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3가지 야심

2014-12-29     마크 윔베르

일본의 3가지 야심

 

마크 윔베르 | 렌느 대학 교수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내각을 개편한 지 두 달 후, 2014년 10월 20일에 두 장관의 사표를 받았다. 공약으로 내걸었던 새로운 방법으로 일본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집권 당시 중의원 선거(2012년 12월), 참의원 선거(2013년 7월)에서 승리를 이루며 탄탄한 정치 기반을 확보했다. 마침내 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한 것이다. 민주당은 1955년 이후 계속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2009년에 종식시키고 3년 동안 집권한 바 있다.

민주당은 집권 당시 복지국가를 목표로 한 경제·사회복지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별 성과가 없는 복지 정책을 접었고 원자력 에너지 가동 중단 계획도 철회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태 이후 민주당 정부가 급히 구상한 계획이 바로 원자력 에너지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1) 아베 총리는 처음 총리에 올랐던 2007년에 시작했던 계획을 다시 이어갔다. 바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고 세계 평화유지에 역할을 다하는 ‘아름다운 일본’(2)을 새로 만들어가는 계획이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월호에 실린 카츠마타 마코토의 기사 ‘일본, 무늬뿐인 경제 개혁, 진정한 내셔널리즘’에 따르면 아베의 목표는 이전 정부인 민주당의 정책과 선을 긋고, 나아가 전후 이후 계속된 일본의 정치 방향과도 결별하는 일이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평화 유지를 위해 해외에 파병할 수도 있고 동맹국가들이 공격을 당할 경우 방어 작전에 참여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갖추고 싶어 한다.

즉, 일본군을 자위대 개념과 일본국토를 수호하는 역할에만 갇히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마련된 굴욕의 평화 헌법 9조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있다.

아베 총리는 새로 구상한 방향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추진한 경제 정책의 결과는 불투명해 보인다. 9월 초, 경기부양을 위해 내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18개의 장관직 가운데 12개 장관직 인사 개편).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도 채 안 되어 신임 장관 두 명(경제산업상, 법무상)이 정치자금 의혹에 연루되어 사퇴하게 되었다.

 

아베노믹스의 침체

 

경제와 사회복지 분야에서 추진되던 프로그램인 일명 ‘아베노믹스’가 침체의 기미를 보였다. 아베 총리는 일본을 20년의 경기 불황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했다. 일본 은행은 화폐를 찍어내어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인플레이션율은 2013년 9월에 1%를 넘었으나 2013년 4월에는 3%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특히 같은 기간에 부가가치세가 5~8%로 증가했다. 현재 인플레이션은 둔화세를 보이고 있고 부가가치세 인상 전에 활기를 띠던 가계 소비는 침체되고 있다(일본인들은 부가가치세가 더 오를 것이라 보고 있다). 또한 경제성장 전망도 하향 조정되었다(2014년에 1.14%). 그나마 다행히 공식 실업률은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2014년 8월에 3.5%). 그러나 이는 비정규직 증가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샐러리맨의 구매력은 계속 낮아지고 있는데도 일본 국민은 복지국가의 꿈을 적극 실현하려 하지 않고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걸지도 않는다. 샐러리맨의 실제 봉급은 2014년 8월을 기준으로 1년 전보다 2.6% 낮아졌다.(인플레이션 고려)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1997년 이후 계속 오랫동안 봉급이 동결되고 있다. 평균 봉급이 1997년보다 2012년이 더 낮았다.(3) 이러한 상황에서 법인세가 낮아지고 미국과 논의 중인 FTA 협상, 일명 TPP가 타결된다면 볼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TPP(4)가 타결되면 일본의 전통 가내 농업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아베는 전통 가내 농업을 산업화된 농업으로 대체하고 싶어 한다. 전통 가내 농업 분야는 자민당의 꾸준한 지지세력이었고 자민당은 이들 분야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아베 총리의 정책은 어떻게 보면 전통 가내 농업과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

게다가 2015년 10월에 소비자 물가가 추가로 8~10% 상승하게 되면 공공부채는 GDP의 225%로 낮아지지만 국민의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올해 연말까지 기다려 봐야 이 계획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원자력 재개

 

아베 총리는 경기를 부양하려면 원자력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봤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 아베 총리는 ‘에너지 20년 계획’이라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는데 2013년까지 원자력을 포기한다는 이전 정부의 계획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베 총리는 다른 재생 에너지원도 생각하고 있지만 24시간 동안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상황이 되면 현재 전면 중단된 원자력 발전소를 재가동 하고 싶어 한다.

 

큐슈의 전기 회사 원자력 발전소

 

2014년 4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개번 맥코맥의 기사 ‘원자력의 일본, 벌 받은 오만함’에 따르면 정상가동 기준에 부합한 첫 원자력 발전소는 큐슈 카고시마에 위치한 사쓰마센다이 원자력 발전소였다. 언제쯤 재가동될까? 아베 총리뿐만 아니라 원자력 산업에서 이익을 얻는 정재계 역시 가능한 신속한 재가동을 원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하기에 은밀하게 진행 중이다. 책임 회피가 만연한 일본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5) 원자력 안전 소장은 원자력 발전소가 재개해도 될 정도로 안전하다 했고 정부는 당장에 결정을 하지 않고 추이를 지켜보겠다고만 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력 회사들은 관련 지자체의 승인을 요청한 것이다. 지자체는 원자력 가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지원 받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전기 회사들로부터 뒷돈을 받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11월에 투표가 붙여질 사쓰마센다이 시의회의 승인과 12월의 카고시마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승인이 나면 큰 반대가 없는 한 원자력 발전소는 2015년 초에 가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자력 가동 중단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자민당의 이전 총리인 나카소네 야스히로(1982~1987년 집권), 고이즈미 준이치로(2001~2006년)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전직 총리들인 하토야마 유키오(2009~2010년), 후쿠시마 사태를 관리해야 했던 칸 나오토(2010~2011년)도 원자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지난 4월에 가고시마 현의 주민 약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9.5%가 원자력 재가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2014년 6월 28일에는 원자력 발전소 중단을 요구하는 5,000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도쿄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6)

