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정치교육, 어떻게 이뤄지나
프랑스의 정치교육, 어떻게 이뤄지나
알랑 포플라르|지리학자
지난 4월 11일, 리옹의 공제조합 본부 건물 앞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붉은 글씨로 ‘레온 트로츠키회’라고 쓰인 노란 현수막이 건물 외벽에서 나부끼고 있다. 한쪽에서는 ‘노동자 투쟁’(LO)의 운동원들이 소식지 <계급 투쟁>을 배포하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입장권을 잘라내고 있다. 러시아 혁명가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그 날 저녁 유럽에 관한 강연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강연실 내부에는 약 50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피에르 롸양과 장 클로드 가로, 그리고 당원들의 설명이다. “노동자 투쟁(LO)에서 교육은 핵심입니다. 이는 조직화의 원칙입니다. 우리 당의 역할은 노동자운동의 문화를 전달하고 불순한 사상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다.
구소련 역사 전문가이자 독립노동당(POI)의 회원인 장 자크 마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0년대 및 70년대 노동자 투쟁(LO)과 혁명공산주의 전선(LCR), 또 국제공산주의회(OCI)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시행한 교육 체계는 많은 부분이 비슷했습니다. 당에 가입하려면 우선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혁명공산주의 전선(LCR)에서는 ‘적색회’가 있었고, 국제공산주의회(OCI)에는 ‘혁명 연구회’가 있었지요. 모두 교육 모임인데 횟수나 기간은 통상 교육담당자의 상황에 따라 6개월에서 1년 정도로 달라집니다. 1주일 기간의 여름학교가 가장 많았는데 이때 미리 선발된 회원들을 한데 모아 교육시켰습니다. 여름학교에서는 정치 개입 전략의 가장 즉각적인 문제들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들을 화두로 던졌지요. 가령 ‘생산력은 증가를 멈췄는가’와 같은 질문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학교들이 지적 활기가 넘쳤던 이유는 분명 트로츠키주의자 모임 간의 분열과 프랑스공산당(PCF)에 대한 이념 투쟁 때문이다. 1960~70년대 이후로는 신 반(反)자본주의당(NPA)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CCI)이 이를 답습하고 있다. 많은 잡지와 간행물, 신문을 발행하고 독립 노동당(POI)처럼 신 반자본주의당(NPA)도 회원전용 서점을 갖고 있다. 공제조합 본부 건물 안 판매용으로 전시된 책 중에는 다양한 문학 서적도 많았다. 롸양과 가로는 “운동원의 교육에서 소설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존 스타인백, 에릭 마리아 레마르케, 잭 런던, 또 파나이트 이스트라티의 작품들은 마르크스의 명작만큼 노동자 착취에 대한 이해를 돕지요”라고 설명한다.
퇴락하는 좌파진영의 운동방식 고민
그러나 다른 좌파 진영의 정당들처럼 노동자 투쟁(LO)도 회원의 수가 급속히 줄고 연령대도 노령화하면서 이 같은 양성 교육도 쇠락했다. 크게 보면 노동자운동의 쇠락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다. 19세기 일어난 노동자운동은 늘 교육 체계로 무장했다. 연설학교, 민중대학, 여름학교 등은 그들이 행한 운동 중 하나다. 프랑스에서 프랑스공산당(PCF)은 가장 선진적인 교육 방식을 만들었다. 사회학자 나탈리 에튀잉의 설명이다. “프랑스공산당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과격화가 한창이던 1920년대부터 독일의 사민당 학교에 영감을 받아 등급화되고 중앙집권적인 학습 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마을 단위로는 초등학교, 도 단위로는 연방학교, 전국 단위로는 중앙학교를 두고, 전국 및 지역 연방의 일부 간부들은 모스크바의 국제 레닌 학교(ELI)에서 1년간 거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다른 정당들과 달리 프랑스공산당(PCF)의 간부 선정은 사회 변화를 반영합니다”라고 에튀잉은 말한다. 