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과 어울려 사는 법을 모르는 일본

2014-12-29     마크 윔베르

외국인과 어울려 사는 법을 모르는 일본

 

아베 신조 일본 수상과 자민당은 2014년 12월 14일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47.4%의 기록적인 기권율에도 불구하고 향후 4년 동안 자유롭게, 평판이 좋지 않은 구조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개혁 조치 중 하나로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이민정책도 포함된다.

 

마크 흄버트|렌느1대학 정치경제학 교수

 

부족한 노동력으로 외국인 노동자 수입

 

‘아베노믹스’라는 명칭이 붙은 ‘일본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자유주의적 정책이 빈약한 결과에 직면하자 아베 신조 총리는 2014년 11월 이 계획을 계속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 투표로 신임을 묻기로 결정했다. 그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의 ‘티나(There is no alternative)’를 모방해서 ‘코노미치 신카나이(다른 길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지출을 증가하고 공공 토목공사를 추진하는 두 가지 화살에 이어(1) 부가가치세를 또 다시 올리는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아베노믹스’의 세 번째 화살을 재웠다.

기대했던 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조치들 중에는 비숙련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들어오게 하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특히 후쿠시마 재앙 이후 재건축이 필요한 만큼 건축과 공공 토목공사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준비 공사도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인구는 7년째 감소하고 있다. 2000년 1명의 은퇴자에 대해 3.6명이 경제활동인구였다. 2025년에는 은퇴자 1명당 1.9명이 될 것이다.

아베는 투표 시작 전 여성의 경제활동을 장려하고(이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민에 찬성했다. 2014년 2월부터 아베는 의회의 예산위원회 앞에서 “이민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문제는 일본의 미래와 국민의 삶의 조건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2) 이런 맥락에서 그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 청취를 위해서 지난 4월, 전문가 모임을 갖고서 언론에 인구 감소를 늦출 정책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전문가들의 예측대로라면, 일본 인구는 2010년 1억 2,700만 명에서 2060년 8,700만 명으로 감소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임신율이 2030년 2.07에 이르고(현재는 1.39이며 프랑스는 2.1이다) 매년 20만 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이다. 아베는 지난 4월 말, TV 방송을 통해서도 이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으나 “이민 정책이 관건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시적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며 그 후에는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피력했다.(3) 그 다음달에는 궁극적인 이민 정책에 대해선 망설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나라에서는 새로운 이민자들과 토착민 사이에 많은 불화 문제가 있다.”(<Japan Times>, 2014년 6월 2일). 지난해 6월 말에 발표된 <일본 부흥 전략>의 개정된 버전에서는 정확한 수치는 제시하지 못했지만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를 대폭 수용하겠다는 생각을 다시 취했다.

 

이민정책에 대한 아베의 딜레마

 

그 이후에 경제는 다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5%에서 8%로 상향 조정된 부가가치세 인상은 반응이 좋지 않았다. 아베는 이민정책 문제를 버려둔 채로, 선거 캠페인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민정책 문제는 <Japan Times>의 요시다 레이지 기자가 쓴 “아베노믹스의 성공 여부는 이민정책에 달려 있다”는 2014년 5월 18일자 기사의 제목처럼, 언제나 쟁점화될 것이 분명하다.

상당한 수의 외국인 비숙련 노동자들을 확보하는 게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는 전후부터 견지해온 ‘이민은 없다’는 일본의 원칙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망설이고 있다. 물론 이 원칙에는 1985년 이후 약간의 융통성이 발휘되었지만, 일본은 이민자와 귀화자의 숫자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OECD에 따르면, 일본은 2008년 전체 인구 중 외국인 비율이 1.6%다. 프랑스는 5.8%, 미국은 6.7%, 독일은 8.6%에 달한다.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 외국에서 태어난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율도 미미하다. 프랑스는 5.6%, 독일은 9.4%, 미국은 15% 이상이다. 게다가 귀화자의 숫자도 미미하기 짝이 없다. 2013년 0.5%의 외국인들에게 귀화가 허용되었다. 더욱이 그중 대부분인 43%가 재일 한국인 귀화자들이었다.

