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는 ‘포퓰리즘’의 여정

2015-02-01     제라르 모제 l 프랑스국립과학센터 연구원

어떤 정당은 극우보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현대화하고, 또 다른 정당들은 극좌를 자처한다. 그러면서 각 정당들은 상대방에 대해 ‘포퓰리즘’이라는 굴레를 씌운다. 하지만, 논평가들은 그들의 차이점을 간과하며,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어떻게 이런 혼란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제라르 모제|사회학자

포퓰리즘이 지칭하는 내용에 일관성이 부족한 이유에는 이 표현이 다양하게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것도 한 몫 한다. 정계에서는 그 이유가, 포퓰리즘의 역사적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데 기인한다고 본다. 포퓰리즘은 역사적으로,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라는 뜻으로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운동을 실천한 세력-역주)라 불리는 러시아 포퓰리즘으로 과대 포장된 농민의 환상에서부터 19세기 말 미국 인민당의 농민운동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에서 매카시즘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푸자드 운동(프랑스의 서적문구상 P.푸자드가 중소 상공업자의 정치적 불만을 배경으로 일으켰던 반의회주의적 극우운동-역주)에서 르펜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화 시대의 블라디미르 푸틴에서 우고 차베스까지, 영국독립당(UKIP)에서 21세기 유럽의 황금새벽당에 이르기까지, 혹은 현재 프랑스의 마린 르펜에서 장 뤽 멜랑숑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주간지 <렉스프레스>(2011년 1월 19일자)에 실린 만화가 플랑투의 시사만화는 극우인 마린 르펜과 좌파인 장 뤽 멜랑숑을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혼동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플랑투는 국민전선(FN) 지도자 마린 르펜과 2012년 좌파전선(FG)의 대선후보 장 뤽 멜랑숑 두 사람을 똑같이 한쪽 팔에는 붉은 완장을 차고 다른 한 팔을 치켜들고는 “모두 썩었다!”는 연설문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문학 쪽에서는 1929년에 ‘포퓰리즘’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이 등장했다. 공산주의 작가들이 보여준 진부하고 도식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미지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부르주아적이면서 비정치적인 소설에 대항하는, 이른바 ‘글쓰기의 성향’ 문학운동은 포퓰리즘적 관점에서 “소시민의 생활을 꾸밈없이 묘사”(1)하려 했다. 민중의 복권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지닌 사화과학의 세계에서는, 피지배 문화 연구(‘폴크스쿤데(Volkskunde)’라 불리는 민속학 또는 ‘프롤레트쿨트(Proletkult)’라 불리는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 문화상대주의를 적용한다. 명확한 지배 관계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면서 포퓰리즘은 민중문화를 독자적인 형태로 인정하고 그들의 저항을 찬양하며, 가치의 위계질서를 전복시키고 ‘통속적인 것의 뛰어남’을 부르짖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반대의 입장, 즉 피지배계층을 교양 없고 순진하며 거의 야만적으로 치부하는 경멸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부르주아지와 교양 있는 프티부르주아지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사회적 편견은 “인류의 문화적 정의, 따라서 인간으로 완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에 대한 문화적 정의를 독점하려는 이 계층 특유의 확신”(2)에 근거하고 있다.

 