모리스 토레즈부터 조르쥬 마르쉐까지 프랑스공산당(PCF)의 ‘사회학적 민주주의’(1)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 노동자 계급 출신의 간부들을 낳는 데 기여했다. “당시 지도자들은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불가피하게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작동하면서 운동원들 간에 사회적 구분을 낳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대체 학력 자본을 제공하여 사회적 지위 상승을 보장하면서 이들이 어떻게든 사회체제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공산당 교육 체계의 시행에는 다소 난항이 있었다. 당의 기조를 세우는 데 지식인의 자율성의 문제와 부딪혔기 때문이다. 교육학자 셀레스텡 프레네와 같은 일부 운동원들이 이전에 이론화한 교육 사상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교수 강의, 보충학습, 평가, 점수 등은 정당의 교육 과정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운동원들은 여기에 순응했다. “사장의 지배보다는 당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2)
이러한 과거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철학과 마르크스 경제 수업을 포함한 주말 교육은 이를 원하는 지방 단위 조직에서나 이루어진다. 간부학교의 경우 로베르 위가 프랑스공산당을 이끈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폐지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거의 구조와 닮은 점은 거의 없다. “4개월 과정의 간부학교가 마지막으로 열린 때가 1994년이었습니다. 3년 후 연수 기간은 단 5일로 제한되었습니다. 결국 드라베이 중앙학교는 2002년 문을 닫았지요”라는 에튀잉의 설명이다. 이 같은 급변화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문제에 있다. “선거 득표율이 급락하고 운동원 수가 줄면서 재정 문제와 조직 지도 체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프랑스공산당은 사회계층 면에서 가장 다원적인 정당이지만, 간부학교 폐교 이후 당원의 권리를 보장하던 당 대표부 구성 메커니즘은 약화되었다. “대표급 인물 중 노동자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지요”라고 에튀잉은 덧붙였다.
한계에 봉착한 중앙집권식 당원교육
약식화되었음에도 여전히 공산당 학교는 다른 여러 정당들에 하나의 모델이다. 좌파당(PG)은 현재 중앙집권식의 ‘당원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4일에 걸친 2번의 세션 동안 프랑스 각지에서 온 당원들은 각각 1시간 반씩 35개의 강의를 듣는다. 내용을 보면 마르크스 경제학, 혁명 역사학, 극우 역사 등과 같은 이론, 제6공화국과 생태주의 계획경제와 같은 프로그램, 또 ‘권리와 안정을 위해 싸우기’와 같은 토론회를 조직하는 등의 실무를 배우는 내용이다. 이러한 교육 체계는 브뤼노 르프랭스의 출간물 전집과 각종 언론 자료(<A Gauche>, <Télé de gauche>, <Radio de gauche>와 같은 신문들)들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보완적으로 민중대학의 교육 및 정치 형태를 재현한 장 뤽 멜랑숑의 미팅과 블로그가 있다.
대부분 젊은이들과 정당 경험이 전무한 당원들로 구성된 좌파당(PG)은 이들을 교육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부 커뮤니티는 열악할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다. 지역 정당 서기의 말이다. “모르비앙 지역의 경우 도청에 선거인 명부를 등록하거나 하는 등의 행정 지원 등의 면에서 공산당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파리 18구역 좌파당 본부에 모인 당원들 앞에 전국구 교육 담당 서기인 브놔 슈네켄뷔르제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단지 감정적으로 모인 개인들이 아니라, 전투적 질서를 갖춘 정당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자운동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운동가여야 합니다. 노동자운동 문화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의지만 있다고 충분치 않습니다.”
