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이에서 벌어진 ‘추잡한 전쟁’
이집트에서 이라크까지, 혼돈이 자리 잡다
이집트에서 이라크까지, 혼돈이 자리 잡다
시나이에서 벌어진 ‘추잡한 전쟁’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의 축출 이후 최소 800명의 무슬림형제단이 2013년 8월 14일 카이로에서 살해당했다. 이는 ‘최근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시위참가자 집단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시나이의 사람들은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 투사들과 이집트군이 벌인 전투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스마일 알렉산드라니 | 카이로 시나이 문제 전문가
그는 서른한 살이었다. 모하메드 유세프 타블은 시나이의 알 아리쉬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셰이크 주아이드라는 마을 문턱에서 어느 이집트 군인에 의해 사망했다. 지역 내 상황 정보를 수집하는 공식 임무를 맡은 멤버인 타블은 저명인사였기에 그의 죽음은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타블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향한 연민과 연대의식 덕분에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천 명에 달하는 이름 없는 피해자들은 이러한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타블은 알 아리쉬의 교육 수준이 높은 도심지역에 살았지만 이스라엘과 국경이 맞닿은 이 지역의 주민들은 대부분 소외되었으며 비난받는 베두인족이다. 초토화 작전이 행해진 땅의 피해자인 지역민들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든 것이었다.
2011년 1월 이집트 방방곡곡에서 ‘혁명’이 발발했을 때, 시나이 북부의 총독령 수도 알 아리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방의 베두인 마을인 셰이크 주아이드의 중앙 광장에서 어떤 시위참가자가 처음으로 살해당했을 때의 반응은 유난히 난폭했다. 인권활동가와 정치활동가들이 철수했다. 여자들이 부수어 만든 투석용 돌을 아이들이 던졌고, 남자들은 자신의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과 바주카포를 꺼내왔다.
부정과 박해, 굴욕, 정부의 기만으로 점철된 지난 30년은 지난 몇 년간 호스니 무바라크(1981~2011년 재임-편주) 치세 하의 복수심에 비견될 만한 복수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시나이 남부에서의 첫 번째 대규모 테러 행위(2004~05년)에 대한 대가로 지역민들은 가혹한 박해를 당했다. 라파와 셰이크 주아이드에서 경찰이 저지른 강간 사례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는 이스라엘 점령군이 1967~82년에 남긴 슬픈 기록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이러한 폭력사태는 무장단체들, 특히 안사르 바이트 알마크디스(ABM) 같은 살라피스트(이슬람 근본주의자)·지하디스트 민병대의 결심을 굳게 했다.
이스라엘에서 종파 기반에 관한 저항은 1948년, 무슬림형제단이 알 아리쉬와 사드 알라와파에서 지원자를 대상으로 군사 양성 캠프를 만들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전 이집트 대통령(1918~1970)과 자유장교단이 카이로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시나이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입지는 쇠퇴하다 못해 2년 후에는 단체가 금지당하고 지도자 대다수가 주로 요르단으로 망명하면서 소멸될 위기에 놓였다.
그 당시 이집트 종교 지도자인 아부 아마드 알하자위 셰이크의 평신도회(tariqa, 이슬람 수피교도의 신비주의 교리 및 교단의 총칭-역주) 후계자인 이드 아부 제릴 셰이크는 가자 출신으로 최초의 수피교도 단체를 창설했다.(1) 그리고 1956년 수에즈 위기와 후속 전투 당시 수피교도의 지하디즘 단체가 등장했다. 이 단체는 가자 지구와 마찬가지(2)로 1957년 3월까지 이 지역을 -분쟁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점령 중이었던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집트군과 이집트 정보부에 협력하였다. 오늘날 이 단체의 지도자 중 몇몇은 셰이크 주아이드에서 남쪽으로 7km 떨어진 마을 알주라의 핫산 칼 셰이크처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훈장을 받은 과거의 투사들이다.
이집트 정규군과 수피주의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역사적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시나이 지역민들은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1979년 아누아르 엘 사다트(1918~1981, 전 이집트 대통령. 1978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와 메나헴 베긴(1913~1992, 전 이스라엘 총리. 1978년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편주) 사이에 맺어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일종의 배신처럼 여겼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다. 유대주의와 시온주의를 구별하지 않는 종교적 담화가 그것이 의미하는 지속적인 위협을 강조하는 것이다.