 

아시아 패권

 

아베 총리가 큰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정치적 문제는 세계무대, 우선 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치를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 및 원자력 지원 속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누리며 세계의 산업과 경제에서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 위치는 새롭게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일본은 센카쿠 문제(7)를 놓고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수시로 영공과 영해를 넘어오며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헌법 9조에 의해 일본의 군대는 자국 영토의 방어 역할밖에 할 수 없다. 평화로운 일본은 치안을 UN에게 넘겨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치안 시스템은 좌파와 국민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연합군과 체결한 동맹조약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 1945년에 패망 이후 연합군의 점령과 관리 아래에 놓였고, 대부분 미군이 주둔했다. 일본은 미국과 1954년에 방위 안전 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은 1960년에 미일 동맹으로 변경되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이 조약에 반대했고 일본 국민 대부분도 반대했다. 1960년 4월과 6월 사이에 223건의 시위가 열렸고 일본인 1,5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8) 시위에 나선 일본인들은 일본이 군국주의와 미국의 핵폭탄에 대한 끔찍한 기억으로 평화에 집착했고 미일 동맹 조약이 공식적으로 군사 비핵화를 포함하자 받아들이게 되었다.

일본 사회는 일본 군국주의와 미국 핵폭탄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미군 기지가 6,000곳이 주둔해 있고 매년 일본이 20억 달러를 지불하고 있다. 일본은 미군 주둔으로 안심을 하면서도 재정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다.

2014년 1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올리비에 자젝의 기사 ‘열도를 둘러싼 새로운 태평양 전쟁’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2013년 12월에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행동을 감행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1947년에 전범들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9)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국인 중국과 한국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보며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 보며 유감의 뜻을 보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 군대를 강화하고 해외에도 파병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일본의 자위대는 1992년부터 해외 파병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평화 유지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일본은 평화 유지 작전에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전직 총리 노다 요시히코(민주당)는 2012년 9월에 센카쿠 열도의 섬 세 개를 국유화(10)하여 중국과의 긴장을 더욱 높였다. 중국이 센카쿠를 침범할 경우 미국이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확실히 이행하려는 목적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든든하고 믿을 만한 동맹국임을 보여주어야 하고 비행기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받을 경우를 대비해 미국의 미사일 방어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집단 자위권 승인을 통해 일본을 수동적인 평화 수호에서 적극적인 평화 수호 국가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화헌법 9조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헌법 개정은 일본 국민 사이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라 섣불리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 7월에 발표했듯이 아베 총리는 의원과 상원의원들에게 9조의 해석을 수정하기 위해 투표를 실시하자는 요구를 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헌법 9조 수정을 통과시키고자 한다. 이 발표가 나기 전날, 일본인 1만 명이 거리 시위에 나섰고 주요 신문인 <아사히>, <마이니치>, <재팬 타임>은 일본의 민주주의 기초를 무너뜨린다며 비난했다. 아베의 ‘역사적인 결정’을 반긴 것은 보수주의 신문 <요미우리>와 극우세력이었다. 이 같은 결정은 분명 아시아의 균형을 바꾸고 일본을 미국의 전략적 군사 작전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변화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추이를 살펴보자.

 

글·마크 윔베르

일본 전문가, 도쿄 주재 프랑스 문화원 원장으로 재직(2008~2011년)한 바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번역서로는 <프랑스 엄마처럼>(2014) 등이 있다.

 

(1) Denis Delbecq, ‘후쿠시마는 어떻게 원자력 카드를 접었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7월호

(2) <아름다운 일본을 향해>는 아베 신조가 처음으로 총리가 되던 2006년에 발행된 책이다. 개정판은 2013년에 출간되었다(Bungei Shunju, 도쿄).

(3) 샐러리맨의 연평균 소득은 1997년에 484만 엔에서 2013년 430만 엔으로 올랐으나, 실제 시급은 2000년과 2009년 사이에 매년 0.5%씩 하락했다. 다이와 연구소, <일본 경제 보고서>, 도쿄, 2013년 12월 3일

(4) 태평양 지역과의 FTA로 중국은 대상이 안 된다.

(5) 일본의 유명 사상가 카토 슈이치가 1955년부터 보여준 내용

(6) Rafaële Brillaud, ‘이와이시마, 원자력에 반대하는 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3월호

(7) 센카쿠 제도를 이루는 무인도였던 8개 섬이 1895년에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중국이 일본에 양도하면서 공식적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 대만과 주변 섬들 역시 양도되었다. 1945년 이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한 영토 소유권을 중국에 반환했으나 센카쿠는 미국의 보호령에 있었고 대만은 1949년에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이 통치하고 있었기에 소유권 반환에서 제외되었다(참고로 중국은 마오쩌둥의 지배하에 공산국가가 되었다).

(8) Packand George, <Protest in Tokyo: The Security Treaty Crisis of 196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6

(9) Tetsuya Takahashi, '야스쿠니 신사 혹은 일본의 선택적 기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3월호

(10) 쿠리하라 가문의 소유였고 일본 정부는 이미 다른 섬을 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