라 센느(la Seine)나 르 노르(le Nord)처럼 강력한 노동자 연대조직을 제외하고, 국제 노동자 프랑스 지부(SFIO)와 사회당(PS)의 교육 체계도 프랑스공산당의 경우처럼 통합된 적이 없었다. 역사학자이자 사회당 이사진 중 하나인 알랭 베르구니우는 이렇게 본다. “간행물, 여름학교, 민중대학 등 교육의 사회주의는 늘 있어왔다. 그러나 정작 정당의 학교와 교사, 또 프롤레타리아의 매뉴얼만으로는 ‘기존의 사회에 대한 반사회’ 구축의 필요성을 증명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공화국의 완성이라고 여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계몽된 시민교육은 공립학교로 충분하다고 간주했다. 1980년대에 걸쳐 프랑스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아지면서 정당의 교육은 점차 소홀해졌다. 동시에 사회당과 노동자 진영 간의 분리로 당 내에서는 실력주의에 대한 신뢰가 강해졌다. 따라서 기존 사회와 점점 동질화되어가는 조직에서는 점차 운동가 경력 대신 학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파리정치대학 시앙스 포, 국립행정학교 에나(ENA), 고등사범학교(ENS), 파리경영대학(HEC) 학벌은 특혜(3)를 받는다.
“사회당은 이제 더 이상 문화 자본에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이제는 학위를 따거나 스스로 연수받아야 문화자본을 얻을 수 있다. 집단 지성으로서 정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위문화와 우리들이라는 공동체 의지가 존재했던 당 내 좌파 진영에서조차 이러한 지성의 방향 상실을 볼 수 있다”라고 사회학자이자 사회당원인 레미 르페브르는 말한다. 1971년 에피네 전당대회 이후 교육은 중요한 우선 과제가 되었다. 피에르 족스(4)는 당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운동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국제 노동자 프랑스 지부(SFIO)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전국구 교육 서기를 담당한 그는 당시 그에게 허용된 예산보다 세 배를 늘렸고,(5) 이를 통해 지역 단위의 지도 체계를 굳건히 다지고, 사회주의 잡지인 <Nouvelle Revue Socialiste(NRS)>를 출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 핵심적인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당의 ‘파(派)’였다. 이들은 교육 세미나를 만들고 여름학교를 짜고 각종 간행물을 편집했다. 장 피에르 슈베느망의 측근들을 위한 <Les Cahiers du CERES>, <Repère>, 또 장 포프렝 계파를 위한 <Les Cahiers de l’ERIS>와 <Synthèse Flash>, 아니면 미쉘 로카르를 지원하기 위한 <Faire>가 그랬다. 이념적으로 전략적으로 뚜렷이 대비되는 반대 세력들이 당 내의 계파로부터 당의 지성이 한데 융화되는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1990년 사회당의 렌 전당 대회 이후 지리멸렬한 연대는 이러한 시대를 종식시켰다.
스타일에 치중하는 신자유주의적 당원교육 도입
1980~90년대의 쾌락주의의 풍조에 휩쓸린 사회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발을 담갔다. 사회주의 본위의 법칙은 이제 더 이상 지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베르구니우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만드는 사회주의 잡지 <La Revue socialiste>만 보면 끝입니다. 그 안에는 추상적으로 불행이 묘사되어 있지요. 우리가 이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회당 지역 간부 상설 대학의 최근 학기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지난 4월 있었던 마지막 3, 4주 교육에 사회당은 경제학자 질 라보에게 강의를 맡겼다. 그는 당 본부 대회장에 모인 ‘스테판 에셀 추모’ 당원들에게 경제학파에 대해 설명했다. 45분간의 시간 동안 그는 신고전주의학파, 케인즈주의, 마르크시즘, 칼 폴라니의 생태사회주의에 대해 발표했다. 스타일에만 치중함을 보여 주는 황당한 일이었다.
소련 모델이 추락하고 위대한 민중 해방 이야기가 끝이 난 이후 시대의 분위기에 이념적으로 적응한 사회당은 더 이상 민중 행위를 밝혀 줄 자체적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제 연수 교육은 사회 변화를 위한 구체적 방법 중 하나가 아니다.
반전체주의와 ‘나르시즘 문화’(6)의 영향으로 프티부르주아 지식인들은 노동운동가 표상에 대한 신뢰를 갖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모집을 통한 조직 참여 활동과 일련의 의례로 여겨지던 교육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각 운동원 하나하나를 이론가로 격상시킨다는 조직의 데마고기’(7)가 나온다. 사회주의자들의 예비 선거 전향이 보여주듯이(8) 여론과 설문 조사에 특별히 민감해진다. 그렇다면 예비 선거 참여자들과 당원 및 지지자들과 같은 위치라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이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것인가?
