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 제국의 종언 확신

2009-05-06     한승동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ㆍ이원기 옮김ㆍ민음사 펴냄ㆍ1만5천원
에릭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가 출간된 것은 2007년, 그러니까 1917년생인 그의 나이 아흔 살 때였다. 영국 공산당원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이력의 이 유명한 학자를 생각할 때 나이 또는 연륜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20세기를 특징짓는 획기적 사건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그는 살아 있는 동안 70여 년에 걸친 현존 사회주의 실험의 탄생과 종말을 자기 삶의 일부로 체험하고 지켜봤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그가 말하는 ‘단기 20세기’의 시작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30여 년에 걸쳐 미국이 주도한 이른바 ‘황금시대’, 그리고 인구폭발과 과학기술 혁명, 신자유주의, 미국 패권의 흥망과 9·11 사태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기의 시작도 직접 지켜봤다.
 
소련의 흥망과 미국의 성쇠 지켜봐 
세상과 사물의 이치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나이인 지금 20~30대에게, 예컨대 30~50대에겐 엊그제처럼 생생할 ‘6월 항쟁’, ‘87년 체제’, ‘광주항쟁’조차 ‘10·26 사건’,  더 거슬러 올라가 ‘4·19 혁명’, ‘6·25 전쟁’, 심지어 1910년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도 별 다름없는, 실감나지 않는 역사책 속의 먼 과거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홉스봄이 얘기했듯이 그런 사건과 동시대를 살고 느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 시대에 대한 ‘감’이 있고 그만큼 시대 상황을 오판할 가능성이 적다. 홉스봄이 20세기 최고의 역사가 반열에 들게 된 데는 그가 오래 살았다는 세월의 무게도 한몫했을 것이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마감하는 ‘단기 20세기’를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로 불렀다. 인류 역사상 다른 어느 시대에도 비할 수 없는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한편에선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 기술 진보와 환경 파괴가 진행됐다. 원제가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인 <폭력의 시대>는, 연륜에 못지않게, 영국에 이주한 유대인과 오스트리아 거주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고 독일과 영국, 미국 등 세계 곳곳을 떠돈 마이너리티로서 지역과 인종, 조직(심지어 공산당 내부에서조차도)과 시종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드문 객관적 시각의 역사학자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홉스봄이 자신이 살아낸 한 세기의 체험을 토대로 “세 번째 천 년의 시발점에서 세계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조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토대로 2000~2006년에 집필한 이 책은 오래 산 것을 역사학자로서 큰 행운이라 여기는 그의 완숙기 저작이자,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등 그의 전작들 내용을 보강하고 최신 정보에 맞게 수정하는, 어쩌면 마지막 저작이 될지도 모르는 책이다.
 
20세기 최고 역사가 대안 모색
전쟁과 평화, 세계 제국들의 과거와 미래, 민주주의 전망, 정치적 폭력과 테러 문제를 화두로 삼은 이 책에서 홉스봄은 특히 소련 몰락 뒤 유일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행태에 주목한다. 2002년에 낸 자서전 <미완의 시대>(Interesting Times)에서 “늙은 회의주의자”라 자칭했던 홉스봄의 미국관은 비관적이다. 기존 가치체계는 무너졌지만 여전히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민주주의나 민족국가 등의 미래도 낙관하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던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이 그야말로 한 세대 만에 무너지는 걸 지켜봤던 ‘제국주의 혐오자’ 홉스봄은 미국이 ‘과대망상’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그나마 세계가 야만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우리가 과거의 제국주의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다고 해도 단일국가(미국)가 세계적인 패권을 지속할 전망은 더더욱 없다. 이제 제국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우리는 21세기의 세계화된 지구촌을 관리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버락 오바마의 민주당 정권이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