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치 여사에게도 버림받는 버마 소수민족들
수 치 여사에게도 버림받는 버마 소수민족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한다. 군부가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는 버마 정부는 2014년 10월 6일, 정치범들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후에 언론인들이 또다시 구금되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다양한 종족의 게릴라들과의 휴전을 선포했으나 현장에서 전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앙드레 부코, 루이 부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군인들의 의전 행사라는 것이 인상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버마가 2013년 3월 27일 연례행사로 거행한, 1945년 일본군에 대항에 봉기한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는 인상적이었다. 아웅 산 수 치여사가 예전에 자신을 박해하고 감시했던 장군들과 나란히 연단의 제일 앞줄 중앙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테인 세인 대통령 정부에서 각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예전의 장군들은 화해의 상징으로 참석한 수 치 여사에게 경의를 표했다. 분명 수 치 여사는 2010년 연금에서 풀려난 이후 군부와의 협력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이는 군부와의 협력 없이는 정치적 미래를 기약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2년 후 보궐선거에서 의원에 당선된 후에 2015년 선거에서 버마를 통치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했다. 그런데 이는 군부가 만든 2008년 헌법이 그녀에게 금지한 것이었다.(1)
전례 없는 여권과 군부 사이의 갈등
현재, 공화국의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이 지명하는 선거인단이 선출한다. 상·하원은 각기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도록 되어있다. 여당인 통합발전당(USDP) 내 개혁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은 실용주의자로 통하는 하원 의장 투라 슈웨 만은 대통령 선거에 관한 한 수 치 여사에 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2013년 3월부터 예전의 적이었던 수 치 여사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군부의 절대적인 통제를 약화시킬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군부의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 버마 국방총사령관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 특히 헌법을 수호하는 데 군부의 주요한 역할을 그에게 상기시켜 경고했다.
테인 세인 대통령은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특별경제구역 지정, 투자 규제 완화, 외국은행 개방, 화폐 평가 절하와 같은 경제 개혁과 예산 정책 관련 개선, 검열의 부분적인 철폐와 같은 언론 자유의 증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14년 봄과 여름에 몇몇 언론인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정권은 분명 선거가 다가오면서 언론의 영향력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정권은 많은 정치범들을 석방함으로써 개혁의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이 일련의 조치들은 버마가 국제 사회의 왕따 취급에서 벗어나고, 정치·경제적 제재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물론 여기에는 2011년 12월 역사적인 힐러리 클린턴의 방문과 2012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순방 등 미국의 외교적 압력이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그러나 특히 소수 민족이 주 희생자인 인권 문제에 대한 버마 정부의 대응은 미진하다.
버마의 종족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135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중 일부 종족은 1948년 독립 이후 아직도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투쟁 중에 있다.(3) 테인 세인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이 휴전을 이끌어, 몇몇 무장한 종족들이 화해의 길이라는 다소 복잡한 길로 접어들게 했다.
군부의 경제력 장악
버마 군부는 모든 협상 테이블에 참여했으며 합의서에 직접 서명한 당사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접근 방식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정부의 협상 방식을 단지 정치인들의 정치적 제스처 정도로 간주하는 것 같다. 군부는 헌법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역할은 특히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그 ‘국가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자신들’만의 이익이라는 말과 동일시된다. 군부는 천연자원 개발권을 독점하고 공사장과 투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미얀마경제주식회사연합(UMEH)이라는 지주회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재계의 거물들과 이익을 분배한다. 1990년부터 군부가 만들어 관리하고 있는 이 재벌 지주회사는 다양한 활동 영역에 걸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천연자원 개발권도 포함된다.
더욱이 버마 군부가 1960년에 결성된 무장단체인 카친 독립군(KIA)과 휴전을 체결한 뒤 17년 만인 2011년 6월 이후 다시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데에도 (카친 주와 샨 주에서의 댐 건설 공사와 같은) 경제적인 요인이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같은 이유로 군부는 샨족에게 1989년 휴전 이후 샨족이 점유해왔던 샨 주의 중부에 있는 살원 강 서쪽 연안에서 나가라고 명령함으로써 북부 샨족과의 직접적인 갈등관계를 다시 촉발 시켜 샨족 군(SSA-N)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4) 표면적인 이유는 살원 강과 그 지류에 건설할 수력 발전소용 댐 건설이 예정된 지역의 안전을 위한다는 것이다. 군부는 이 지역에서 민간인들 역시 강제로 퇴거시켜, 불안감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샨족 북군과 남군은 군부와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전투를 빈번하게 벌이며, 대통령의 개입을 호소하고 있다. 2012년 말 켕퉁에서 열린 버마 정부 측 협상가와 샨군 지도자인 요드 서크와의 중요한 만남에는 군부의 부사령관도 합석했다.