수단화된 사상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녹색당이다. 사회학자이자 클라마르의 생태운동가(9)인 바네사 제롬은 이렇게 말한다. “녹색당에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로 인한 내부 조직 부재로 연간 당원들의 이탈율이 30~50%로 상당합니다.” 2004년 이후 지구단위 교육으로 이러한 이탈을 막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정말 잘 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레프티마탱(Les Petits Matins)>이나 <르 파사제클라데스탱(Le Passager clandestin)>과 같은 독립 출판사, 또 <에코르브(Ecoreve)>, <뮐티튀드(Multitude)>와 같은 잡지들 덕분에 녹색당의 사상을 알릴 수는 있지만, 녹색당의 서점인 에코디프(Ecodiff)는 2010년 이후로 사라졌다. “어쨌든 운동원들이 이런 책들을 잘 안 읽습니다. 자크 엘륄이나 앙드레 고르즈를 아는 당원들이 드뭅니다. 녹색당과 유럽생태녹색당(EELV)의 당 정관만 비교해 봐도 우리 당이 지적 능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력이 높은 편인 생태주의자들에게 정당학교는 좋게 봐줘도 소용이 없고 최악으로는 위험하기까지 보인다. 녹색당의 선택은 그들이 노동운동 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혐오감을 드러낸다. “녹색당만큼 반공산주의자들이 많은 곳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제롬은 말한다. “프랑스공산당(PCF)은 이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생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자료집들뿐 아니라 공산당의 운동 방식 때문입니다.” “녹색당에서는 결코 당원들을 강제로 붙잡아두려 하지 않습니다. 녹색당은 자율성과 책임감이 우리의 근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자유분방한 녹색당원들의 좌파 혐오증
신념의 자유에 대한 믿음과 정당의 소박한 규모 유지를 기조로 삼은(10) 유럽생태 녹색당(EELV)은 민주운
동(Modem)과 함께 너무 서열화된 구조에 대해 같은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다. 청년 민주주의(YDE) 대표 앙투안느 카레트는 사무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 우리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희한하다는 반응으로 웃었다. 조직의 연혁에 대한 교육? “아뇨,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입회 약관에 나와 있습니다.” 정당 신문은? “월급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데요.” 당원들로 구성된 일련의 정당 차원의 서비스는? “그걸 왜 합니까? 우리는 전혀 시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운동(Modem) 학교는? “잘 아시다시피 우리는 실용주의자이지 이념가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와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좌파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중도파 당원들은 지식 교육의 전통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몇 번 중앙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프랑수아 베이루는 2~3주마다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해 강연할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무거워집니다.”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기보다는 유지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는 정당에서 당원 교육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듯하다. “교육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출 임원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선출되는 것입니다. 임원으로 선출되면 우리 당의 교육 기관인 IFDI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카레트는 말한다.
민주주의 및 독립주의자 양성소(IFDI)는 내무부 및 지역 의원 교육 국가위원회로부터 합의 체결된 몇 개 기구 중 하나다. 국민전선(FN)의 지역의원과 정치 간부의 교육연구소(Iforel), 대중운동연합(UMP)의 지역민주주의 국가연합(ANDL), 사회당의 콩도르세 연구소, 유럽생태녹색당(EELV)의 세디(Cedis), 프랑스공산당의 선출의원을 위한 정보 기록 연구 교육센터(Cidefe)도 마찬가지다. 정당의 당원들에 대해서는 이런 교육이 전무한 반면(가령 노조의 경우와는 반대로), 선출 의원들에 대한 교육은 지방 분권화에 관한 법에 힘입어 법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가 된 것이다.
정치의 직업화를 상징하는 ‘양성’이란 단어는 정당의 용어에서 ‘교육’이라는 용어로 대치되었다. 전자가 직업적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면 후자는 문화를 배우는 전반적인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시에 정당 업무에 대한 외주화가 빈번해지면서 정당 당원들의 노하우는 도둑맞는다. 정치 클럽과 싱크탱크에서는 이론을 만들고, 회의 기획 구성, 설문 시행과 분석, 포스터 게시 등과 같은 기술적 업무는 외부 서비스 업체가 대행한다. 결국 5공화국 기관들의 대통령 중심주의와 기성화로 사상과 이론을 생산하고 이를 교육을 통해 당원들에게 전달할 필요성 모두 불필요해지면서 정당 내 역할 분리를 고착화시켰다.
