 투쟁에 관한 성찰을 포기하면서 새로운 부류의 서민층(서비스 노동자나 특히 마그레브 이주 노동자 2세대)을 아우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을 쇄신하기 위해 PCF는 먼저 당의 조직 방식부터 손보았다. 1990~2000년대 당원 감소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민주집중제(‘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줄임말로 공산주의 정당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조직 원칙을 뜻한다. 민주적인 의결 과정을 통해 당의 정책을 정하되 일단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당원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제도다-역주)의 독재적 관행에 대한 반성이 일면서, PCF는 서민층 출신자를 당 간부로 선별·양성하던 제도를 폐지하게 된다(알랑 포플라르 기사 참조). 가령 공산당 학교가 사라지거나 혹은 이 학교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민중교육의 기능이 약화됐다. 한편 민간기업의 노동자를 공산당 간부로 양성하던 제도적 장치인 ‘간부정책’도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당을 쇄신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젊은 피를 수혈하거나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자는 주장만이 논의될 뿐이었다. 조직 내에 사회집단 간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경우에도 결코 서민층 출신의 인사를 기용하는 문제가 거론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에는 공산당 학교에서 양성된 노동자가 상근직으로 일했다면, 오늘날 PCF를 책임지는 당직자는 지방자치단체와 인연(교육·직업·정당활동 면에서)이 깊은 이들이 대신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 공산당은 예전처럼 노동조합 조직망이 아닌, 지방행정기관을 구심점 삼아 새롭게 재조직되어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2013년 PCF 전체 당원의 75%는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그 가운데 23%가 지방자치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부조직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출신으로 당대표에 오른 인사는 조르주 마르셰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어졌다. 조립공이었던 그는 1970~1994년 공산당 당수(시대별로 공산당 대표를 지칭하는 단어가 달라 이 글에서도 총서기, 전국서기와 같은 다양한 용어가 혼용되고 있지만 당수로 통일-역주)가 되기 전까지 금속 노조에서 활동했다. 반면 조르주 마르셰의 뒤를 이어 당대표에 오른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지자체 운영과 관련한 일을 했다. 가령 로베르 위는 1994년 시장 출신 가운데 최초로 PCF 당수가 되었다. 당시 그는 몽티니레코르메이유의 시장이자 동시에 도의회 의원, 지방의회 의원, 전국공산주의공화주의의원협회(ANECR)의 대표를 줄줄이 역임하고 있었다. 로베르 위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마리조르주 뷔페가 PCF 당수직에 올랐다. 그녀는 플레시로뱅송 시청에서 일반 직원(남편도 시청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다)으로 일하다, 훗날 타 시청의 부시장직에 오른 뒤 이어 일드프랑스 지방의회 의원에 선출됐다.

새로운 PCF 지도자 가운데 조합운동 출신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노동조합운동이 아닌 학생운동 출신이었다. 가령 마리조르주 뷔페는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 사무국에서 활동했고, 2010년 이후 PCF 당수가 된 피에르 로랑도 프랑스공산주의학생연합(UEC) 대표였다. 소르본 대학 경제학 석사이자 전직 언론인 출신인 그는 PCF 기관지 <뤼마니테>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사실 피에르 로랑은 현대 공산당 내에서 세습정치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1970~1980년대 PCF 간부였던 폴 로랑 하원의원과는 부자지간이고, 센생드니 도 연맹을 맡았던 전력이 있는 미셸 로랑 현 PCF 당수와는 형제 사이다. 요컨대 PCF의 새 지도자들의 경우에는 노동현장에서 겪은 불평등 경험보다, 오히려 지역 연고나 정치가문이라는 출신성분이 공산당에 입당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유력인사들의 정당으로 변질된 공산당

 

PCF에서 상근직으로 일하던 당직자들은 정당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당으로부터 보수를 받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그러자 선출직에 진출해 녹을 받고 일하려는 당원들이 늘어났다. 사실상 이처럼 당직자가 다른 수입원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현상 역시 PCF의 변화를 이끈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가령 2013년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재정 보고서에 따르면, PCF의 경우 정당 소속 의원들의 기여금이 전체 재원의 무려 46%(사회당(PS)은 26%, 대중운동연합(UMP)은 3%)에 달했다. 이처럼 공산당 지도자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의원직 진출을 종용받았다. 사실 최근까지 PCF는 당직자와 의원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지어 왔다. 당직자는 PCF가 유력인사들의 당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당원들의 조직망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의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1998년 이후 도 연맹을 책임지는 당직자들이 지방의회 진출을 널리 권유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회당(PS)과의 연대에 힘입어 줄줄이 지방정부에 입성했다. 이처럼 간부들이 앞다퉈 선출직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PCF는 점차 유력의원들을 위한 정당으로 변질되어갔다.