민중에 대한 두 가지 관점

포퓰리즘이라는 꼬리표는 영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대륙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며 그것이 가진 의미적 일관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명사에서 실체를 찾으려 애쓴다”(3)라고 표현한 일상적인 오류를 흔히 저지르게 된다. 정치학자 피에르 앙드레 타기에프의 말(4)대로, 서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포퓰리즘을 ‘민중에 대한 직접적 호소’로 정의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접근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근접성을 선호하고 대대적인 텔레비전 선동을 통해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쌓는 스타일에만 포퓰리스트라는 명칭을 국한시킨다 해도, 현 시점에서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을 적용할 수 없는 지도자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5)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을 (경제적, 정치적, 미디어적) ‘엘리트계층’에 대한 반란으로 정의한다면, 2012년 1월 22일 부르제 좌담회에서 포퓰리즘의 “진짜 적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금융계”라고 고발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나 2008년 9월 23일 툴롱에서 “자신의 논리를 경제 전체에 강요하고 경제를 타락시키는 데 공헌한 금융자본주의의 종말”을 공포했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까지도 포퓰리즘에 포함될 것이다. 정치학자 노나 메예르는 EU 선거 이후 분석가들이 포퓰리스트로 규정한 유럽 조직들의 가장 공통된 특성이 외국인혐오증일 것이라고 평가한다.(6) 2014년 5월 28일자 <르몽드>가 ‘유럽연합체제 혐오 모자이크’라는 표현으로 거론한 16개 정당 중 14개는 외국인의 이주에 반대한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EU 체제에 대한 거부를 외국인에 대한 적대심의 한 형태로 간주하면서, 인종차별주의와는 거의 관계없는 그리스와 스페인 혹은 프랑스의 급진좌파(시리자, 포데모스, 좌파전선) 또한 포퓰리즘으로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민중을 대표하는 것인지, 또한 포퓰리즘 외의 다른 말로 대체할 수는 없는지 문제를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도식적으로는, ‘민중’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7)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은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나온 말이고, ‘민주주의’는 그리스어 ‘데모스(demos)’를 어근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두 단어 모두 ‘국민, 민중’을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언급하는 민중은 시민 전체, 즉 민중-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민족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다른 민족주의보다 공격을 덜 받는 현대적 형태의 민족주의는 ‘글로벌 세계에서 프랑스의 경쟁력’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들이 흔히 호소하는 민중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의에 부합한다. 우파적 시각에서 민중은 ‘데모스’보다는 ‘에트노스(ethnos, 민족)’에 가깝다. 즉 침략당한 민족 또는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는 민족으로, 외국인과 이주민에 대립되는 것이다. 더 공개적이든 덜 공개적이든 이들은 외국인혐오자들이고, 현대 프랑스에서는 반(反)아랍이거나 이슬람을 혐오하는 사람들로, 문화적으로 순결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민중-민족의 정체성을 옹호하고, 동화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주민 출신 민중에 반대한다. 이들은 자신이 국가를 대표한다고 자처한다. 이 점에서, 유럽과 세계화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중도우파인 대중운동연합(UMP)과 극우 국민전선(FN)의 선거 전략은 동일하다. 우파적 관점에서는, 선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선거에 필요불가결한 민중계층과의 동맹을 위해, ‘그들(위에 있는 사람들)’/‘우리(아래에 있는 사람들)’라는 세계관을 ‘우리(일하는 사람들)’/‘일 하지 않고 일하기 원치 않는 사람들(실직자, 이주자, 생활보호 대상자)’라는 식의 접근법으로 대체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 아래에 있는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집결하는 것이다.(8) 그런 식으로 계층하락에 대한 두려움에 초점을 맞춰 안정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 갈등(9)을 부추기는 것이다.

민중은 중간계층과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성실함을 과시하며, 범죄자와 ‘게으름 피우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낙인찍으면서 노동계층과 위험한 계층을 동일시하는 일반적인 시각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한다. 그래서 우파는 이른바 ‘노동’ 이민을 제한하는 대책을 제안하거나, 기초수급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소득한도를 정하고 그들에게 공공이익사업을 맡기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또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특수성을 보호하고, 지배계층에서 하위계층으로 떨어져나가는 무리(소기업 경영자)와 민중계층에서 안정된 무리 사이의 동맹을 장려한다. 반대로 좌파적 시각에서 민중은 노동자, 쥘 미슐레가 찬양한 소시민, 평민(plebs),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정치적 차원에서 민중은, ‘위에 있는 사람들’, 부르주아지, 지배계층, 기득권층, 특권층, 경제·정치·미디어 등의 권력을 보유한 사람들에 대항해 결집된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노동자 계층이 ‘인민대중’의 중심이자 전위(당시에는 포퓰리즘이 노동자계급중심주의였기 때문에)를 이루어 왔지만, ‘인민대중’의 주변에는 대부분 여성인 사무직원과 농민계층, 프티부르주아지(교사, 보건인력, 기술자, 엔지니어)까지 확대해 포함시킬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경제활동인구의 4분의 3 이상에 해당하고, 노동자와 사무직만 따지면 반에 해당한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1936년 5월 15일, “우리는 인민의 당”이라고 말했다(몇 십 년 후 로베르 위는 공산당은 ‘사람들’의 당이라고 말하게 된다).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런 유형의 ‘포퓰리즘’은,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민중계층의 수호자로서 지배계층에 대항해 투쟁하며, 흔히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민중-민족에의 호소를 바탕으로 하는 대표자들(민족주의 포퓰리즘)과 반대로 민중-평민을 내세우는 대표자들(사회주의적 포퓰리즘)은 우파와 좌파가 대립하듯 서로 대립한다. 인민대중 포퓰리즘 옹호자는 신념에 의해서나 필요에 의해서 이상화된 민중이라는 황홀한 환상, 때로는 미화된 환상을 기꺼이 키워나간다. 그들은 착취당하고 지배받는 노동자들인 ‘보통 사람들’에게 평등이라는 본능적인 주장을 제공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민중의 ‘에토스’(사회 집단이나 민족 등을 특징짓는 기풍이나 관습-역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미덕의 총체를 가정한다. 바로 연대감, 진실성, 자연스러움, 단순성, 성실함, 양식, 명철함, 현명함 같은 것들이다. 이 자질들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소중히 여긴 ‘상식적인 예절(common decency)’이라는 개념 속에 구체화되어 있다. “산업문명에서 육체노동자는 그들의 존재조건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상당수의 특성, 말하자면 충성심, 술책의 부재, 관대함, 특권에 대한 증오심 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런 자질들로부터 미래 사회에 대한 그들의 비전을 발전시켜 나가고, 이런 사실로 평등의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핵심이 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10) 공공의 안전을 위하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국민전선(FN)의 담론이 민중계층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노동자의 65%가 기권했고(사무직의 68%, 실직자의 69% 기권), 투표 참여자의 40%가 FN을 지지했다. Ipsos 연구소에 따르면 이 그룹 전체의 15%가 지지한 것이다. 이것은 적은 수치인 동시에 많은 수치이기도 하다. 민중계층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제1정당에 기권한 것은 사실이지만,(11) 그들 중 일부는 “사람들이 민중계층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위에 있는 ‘그들’과 아래에 있는 ‘그들’이 민중계층의 희생을 발판으로 번영하고 있다”(12)고 확신하며 극우파에 투표했다. 이 경우, FN의 성공은 민중-에트노스와 민중-데모스 사이의 혼돈을 유지시킬 수 있는 FN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중산층 일부와 민중계층 일부의 동맹을 결성해 극빈층과 최상위층에 동시에 맞서도록 만드는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푸틴이 보여준 전략이기도 하다.  