 

외국인 4/5를 차지하는 재일 한국인

 

재일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집계되는 외국인들의 4/5를 차지했다. 한국의 식민지화는 191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52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후에도 재일 한국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외국인의 위상만을 부여받았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배제한 채 일본 국적을 정의하는 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당시에 200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모국으로 돌아갈 권리가 주어졌다. 일본 땅을 선택한 62만 명 이상이 아직도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자신들만의 문화적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일본말을 하는 자신들과 자신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하고 일본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기를 바라고 있다.

확실히 이들은 일본 국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1985년까지는 일본 국적을 얻기 위해서 한국 이름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15만 명만이 귀화했다. 그 이후로는 한국 성을 일본식으로 쓰는 것이 가능해졌으나 귀화 조건이 여전히 가혹해서 귀화율은 저조한 수준에 머물렀다.

한국인들은 일본 사회에 잘 통합되어, 신분증을 보일 때 말고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자녀들이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바라는 일본인 가정은 많지 않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기 전까지는 많은 교제가 이루어진다. 실제 결혼한 커플도 많다. 1995년까지의 통계를 참조한 야수노리 후쿠오카가 수행한 한 연구에 따르면,(4)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을 지칭하는 용어) 혹은 이전에 일본 땅으로 건너온 한국인 11명 중 7명이 일본인 배우자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즉 11명의 자이니치 중 4명의 자이니치만이 다른 자이니치와 가정을 이루었다는 얘기다. 이 혼종 결혼은 (1980년을 기점으로 점차 증가하는) 한국에서 새로이 일본으로 온 한국인들의 혼종 결혼까지 계산하면 상당히 많은 수치에 달한다. 그 이후 대략 8만 명이 혼종 결혼을 했으며 이는 원래 자이니치의 혼종 결혼 수치의 두 배에 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일 한국인들의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1991년 장기체류자라는 특별 위상을 획득했으며 그 이후 시위에 이어서 1993년 체류증에 지문 등록하는 것도 면제 받았다. 이 조치는 2000년 모든 외국인들에게 확대 적용되었으나 7년 후 테러리즘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부활했다. 퇴직 연금과 같은 몇몇 사회적 혜택들도 주어졌다. 한국인 사회학자 김명수에 따르면,(5) 재일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투표권도 없고 공직에 나설 수도 없고 일본 국민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2급 시민’이지만, 일본인에 준하는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1980년대 말부터 변화의 조짐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인들은 일본 내에서 거의 유일한 외국인 공동체라는 위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는 귀화가 가속화되어서가 아니라, 외국인들의 숫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국제적 압력에 굴복해 일본은 인도차이나 난민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게다가 임금 수준이 낮은 비숙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이 특히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입국 조건을 완화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1993년 비숙련 노동자의 기술 견습생 제도가 만들어져 (점차 변화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데, 이 제도는 젊은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을 최고 3년까지 한시적 기간으로 데려올 수 있게 한다.(6) 2013년 말 견습생들의 숫자가 15만 명이 넘었으며 그 2/3가 중국인이다.

두 번째 조치는 해외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비자발급이다. 속인주의의 신봉자인 일본이 문을 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가 아니라 20세기 초 브라질처럼 외국으로 이민 갔다가 되돌아온 일본인 자녀들, 즉 ‘니케이친’에게 문을 연 것이다. 기업들이 현장에서 이들을 채용하면 이들은 자동으로 일종의 ‘귀국자’ 신분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일본 혈통을 갖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일본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본 주민들과 잘 조화를 이룰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니케이친, 특히 브라질의 니케이친의 숫자는 빠르게 증가했다. 1989년 이 법이 통과되었을 당시에 1만5천 명이었던 니케이친은 2007년 30만 명 이상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전체 47개의 현 중 (도쿄와 교토 사이에 위치한) 아이치, 시즈오카, 미에, 지푸, 군마와 가나카와 등 6개의 현에만 집중되어 있다. 인구가 4만2천 명에 불과한 오이즈미라는 조그마한 시에서는 거주 외국인들이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한다. 이는 일본 평균보다 10배나 높은 수치다. 한 지역에 외국인이 집중하는 이유는 대개의 집주인들이 외국인을 차별하기 때문이다.