로베르 위는 1995년 “공산당 당원의 지지만이 아니라 보통선거를 통해 임무를 위임받은 의원들을, 항시 그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당의 감시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원했다. 이제는 당대표 본인이 나서서 당의 자원을 낭비하면서까지 의원 배출과 의원들의 국정활동 지원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로 인해 현장에서 뛰는 당원들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고, 무엇보다 선거활동이 당의 최우선과제가 되어버렸다. 정당에 갓 가입한 새내기는 일반 당원으로 오래 머물지 않았고 금세 시의회 출마를 권유받았다. 그 결과 당의 현장 활동은 지속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여러 직을 겸임하는 의원들은 더욱더 당 회의에 소홀했다. PCF 도 연맹 사무실을 방문하더라도 예전처럼 당원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저녁 6시가 넘어 회의가 열리는 법도 없었다. ‘무급’으로 활동하던 당원들의 자리는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는 전문가들(상근직원, 의원모임을 지원하는 직원, 행정인력 등)로 대체되었다.

사실 의원들의 관심사는 온통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들은 차기 선거전을 준비하기 위해 홍보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한편, 지역 활동이 점차 기술적인 업무 위주로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정부행정과 관련한 일을 맡고 있는 간부들하고만 어울리게 됐다. 그 결과 공산당 의원들은 점차 일반 시민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속하게 되었고, 서민층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처지가 됐다.

 

직업정치인으로 전락한 공산당 고위직들

 

당 간부들이 스스로 대변자를 자처하던 사회집단과 소원해진 현상은 당의 현장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가령 PCF는 오랜 기간 정치적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은 지역(‘붉은 교외지역’[공산당 출신이 시장직을 맡고 있는 파리 근교지역을 의미-역주], 일부 농촌소도시 등)에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벌여왔다. 당원들은 주로 우호관계에 있는 시민단체나 조합(프랑스여성연합(UFF), 전국세입자연합(CNL), 평화운동(Mouvement de la paix), 노동자스포츠연맹(FSGT) 등), 또는 자그마한 동네나 기업 안에 조직된 소모임을 운영하는 데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1980~1990년대에 이르면서 당의 하부조직이 약화되고, 당직자들의 관심이 온통 선거에만 쏠리면서, PCF의 지역 현장 활동도 시민단체와 연계된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대중 활동은 5월 1일 노동절이나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처럼 지역 축제나 기념행사를 조직하는 데만 집중됐다.

지역 축제는 점차 정치성을 잃어갔다. 무엇보다 축제를 조직함에 있어 정당보다 시민단체나 시정부가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트르방(알리에 도에 속함) 마을에서 열린 지역 행사의 경우, 비종교친목회·축제위원회·제2의 인생 클럽, 이 세 기구가 PCF의 역할을 대체했다. 한편 1960~1970년대 50명에 이르렀던 PCF 지역 당원 수도 1990년대에 이르면서 12명으로 급감했다. 더욱이 대부분은 은퇴 농민들이었다. 당의 세대교체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자, 결국 양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공산당의 텃밭으로 통하던 이 지역의 시장직은 2001년 다른 당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농촌지역에서 활동하는 PCF 소속 의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는 각종 시민단체 활동을 활성화하는 것을 주요 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러다보니 각 지역은 난공불락의 ‘붉은 요새’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표방하는 대신, 이제는 정치성을 배제하거나 서민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진 채 시민단체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앞장 서는 도시임을 부각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가령 부르봉 라르샹볼 시(인구 2,500명 규모)가 발간하는 한 신문 사설에서 공산당 소속 시장은 “지역 경제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애를 써준 부르봉 주민들과 지역 경제주체들”에게 다음과 같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상인, 장인, 농민, 기업경영자, 자유직 종사자, 행정기관에서 일하는 공직자와 직원, 연금생활자, 그리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역민 모두가 감사와 격려를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세대교체가 끊긴 공산당, 의제설정 실패

 