 

충동적으로 움직이며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는 평민

이런 종류의 정치프로젝트는 논평과 해설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드러내 보이는 “계층 차별주의”를 이용한다. 그들의 글을 통해 투표를 잘 하지 않는 민중은 타고난 폐쇄적 성향, 자폐적 성향, 그리고 엘리트에 대해 반감(민중이 대체적으로 학력이 낮다는 점으로 증명된다)을 가진 천민들로 은연중 격하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무지한 사람들로 폄훼된다. 대체로 민중은 충동적이고, 우둔하며, 무분별해서 단순한 제안에 쏠리기 쉽고, 손쉽게 선동가들의 먹이가 된다고 여겨진다. 이 말을 반대로 추론하면, 개방성, 총명함, 정교함, 그리고 도덕적 우월성은 앞서 언급한 엘리트들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시각은 인민대중을 ‘속 좁은 소시민’,(13) 남성우위론자, 동성애 혐오자, 인종차별주의자, 이슬람 혐오자 등의 화신으로 고발하면서, 19세기 말의 보수주의적 철학과 이폴리트 텐(19세기 프랑스 실증주의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며, 인간성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갖고 접근함-역주)과 귀스타브 르 봉(1895년 <군중의 심리>를 저술한 사회학자-역주)이 보여주었던 대중 및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된다. 이런 시각은, 엘리트는 선천적으로 이런 종류의 일탈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하면서 ‘엘리트’에게 부여된 미덕을 단순하게 거꾸로 뒤집어 민중에게 부여하는 파렴치한 추론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민중에 대한 정반대의 두 가지 생각이 대립한다. 어떤 사람들의 계층 차별주의가 다른 사람들의 포퓰리즘을 고발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

 

글·제라르 모제 Gérard Mauger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번역·김계영

(1) 필립 로제, ‘포퓰리즘 소설’, <포퓰리즘>, Critique 76-77호, 파리, 2012년 1-2월

(2) 클로드 그리뇽 & 장 클로드 파스롱, <교양인과 민중>, 갈리마르-쇠이유, 파리, 1989년

(3)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청색본과 갈색본>, 갈리마르, 파리, 2004년(초판 1965년)

(4) 피에르 앙드레 타기에프, <포퓰리즘의 환상, 낡아빠진 것에서 미디어까지>, 베르 앵테르나시오날, 파리, 2002년

(5) 세르주 알리미, ‘포퓰리즘, 여기 그 적이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6년 4월호

(6) 노나 메예르, ‘포퓰리즘은 치명적인가?’, <포퓰리즘>, Critique, 앞의 책

(7) 자크 랑시에르가 <민중은 무엇인가?>(라 파브리크, 파리, 2013년)에서 ‘희귀한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제안한 것이다. 같은 책에서 알랭 바디우는 “‘민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24가지 노트”를 제시했는데, 이것을 어렵지 않게 세 종류, 즉 ‘민족주의’, ‘노동자’, ‘급진’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8) 로베르 카스텔, ‘왜 노동자계급은 승부에서 졌나’, <불확실성의 부상. 노동, 보호, 개인의 위상>, 쇠이유, 2009년

(9) ‘안정된 사람들’과 ‘아웃사이더’ 사이의 구별에 대해서는 노르베르 엘리아스 & 존 L. 스캇슨, <소외의 논리. 공동체 내 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학적 조사>, 파야르, 파리, 1997년(초판 1965년) 참조

(10) <더 뉴 잉글리시 위클리>, 1938년 6월 16일. 장 클로드 미셰아, <오웰, 아나키스트 토리>, 클리마, 카스텔노-르-레, 2000년에서 재인용

(11) 셀린 브라코니에 & 장 이브 도르마장, ‘기권이 의미하는 것’,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호

(12) 로베르 카스텔, <왜 노동자계급은 승부에서 졌나>, 앞의 책

(13) ‘보프(beauf)’(속 좁은 소시민)라 불리는 캐릭터는 1970년대 만화가 카부(Cabu)가 창조한 만화 속 캐릭터이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동성애 혐오자를 구체화시킨 인물이다. 같은 시대에 비네(Binet)의 만화 <레 비도숑(Les Bidochons)> 역시 비슷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