유연성을 강조한 우파정당의 교육방식
“자비에! 자비에! 자비에!” 릴의 부유한 지역 마르크 앙 바루엘의 한 스테디움에서 청년 대중운동(Jeunes Populaires) 당원들은 초조히 발을 굴렀다. 우비와 우산을 쓴 자비에 베르트랑이 성큼 다가온다. 대중운동연합(UMP)의 교육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청년 대중운동의 봄’ 2014 프로그램은 유럽을 주제로 총회와 소회의로 구성된 강연을 기획했다. 분위기는 전혀 학구적인 진지함이 아니었다. 뭔가 적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연단에 선 의원들은 사상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보다는 멋진 말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지난 수십 년간 우파 정당들의 조직화 운동이 활발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지도 체제나 결집, 사회 운동의 기능은 좌파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역사학자 르네 레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사회에서 이미 굳건한 지지와 연계를 보유하고 있으므로(학교, 언론, 소수 엘리트층), “우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정당을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수아 필롱, 파트릭 뷔송이 반복적으로 마르크스 철학자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 헤게모니 이론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대중운동연합(UMP)의 주변부는 그러한 운동성을 보여준다. 등 뒤로 젖은 후드를 걸친 한 무리의 젊은 당원들은 말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좌파 운동권을 보면 너무 판에 박힌 이야기만을 합니다.” 또 다른 당원은 “로봇 같아요. 제가 보기엔 자신들 스스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또 다른 젊은이는 “우파는 좌파처럼 교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사상이 있지만 그러한 사상을 발견하는 것은 운동원 스스로예요. 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지 정당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결론 내린다. 아마추어인가? 우파인 대중운동연합(UMP)의 전국 청년 대표인 스테판 티키는 한 손으로는 전화기 번호를 누르면서 한 눈은 TV 화면에 고정시킨 채 말한다. “우리는 UMP의 교육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의 최우선과제는 무엇보다도 선거에서 이기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우리의 힘은 UMP 각자가 우리의 문화 지식을 간직한 데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배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구글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정보 채널을 통해서 배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치 새로운 정보 통신 기술이 낙후된 정당의 교육 구조를 혁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범위에서 변화는 있지만(미디어 훈련, 사회관계망 이용) 이는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사회학자 필립 리우토르는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UMP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증가했다. 설문조사에 대한 집착과 인기 경쟁 때문에 다수 합의를 강조하는 내용의 특정한 연설 형태들을 낳게 되었다. 사르코지가 세골렌 루아얄의 ‘공정한 질서’에 대해 그의 연설에서 장 조레스를 언급하면서 비판한 것처럼 미디어 중심주의는 이데올로기 간의 격차를 없애버렸다”라고 말한다.
‘삼각측량법(정치적 라이벌의 말 중에서 선거권자들이 이탈할 수 있게 할 빌미를 잡는 기술)’의 신봉자이기도 한 극우파도 새로운 미디어 수단을 이용해 ‘반 계몽’ 사상을 다듬어 전파시키고 있다. 국민전선(FN)에서 1980년대 말 교육을 담당한 브뤼노 메그르는 이렇게 회고한다. “FN에 갓 들어갔을 때 극우파라는 실체가 마침 모습을 드러낸 때였습니다. 가는 곳에 따라 국민전선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전통 가톨릭 신자들의 편에 서기도 하다가 소규모 상공업자 편을 들다가 또 프랑스화된 알제리 찬성자의 편에 서는 것 같았지요. 내가 맡은 일은 당의 기조와 연설, 프로그램을 통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48시간 동안의 비공개 세미나를 거쳐 당 간부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의 교육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특히 언어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경쟁자들의 단어를 이용하지 않도록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했지요. 가령 ‘배제’보다는 ‘선호’, ‘사회 계급’보다는 ‘사회 직업 계층’ 등의 용어를 썼고 ‘정체성’과 같은 개념어처럼 정치 논쟁에서 우리만의 용어를 고안했습니다.”