현장 당원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계급투쟁은 중요한 의제로 통하지 않았다. 이제 당원들은 부의 재분배나 페미니즘, 환경, 다양성, 세계화와 같은 수많은 구체적 투쟁에 몰두했다. 미래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PCF에 동참하는 대신, 고유의 조직을 운영하며 개별적인 행사를 진행하는 각종 네트워크(교육, 이민, 유럽 등)에 참여했다. 그들은 무조건 당의 메시지를 따르는 대신 각자 자기가 관심을 둔 분야를 선택해 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처럼 당원마다 각자 세분화된 참여 활동을 벌이는 모습은 예전에 공산주의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이나 당이 중추적 역할을 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노동자 출신 당원들은 PCF 활동은 등한시한 채 노동총연맹(CGT) 활동에만 총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혹은 문화 관련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시민지원을 위한 국제금융거래과세연합’(ATTAC) 활동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오로지 지역 의원 활동에만 매진하는 당원들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식물인간 신세로 노쇠의 길을 걷던 PCF 조직에도 몇 년 전부터 쇄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먼저 2005년 EU헌법조약 반대 운동에서 승리를 거머쥔 데 이어, 2008년 선거에서는 다른 좌파 정당들과 손잡고 좌파전선을 결성했다. 1980년 이후 처음으로 PCF 지도부가 발표한 당원 수는 7천 명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30세 이하 비중도 조금 증가했다. 한편 2012년 대선전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이 다시금 대대적으로 결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PCF는 장뤽 멜랑숑 좌파당(PG) 당수를 지지했는데, 그는 선거에서 11% 득표율을 기록했다. 전 사회당 출신 정치인인 장뤽 멜랑숑은 과거 공산주의와 반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견해를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데 그쳤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사회적 대립이라는 의제를 다시금 꺼내들며 급진적인 주장을 펼쳐보였다.

좌파전선과 연대한 덕분에 PCF는 2012년 대선과 2009년, 그리고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참패하는 불상사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2012년 총선이나 2014년 시의회 선거와 같이 좌파전선이 아닌 개별적인 당을 더 앞세운 선거에서는 번번이 저조한 성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실 개별적인 당보다 좌파전선을 앞세우는 전략은 무엇보다 공산당 조직 내에 당직자보다 의원들의 영향력이 확대되거나 혹은 사회당(PS)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등 각종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오늘날 PCF는 좌파전선으로 인해 기존의 프랑스공산당-사회당(PCF-PS) 좌파 연대 구도를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령 2014년 3월 시의회 선거에서 PCF는 PG(좌파당)과 극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좌파당이 1차 투표부터 PS를 배제한 좌파전선만의 단독 후보를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PCF 내부적으로도 PS와의 연대에 반대하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면서 내홍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PCF 소속 의원들이나 혹은 PCF 지도부는 대부분 자기 당 조직이 서서히 몰락하는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공산당이 장악한 시장직이나 혹은 다른 좌파 연합 정당들이 점령한 시청의 부시장직을 사수하는 데에만 골몰할 뿐이다.

 

 

글·쥘리앙 미쉬 Julien Mischi

프랑스 국립농업연구소 사회학 연구원으로, <무장해제된 공산주의. 프랑스공산당(PCF)과 서민층>(2014)을 저술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상자기사1>

시몬 베유, 정당 폐지에 관한 소고, 1943년

 

진실, 정의, 공익을 잣대로 정당을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그 전에 먼저 정당의 본질적인 특성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 본질적인 특성이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정당이란 집합적 정념을 만들어내는 기계다.

정당이란 정당을 구성하는 인간 개개인의 정신에 집합적 정념을 불어넣도록 구성된 조직이다.

모든 정당의 최고 목적은, 그리고 최근 분석에 따르면 유일한 목적이기도 한 그 목적은 바로 당의 성장이다. 그것도 한계가 없는 무한한 성장이다.

이 세 가지 특성에 따라 모든 정당은 잠재적으로 독재적인 성격을 지니며, 또한 독재적인 성격을 띠기를 희구한다. 만일 그렇지 않은 정당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그 주변 정당이 그에 못지않게 더 독재적이기 때문일 뿐일 것이다. (중략)

가령 어떤 정당의 일원(하원의원, 하원의원 출마자, 혹은 일반 당원)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고 치자. “어떤 정치 문제나 사회 문제를 검토할 때에도 항시 제가 정당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잊고 오로지 공익과 정의만을 생각하겠습니다.”

사실 이 말을 곱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같은 당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당 당원조차도 그를 배신자라며 손가락질할 것이 뻔하다. 그나마 덜 적대적인 이들도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정당에는 왜 가입한 건데?”(물론 이 경우 그는 정당에 가입하는 순간 공익과 정의만을 추구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순진하게 고백하는 셈이 될 터이다) 아마 앞에서 우리가 예를 들었던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정당에서 쫓겨날 것이 뻔하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당의 공천을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니 분명 선거에 뽑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중략)

맹목적인 정당정신은 정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는 한편, 선량한 사람조차 무고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괴롭히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그런 정신을 만들어내는 제도를 없앨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마약은 금지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상 세상에는 많은 상습적인 마약 복용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만일 국가가 소비자들의 욕구를 부추기기 위해 광고포스터를 내걸고 모든 담배 가게마다 아편이나 코카인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아마도 마약 복용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당이라는 제도는 거의 순수에 가까운 악을 형성한다. 정당이란 원칙적인 면에서도 악하며 동시에 실제 현실에도 나쁜 해악을 끼친다.