1994년 체결된 휴전 조약에 서명한 소수 종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카친 족만이 약속한 내용들이 준수되지도 않는 이 협상에 거칠게 불만을 표시하며,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버마 정부와 정치적인 협상을 벌이는 데 회의적인 다른 소수 종족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카렌국민연합(KNU)의 카렌족은 이 문제에 관해서 다른 분파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요드 서크는 샨족은 젊은 투사들에게 휴전을 원하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젊은 투사들은 샨족을 상대로 여론 조사와 계몽적인 전파 활동을 계속하면서 투쟁을 원하고 있는데 주민들 대다수는 단순한 휴전 이상의 안정적인 평화를 원하고 있다. 테인 세인 대통령은 나름대로 카친족에게 일방적으로 적대감을 가지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발표했으나 이는 군부의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 버마 국방총사령관에 의해서도 승인받지 못했다. 장군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카렌국민연합의 카렌족과 카레니국민진보당의 카레니족과의 전투가 실질적으로 휴전 상태지만 이들의 지도자들은 그들 지역에 버마 군대의 진입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불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갈등
카친 주에서는 전투가 점점 가열되어 2011년 이후 수백 명의 게릴라들이 사망했다.(5) 물론, 버마 군인의 사망자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역시 주민들이었다. 수십 만 명의 주민이 집을 잃었고 군인들이 저지르는 끝없는 수탈을 감당해야만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국경 지역이 비교적 안정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던 중국으로서는 씁쓸하기만 하다. 차후로는 중국의 거대한 투자도 문제시 될 것이며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투가 방해가 될 것이다. 베이징은 다시 피난민 문제도 감당해야 한다. 정치적 박해로 점차 숫자가 많아지는 피난민의 수용도 문제지만 카친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영토인 윈난 성에서 시위를 하는 것도 신경에 거슬린다.
버마의 젊은 세대에게 넘어서는 안 되는 선도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중국은 소위 중국의 ‘보호대상’인 와주연합군의 와족에 대한 지지를 다시 시작했다.(6) 와족 연합군은 만일 카친족이 와해되면 다음 목표가 자신들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군용 무기와 장비들이 라오스를 경유해 와족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 무기들은 와족의 잠재적 억제력을 강화하여 버마 군부의 탄압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해줄 목적이다. 베이징은 어떠한 장갑차도 윈난 성 인접의 와족 경계 지역에 배달된 적이 없으며 내정에 간섭할 의도가 결코 없다고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있다.
버마 정부뿐만 아니라 중국까지도 불편하게 카친족 지도자들은 2013년 2월에 열린 윈난성 국경 마을인 루이리 시에서 열린 협상에 중국이 깊숙이 관여했다고 반격한다.
버마의 소수 인종들은 또다시 혼란이 시작될 것을 두려워한다. 많은 이들이 수 치 여사의 침묵에 의아심을 품고 있다. 그녀의 침묵, 특히 투자와 관련되어 경제적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로 축출하는 것에 관한 그녀의 미지근한 태도는 상당수 국민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소수 종족의 대변자로 간주되지 않으며 소수 종족들은 그녀의 침묵을 비난하며 군인들의 탄압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를 못마땅해 한다. 특히 여사의 유보적인 태도는 대다수의 불교도인과 수인 벵갈 회교도 간의 갈등이 첨예한 아라칸 지역에서 긴장감을 주고 있다.
극도로 민감한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여사는 버마 국민 대부분이 이러한 소수 종족에게 적대적이라는 잘 알고 있다. 예컨대 보통은 버마 군인들에 대해서 적개심이 강한 아라칸 불교도들도 회교도 소수 종족을 박해하는 데에는 정부군과 합세할 정도이다. 오래전에는 정부가 오히려 아라칸 지역의 토착민인 불교도들의 분리 독립 주장의 김을 빼버리기 위해서 소수 회교도들을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소수 종족들은 자신들을 로힌쟈라는 용어로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으나 정부 측은 이를 거절하고 이들을 불법체류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두 세기도 지난 일이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아라칸 지역에 정착한 것은 영국 식민지 당시 영국인들이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의로 분열시킨다”는 오래된 격언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이 지방에 정착하게 해준 것에서 기인한다. 1982년 ‘시민법’ 조항을 채택했을 때 이들이 무국적자로 간주되어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버마 종족들의 지도자들과 군부의 협상은 진전되고 있지만 최종합의는 늦어지고 있다. 테인 세인 대통령은 이를 국가의 목표로 설정했지만 소수 종족들에게는 기나긴 정치적 과정의 시작일 뿐이다. 소수 종족들의 근심거리는, 버마 군부는 타협 없이 소수 종족을 굴복시킨다는 본래의 목표를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2015년 선거에서 수 치 여사와 하원 의장인 투라 슈웨 만의 연합이 민주적 승리라는 환상 속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이는 외부 세계로부터는 박수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장군들에게서 절대 권력을 박탈하는 헌법 개정이 없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수 종족의 모든 희망에 조종이 울린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글·앙드레 부코 André Boucaud, 루이 부코 Louis Boucaud
<Burma’s Golden Triangl: On the Trail of Opium Warlords>(Hongkong, 1992)를 공저했다.
번역·이진홍
에세이스트,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1) 제59조는 수 치 여사가 선거에 직접 입후보할 수 없다고 명확히 못 박고 있다.
(2) 국가발전 평의회장인 탄 슈웨(Than Shwe) 장군이 군부가 2010년 선거에서도 권력을 ‘민주적으로’ 계속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든 정당
(3) ‘130개 이상의 소수 민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4) 샨족군은 12개 소수 종족 군으로 구성된다. 1989년 휴전을 수용했던 샨족 북군은 불과 몇 천 명뿐이다. 반면 샨족 남군은 만 명이 넘으며 샨 주 대부분의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며 2011년 9월 이후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5) 가장 최신 공보인 2013년 3월자 카친 독립군의 공보에 의하면 900명 이상이 사망했다.
(6) 1989년 버마 공산당이 와해된 이후, 전 버마 공산당인 소수 종족인 와족이 결성한 무장 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