2001~10년 사이,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는 현재 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고향인 이곳 시나이에 지부를 세우지 못했다. 케냐 또는 이집트 지방에서 알카에다가 창설된 것은 2006년이었지만, 그 지도자 모하메드 알하카야마는 2년 뒤에 살해당했다. 2010년 6월, 신원을 밝히지 않은 단체가 시나이의 가스공급관을 대상으로 첫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축출 이후, 또 다른 13명이 이집트 천연가스를 이스라엘에 공급하는 가스공급관을 시나이 반도의 여러 지점에서 노렸다. 마침내 2012년 4월 이집트 정부가 가스 공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조약이 이집트의 국제적 주권과 이익을 침해한다고 규정하는 법적 결정에 준거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안사르 바이트 알마크디스(ABM)는 “If you are back, we are back(당신이 돌아온다면, 우리도 돌아온다)”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공적으로 알렸다. 이 제목을 다시 해석하자면 ‘당신이 이스라엘로 가스 수출을 재개한다면, 우리는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의미다. ABM은 이 영상에서 알카에다를 지지하며, 알카에다 조직에 의해 인정받았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ABM, 그리고 슈라 무자히딘-아크나프 바이트 알마크디스(CMS-ABM) 같은 또 다른 살라피스트 단체에 있어 다음 단계는 이스라엘군이 이스라엘 자체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은 베두인족과 비(非)베두인족을 포함하여 이집트 및 다른 아랍 국가에서 유래한 지하디스트 단체들이 진행하는 몇 차례의 습격을 규합하는 역할을 했다.
2013년 8월 9일 이스라엘 드론에, 사망한 베두인 지하디스트들 중 한 명을 위해 베두인 부족 의식에 따라 치러진 엄숙한 장례식은 ABM이 느낀 공감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테러가 이집트 정규군을 목표로 할 때는 ABM과 다른 단체의 명성이 사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시나이 지역주민들은 이집트 당국에 던져진 진정한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국경 너머의 이스라엘 표적에 대한 공격을 매우 반겼다. 이들은 무바라크 대통령과 이스라엘 간의 음모가 지역 발전에 주요한 장애물로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국경 지대의 부족들은 수십여 명이 이스라엘에 포로로 잡혀 있으며 최근에 구류된 이 포로들은 여전히 ‘전쟁 포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부족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이 이집트 정부에 대한 저항군으로 변모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상황은 이미 이 단계를 지났고, 이스라엘이 행동에 들어갈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2012년 8월, 어느 특공대원이 이집트 영토를 침범해 국경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마을 케레자에서 ABM의 베두인 지도자 이브라힘 이웨이다를 암살했다. 2013년 5월에는 또 다른 지도자 마두 아부 데라가 시나이 북부 라파 근처의 마을 고즈 아부 라드에서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지역구성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8월에 이스라엘은 알 아즈라에서 자신의 영토로 지하 미사일을 발사하려던 지하디스트 단체 전부를 무인정찰기 드론으로 살해한 것을 발표해 이집트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공격은 이집트군이 2013년 8월 10일, ABM 단원들이 사는 마을 두 곳을 공격하게끔 자극했다. 이집트 전투헬기가 1967년 이후 최초로 C존(3)을 침범해 알 투마와 알 모카타를 급습한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전쟁의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모하메드 무르시 치하 동안(2012년 6월 ~ 2013년 7월) 무슬림형제단은 알 아리쉬 동부에 조직적인 형태로 세력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시나이 무장 단체와 유대를 만드는 데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ABM은 2013년 7월 3일 쿠데타 이후 형제단을 덮친 폭력적 박해라는 배경 속에서 그들을 향한 연대감을 보여주어야 했다. ABM의 공보는 종교적인 정당화로 넘쳐나며, 국가를 향한 의무를 망각한 군인들을 규탄하는 것을 넘어 신병부터 장교에 이르기까지 군대의 모든 구성원을 신앙심이 없는 불경한 인물로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이집트 외 다른 지역을 목표로 삼아 시나이 외부로 활동의 무대를 넓히고 있다.
2013년 9월 7일 시작된 군사 작전 동안 자행된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폭력(4)과 전쟁범죄에 격분한 ABM은 더 많은 전투원을 모집하는 것에 착수하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집트 나머지 지역에 대한 폭력의 확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ABM와 시리아의 지하디즘 간에 이어져 온 유대관계의 강화일 것이다.
무르시 대통령의 축출 이후 이어진 유례없는 박해는 ABM의 전투원들에게 있어 항시적인 도발이다. 2013년의 라마단 기간 동안 (그리고 모스케의 기도 시간에) 무슬림형제단과 다른 이슬람주의 시위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습격과 이슬람 신자들을 향한 끝없는 의심은 ABM에게 ‘이슬람과의 전쟁’이라는 생각에 대한 신빙성을 제공한다.