그러니 역으로 정당을 폐지하는 것은 거의 순수에 가까운 선을 행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당을 폐지하는 것은 원칙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한 일이지만, 실제 현실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상자기사 2>

유권자의 증오

 

오늘날 정치가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축소하는 것이지 절대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파리드 자카리아(미국의 언론인 겸 에세이스트), 2003년

 

민주주의 체제가 평화를 이룰수록, 치열한 논쟁은 사라지고 내전이 발발할 위험은 수그러들며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줄어든다. 지속적인 정권교체는 민중이 정치에 더욱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만들지만, 사실상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지혜라고도 볼 수 있다.

-파트릭 드브지앙(전 프랑스 지역자유담당장관), 2002년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장기적인 해법이 필요하지만, 민주적 절차를 비교적 단기간으로 나누어 진행하다 보면 많은 해악이 초래될 수 있다. (중략) 그것은 구조적으로 유권자에 대해서도, 선출 대표에 대해서도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기관에 권력을 위임하는 것과 같다.

-지안도메니코 마조네(이탈리아 경제학자), 1996년

 

민주주의는 너무도 중대한 문제라서 그저 정치지도자에게나 혹은 심지어 유권자에게만 마냥 맡겨둘 수는 없다.

-필립 페팃(아일랜드 철학자), 1998년

 

<상자기사 3>

계급 간 협력이라고?

 

1900년 11월 26일 개최된 공개토론회에서 쥘 게드는 사회당 당원인 알렉상드르 밀랑이 피에르 발덱루소가 이끄는 이른바 ‘공화주의 수호’ 내각에 참여(발덱루소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사회주의자 밀랑의 입각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 내각 참여를 반대하는 게드파와 실리적인 측면에서 이를 찬성하는 조레스파로 분열되어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역주)하는 문제에 대해 열렬히 반대했다. 반면 장 조레스는 밀랑의 입각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 그렇습니다. 사회당은 모든 자본주의 체제에 언제나 철저히 반대하는 정당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본주의의 부당함을 하루 빨리 세상에서 몰아내는 데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 선전활동과 선거운동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회당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회 체제에 반대하는 정당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양한 부르주아 정당, 다양한 역대 부르주아 정부들 사이에 각기 구분을 둘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온갖 과거의 세력이 공격적인 형태를 띠고 회귀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봉건제도의 야만성과 교회의 절대 권력이 다시 공격적인 양상을 띠고 회귀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화주의의 자유가 위태로운 상황인 경우라면, 신앙의 자유가 위기에 처한 경우라면, 낡은 편견이 망령처럼 되살아나 인종 간 증오나 과거 수세기에 걸쳐 지속된 참혹한 종교전쟁을 부활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과거로 회귀하기를 원치 않는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손을 맞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자의 책무,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책무라고 하겠습니다. (오래도록 뜨거운 박수갈채가 이어짐)

저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유산이자 규범이 되어야 할 이 기본적인 진실들을 다시금 여러분 앞에 환기시켜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도 놀랍기만 합니다. 사실 마르크스도 본인 입으로 직접 이런 간명하고도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와 한편이 되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기도 하고, 부르주아지와 한편이 되어 귀족이나 성직자들에게 대항하기도 한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쏟아짐)

 

<상자기사4>

정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레옹 블룸, 1920년 투르 전당대회(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사회당 존속 여부를 놓고 내홍이 깊었던 시기에 열린 전당대회로, 이후 사회당 일부 당원들이 당을 나가 프랑스공산당을 창당했다-역주)에서

 

저는 이 자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하여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무너뜨리고 수립하는 정치적 지배권력-역주)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라면 원칙적으로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널리 지지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우리 당 강령에 포함시켰던 것이고 또한 이를 선거공약으로도 내세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나 혹은 그 실체에 대해 전혀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 더욱이 저는 마르크스와, 그리고 최근에는 모리스 힐퀴트(미국 사회당을 창당한 정치 지도자-역주)가 기술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자고로 민주주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렇습니다. 그것은 당이 행사하는 독재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당처럼 체계적인 당이 행사하는 독재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당신들의 당이 행사하는 독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호) 그것은 의지, 민중의 자유, 대중의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의 행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일개 개인은 배격된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독재를 의미합니다. 중앙집권적인 당, 모든 권력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다 이내 은밀한 형태로든 혹은 공공연한 형태로든 어떠한 위원회의 손아귀에 결국 집중되고 마는 그런 당, 그런 당이 행사하는 독재는 결코 아닙니다. 당의 독재, 맞습니다. 계급의 독재,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명인사이건 혹은 유력인사이건, 일개 개인이 행사하는 독재는 결코 아닙니다. (모든 좌중 사이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