이 ‘브라질인’들은 외관은 일본인들과 비슷하나 일본말을 못하기에 문맹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주민들이 이들의 언어습득과 통합을 돕기 위해 단체를 창설했다. 해당 시청들은 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삶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도움도 제공했다. 도쿄 남부의 가와사키 같은 몇몇 자치 단체들은 거주외국인들을 위한 자문위원회도 만들어 이들이 부분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에게 지방선거에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운동도 생겨났다.

2008년 경제위기에 많은 니케이친들이 해고되었다. 정부는 이들이 브라질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했지만, 이는 이들이 또 다시 똑같은 위상을 요구하러 돌아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7) 오늘날 이들의 숫자는 8만 명 정도다.

2005년 이민통제계획이라는 범주 하에서 정부는 지방 정부들의 ‘창의적인 조치’에 화답했다. 외국인들을 더 이상 자국 시민으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생활자’라는 뜻의 ‘세이카튜샤’로 간주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여러 조치와 더불어 소위 ‘다문화 공존’이라는 뜻의 ‘타분카 교세이’를 증진하기로 발표했다. 외국인들은 더 이상 통제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극우의 인종차별시위 기승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모든 일본인들의 생각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극우는 한국인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에 반대하는 집회를 조직했다. 이들이 소위 일본이 재일 외국인에게 부여한 ‘특권’에 반대하는 자이코쿠-카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적 슬로건을 남발하고 외국인 거주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에서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 단체들의 행동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일본에서 외국인들의 존재가 공공질서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를 드러낸다. 현재 일본의 범죄율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인구 10만 명당 절도 4건(프랑스 181건, 미국 133건), 강간 1.1건(프랑스 16.2건, 미국 28.6건), 살인 0.5건(프랑스 1.4건, 미국 5건)이 발생한다.(8) 여론은 이를 외국인들, 특히 불법체류자의 탓으로 몰아세우는 데 서슴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일본이 일종의 사회적, 일상적 범죄로부터 피난처인 것은 국민의 동질성이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다양성에 관한 연구에서 일본은 1985년과 마찬가지로 2000년에도 OECD 소속 국가 중 하위에 위치한다.(9)

거물급 정치인들은 일본의 위대함의 원천이 동질적이고 유일한 정체성에 있으며 이를 지켜내야 하고 이민으로 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반복한다. 당시의 교육부 장관 아소 타로 같은 이는 2005년 “일본은 하나의 국가이며 하나의 문명이며 하나의 언어이며 하나의 문화다”라는 선동적인 메시지를 남발하기도 했다. 전쟁 전에나 유행했던 초국수주의적이며 문화주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시각인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년 20만 명의 외국인들이 일본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소 타로 같은 선동가들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충분히’ 소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민 문제만이 유일한 도전은 아닐 것이다.

 

글·마크 흄버트

도쿄의 일불회관(日佛會館) 관장(2008~2011년), 렌느대학 일본 연구소장

 

번역·이진홍

 

(1) ‘La triple ambition du Japon’, Planète Asie, 21 octobre 2014

(2) <Japan Times>에 실린 기사, Tokyo, 18 mai 2014

(3) 4월 20일자 연설, <Japan Times>, 18 mai 2014 인용

(4) Yasunori Fukuoka, Lives of Young Koreans in Japan, Transpacific Press, Melbourne, 2000

(5) Kim Myungsoo, ‘Les caractéristiques de la xénophobie au Japon’», Hommes et migrations, n° 1302, Paris, avril-juin 2013

(6) Anne Roy, ‘Petites mains chinoises pour industrie nippone’, Le Monde diplomatique, décembre 2008

(7) 이 제한 조치는 2013년 철회되었다.

(8) ‘Crime and criminal justice statistics’, Office des Nations unies contre la drogue et le crime, 15 mai 2014, www.unodc.org

(9) Cf. Natalka Patsiurko, John L. Campbell et John A. Hall, ‘Measuring cultural diversity : Ethnic, linguistic and religious fractionalization in the OECD’,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 35, n° 2, Routledge, Londres, février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