국민전선의 내부 문서를 보면 이미 20년도 더 전에 이러한 전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11) 문서에는 조직의 입장과 처신을 기술하고 있다. “선동적이고 광분되고 격렬하기보다는 안정적이고 침착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이는 게 낫다.” 또한 차림새와 관련해서도 ‘스킨헤드와 같이 대머리 스타일’이나 ‘어떤 상징적인 배지가 있는 베레모나 군대식 옷차림’은 금지되었다. “간단히 말해 당에 대한 악마적 이미지를 없애야 했다”라고 메그르는 결론짓는다. 1998년 그가 FN을 떠난 후 당의 재정이나 당원들을 더 이상 관리할 수 없었지만 그가 추천한 전략은 이후 성공을 거두었다.
당 연합 조직 내에 교육은 있지만 국민 전선에서는 7만여 명의 당원들에게 공동 이념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우선 과제는 아닌 듯하다. 국민 전선의 본부에서 만난 교육 담당의 중앙 서기인 루이스 알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재원이 생기자마자 캠퍼스 블루 마린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간부들에게 열린 디지털 포털로, 기술 관련 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마키아벨리와 같은 고전에 대한 강연 노트 파일, 정치사에 관한 자료 파일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FN의 역사를 맡고 있습니다.” 한창 만들고 있는 디지털 포털은 ‘접속 덕분에’ 충성도 높은 당원들을 추리는 데도 유용하고 향후 출판사와 국가사상클럽을 만들어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당원교육 없이 경력 스펙만을 제공하는 극우 FN
FN은 노동당과 같은 모습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수많은 일들 중 당원들의 학업 보완은 없다. 단지 경력 관리 플랜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는 신규 당이지만 정치할 기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제공하지요. 파비엥 앙젤만의 경우처럼 말입니다”라고 알리오는 말한다. FN은 극우파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일련의 단체들에 이론 교육을 맡겼던 것 같다. Civitas부터 하나의 청년단(12)처럼 FN과 경쟁 및 보완관계를 맺고 있던 반혁명 단체들은 이제 FN의 정치적 입지에 기여하고 있다. 적어도 극우파에게 여론 시스템 때문에 교육 전체를 포기하는 어두운 시대는 아닌 듯하다.
(1) Bernard Pudal, <해체된 세상, 1956년부터 오늘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 Editions du Croquant, BellecombeenBauges, 2009년
(2) Nathalie Ethuin, ‘공산주의 운동의 이념화에 대해, 프랑스공산당 학교에 대한 조사의 단면(1970~1990)’, Politix, n°63, Paris, 2003년
(3) Rémi Lefebvre, ‘Faire de la politique ou vivre de la politiqu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0월호
(4) Frédéric Cépède, ‘벤치 위의 사회주의자’, <Cahiers d'Histoire> 79호, Paris, 2000년
(5) 1973~1979년, Pierre Simon, ‘정당이 연수 학교가 될 수 있을까? 사회당의 실례’, François Dubasque(sous la dir. de), ‘연수 학교가 직면한 문제들-17세기에서 21세기까지’, L’Harmattan, Paris, 2013년
(6) 이 표현은 Christopher Lasch가 썼다.