2013년 9월, 이집트 내무부의 암살 시도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전에 ABM은 군대와 경찰을 목표로 했지만 이제는 엄밀한 의미의 테러 행위로 접어들었다. 테러를 조직하는 ABM 단원들이 더 이상 민간에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13년 10월, ABM 단원이 폭발물을 실은 트럭을 몰고 시나이 남부의 보안국 건물로 향해 돌진했다. 11월에는 이스마일리야 지방의 군 보안국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다. 한 달 후에는 다칼레야 총독령 주도인 알 만수라의 보안 건물이 강력한 폭발로 무너진 몇 시간 만에 과도정부가 ABM을 ‘테러 단체’로 규정했다.
시나이에서는 민간을 대상으로 한 정규군 장교와 군인의 권력 남용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이뤄지고 있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데, 심지어는 재판소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집을 부수거나 가난한 사람들, 특히 노인들이 사는 오두막집에 불을 지르고 올리브 농장에서 수확물을 제멋대로 캐가며 특정 주거지에 임의로 발포를 하기도 한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죽이거나 수백 명의 용의자를 임의로 체포하고 수십 개의 노점과 가게의 문을 닫게 하며 강제 퇴거, 계획적 실종, 당연한 이야기지만 필자를 포함한 기자와 연구자에 대한 학대 등이 자행된다.
이 무제한전이 있은 지 4개월 후, ABM은 2014년 1월에 시행한 세 차례의 화려한 군사행동을 통해 건재함을 또다시 입증했다. 처음은 1월 21일에 이스라엘 마을 엘리앗으로 그라드 로켓을 발포한 것. 다음은 어느 파출소 앞에서 이집트 내무부 장관이 누가 보기에도 ‘1월 25일 혁명’ 기념일을 기리는 내용의 담화를 한 다음 날, 카이로 한복판에 있는 보안국을 노린 테러였다. 미디어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던 마지막 군사행동은 1월 25일 이집트 전투기를 폭파해 승무원 전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군사작전이었다. 분노한 이집트 군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리피타 마을을 말 그대로 파괴했고 알바르트라는 작은 마을을 대상으로 야습을 강행했다.
이 기나긴 몇 달 동안, 이집트군은 시나이 북부에서 진행되었던 모든 것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지역 내 기자들과 활동가들은 공격 당하고 체포되고 고문 당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 숨어 지내기를 강요당했다. 반면 그들의 외국 동료들은 위협당해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통신망은 매일같이 단절되며 해지기 한 시간 전에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된다. 그러나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집단적이고 임의적인 처벌을 포함해 이 모든 조치는 2014년 7월 ~ 8월의 가자 전쟁 중 ABM이 이스라엘을 향해 포격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ABM은 이스라엘 드론이 작년에 4명의 지하디스트를 죽인 동일한 장소에서부터 포격을 감행했다.
이집트군이 2014년 7월 13일 두 번째 포격을 막기에 이르렀을 때, ABM은 알 아리쉬 동쪽의 군사 기지를 조준하며 더 큰 목표를 노렸다. 두 개의 포탄 중 하나는 목표에 닿았지만, 다른 하나는 근방의 민간 거주지에 떨어져 10세 소녀를 포함해 7명의 사망자와 9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오늘날 ABM은 이슬람국가(IS)와 동맹을 맺기 위해 알카에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시행된 맹렬한 정책은 이데올로기적 신념보다는 복수에 대한 목마름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새로운 전투원 세대를 낳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글·이스마일 알렉산드라니 Ismaïl Alexandrani
카이로 시나이 문제 전문가
번역·박나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제7대 죄악, 탐식: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등이 있다.
(1) 수피주의는 이슬람교 수니파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신비주의의 한 형태이다. 평화주의로 여겨지는 수피주의는 실제로 지하디스트 따위를 종종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알랭 그레슈, ‘Gaza l’insoumise, creuset du nationalisme palestinien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용광로, 가자지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4년 8월호
(3) 이스라엘-이집트 평화조약은 시나이를 세 개의 존(zone)으로 나누었으며 각 존마다 이집트 군인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이스라엘 국경지대인 C존에는 이집트 군인의 상주가 금지되었지만 경찰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4) Cf. ‘시나이: 고통 받을 운명?’, Intergrated Regional Information Networks(IRIN), Nairobi, 2013년 12월 9일, www.irin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