(7) Bernard Pudal이 쓴 표현을 Nathalie Ethuin이 강연에서 인용 ‘운동주의의 진화’, 2010년 8월
(8) Alexander Zevin, ‘싱크탱크로 자리 잡은 ‘아이디어 박스’ 테라 노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2월호
(9) Vanessa Jérome, ‘다른 식의 운동원, 녹색당과 EELV의 참여에 관한 정치 사회학과 운동원의 경력’, ParisI 대학 논문 Panthéon-Sorbonne, Paris, 2014년
(10) Julien Fretel, ‘가톨릭 교도들이 정당에 갔을 때, UDF의 당원들을 통해 본 모순적 환상의 구성부터 실행까지’, <Actes de la recherches en sciences sociales>, Paris, 2004년
(11) Frédérique Matonti, ‘국민전선의 간부 교육’, Genèses, n° 10, Paris, 1993년
(12) Samuel Bouron, ‘두 얼굴의 운동주의: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교육 정책(하나의 청년단)’, Agone, n° 54, Marseille, 2014년
<박스기사> 1
맥킨지 방식의 사회당 컨설팅
연수 교육도 다른 분야처럼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일까?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디지털 전략 벤처 기업 리지 뮐러 퐁의 사장인 아서 뮐러는 말한다. “우리는 미국의 오바마 선거에서처럼 상당한 규모의 기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는(도어 투 도어) 캠페인을 이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이 30대의 사업가는 사회당의 지휘부와 접촉하고 있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사회당 지도부는 이들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하버드와 MIT 대학 출신인 점이 마르틴 오브리(사회당 당수)의 선택을 받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이 작은 회사는 120명의 ‘교육가’, 만 명의 ‘집결 전문가’와 8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모은다. 그 결과 “5백만 세대의 문을 두드렸다”라고 한다. 기업의 경영 세미나를 본뜬 교육 프로그램은 문화적 충격을 가져왔다. “우리가 역할을 나눠 맥킨지의 방식으로 파워포인트, 수치화된 목표를 갖고 일을 진행하면 대부분의 당원들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 같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을 바꾼다.” 보스턴 스타일의 이 기업에 대해 언론의 관심과 조명은 상당했다. “도어 투 도어는 TV에서 다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언론을 통한 완벽한 성과다.” 이후 이 세 명의 미국 유학파는 ‘선거 컨설팅과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우리는 꽤 상당수의 지역 단체들과 일했다.” 서비스 비용은? “소프트웨어의 경우 400~4,000유로이고 컨설팅의 경우 1만~3만 유로다.” 2014년은 사회당과 독점 계약을 맺었는데 이들은 이미 그 다음을 생각하고 있다. “컨설팅과 관련해서는 좌파와 일을 할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경우 아마도 우파 쪽에도 판매할 수도 있다.” 유럽사회당과 독일의 녹색당과 이미 계약을 체결했다.
<박스기사> 2
왕당파 신봉자들의 공부 열기
“프랑스인들이여! 우리는 프랑스를 원한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왕이 필요하다!” 3월 말 악숑 프랑세즈의 파리지부 당원들은 노래로 그들의 모임을 마무리한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레옹 도데와 자크 벵빌의 초상화 아래 앙트완느가 앞에 나서더니 당원의 일정표를 알려준다. “수요일 파리다 벨굴과 함께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번 모임이 필립 드 빌리에 강연만큼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8월에는 다양한 지식 활동과 스포츠 활동과 함께하는 여름학교를 잊지 말아 주세요.” 20~40세 사이의 약 40명가량의 당원들은 포스터를 붙이러 떠나기 전 맥주잔 건배를 한다. 왕당파의 창설자인 모리스 퓌조의 후손인 한 노파가 노란 종이를 양팔로 안은 채 서성인다. 샤를르 모라스와 로랑 도이치의 책도 진열된 서고 옆에서 만난 앙트완느는 즐거운 모습이었다. “모두를 위한 시위(la Manif pour tous)와 함께 악숑 프랑세즈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파리와 지방 곳곳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과거 분열했던 간부진들도 돌아와 이 모든 게 순조롭습니다.” 정장과 넥타이, 수건까지 차려 입은 그날 저녁의 강연자는 말한다. “우리 단체의 교육은 백 년이 넘습니다.” 아마도 악숑 프랑세는 이전의 ‘전성기’를 더 이상은 맞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단체는 계속해서 출간물과 모임을 통해 반혁명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어쩌다 가끔, 우크라이나에 관해 얘기한 오늘 저녁처럼, 저는 지정학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철학에 관한 강연입니다. 이 경우 저는 칸트주의의 프랑스 계몽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글·알랑 포플라르 Allan Popelard
지리학자
번역·박지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