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포비아의 위험성

'샤를리' 테러의 정치사회학

2015-02-01     브누아 브레빌

 

이슬람 포비아의 위험성

브누와 브레빌|몬트리올 퀘벡대학 교수

샤를리 엡도와 이페르 카셰 상점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일부 학생들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1분 묵념 시간을 거부하였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 중 하나는 프랑스 내 표현의 자유에 적용되는 “이중 잣대”였다. 우리는 중동에서 고통 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왜 유독 이 사건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샤를리 엡도는 유태인에 대한 비판에는 소극적이었으면서도 왜 이슬람의 성스러움을 모독하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일까? 프랑스의 교육부 장관 나자 발로-벨카셈은 이러한 질문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학교 선생님들이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도록 지침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신성을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풍자화와 범죄로 간주되는 유태인 혐오적 발언은 근본적으로 성질이 다르다. 유태인 혐오적 발언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을 한다고 해도 모든 반론을 잠재울 수는 없다. 사실 유태인 혐오증과 풍자화의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있다. 알랭 핀켈크라우트, 에릭 제무르, 필립 테송과 같은 지식인들, 그리고 <르 푸앙>, <렉스프레스>, <발뢰르 악튜엘>, <르 피가로>와 같은 일간지들이 이슬람교를 퇴행적인 종교이며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판을 해도 이에 대한 처벌은 거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라는 표현은 Atlantis.fr 사이트의 설문조사에서 나온 문구인데, 우리가 이슬람교를 또 다른 별개의 “공동체”로 간주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흑인, 아랍인, 무슬림, 한마디로 ‘하층민’들에 대한 비난은 아무런 처벌 없이 허용되는 반면, 유태인들의 경우에는 머리털 하나만 건드려도 혹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유태인 혐오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고 민족학자인 장-루 암셀은 주장한다.(1)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중 잣대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쪽에서는, 유태인 학살 사건과 프랑스 사회 내의 뿌리 깊은 유태인 혐오증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된 이슬람 혐오증이 이제는 프랑스인들의 인식 속에 너무나 깊숙이 박혀버린 나머지, 이슬람교에 대한 적대적인 언사들도 모두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불균형 현상은 유태인들이 언론과 정부 기관을 부당한 방식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대중의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킴으로써, 유태인은 서방 국가들의 아랍 세계 개입을 정당화하고 종국에는 이스라엘과 워싱턴까지 접수하려 한다는 것이다. 알랭 소렐과 티에리 메이상의 사이트에서 시작된 이러한 담론은 최근 들어 큰 힘을 얻으면서, 진보주의가 후퇴하고 난 뒤에 생긴 이론적 정치적 공백의 틈새를 공략하고 있다.

 

무슬림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 유태인들과는 대조적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사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동일한 민족문화적 접근법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사회적 그룹을 유태인, 무슬림, 아랍인 등과 같이 출신이나 종교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중 잣대 문제의 경우에는 또 다른 차원의 해석, 특히 사회적 차원의 해석도 가능해진다. 유태인들이 프랑스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기원후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시기에 유태인들이 대거 프랑스로 몰려왔는데, 중유럽과 동유럽의 나치 세력과 유태인 학살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1945년 이후에도 북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과 함께 또 한 차례의 유태인 이민 물결이 일었다. 양차대전 사이에 프랑스로 이민 온 유태인들은 대부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면서 노동자, 장인, 소규모 상점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이웃 프랑스인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처럼 높은 수준의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러,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유태인 자녀 세대 중 일부는 기자, 정치인, 교수 등과 같은 권력 계층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른바, 여론을 주도하고 제어할 수 있는 자리들이다.

무슬림 이민자들은 2차 대전 이후, 특히 1960년대부터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마그레브 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회사에 고용되어 온 사람들도 있었다. 시기적으로 이들의 자녀 또는 손자들은 실업과 빈곤 문제가 심각한 프랑스 사회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경제 위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면서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는 막혀버렸다. 물론 중산층이나 그 이상으로까지 올라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회 최상위층까지 도달한 경우는 거의 없다.(2) 언론과 정치인들이 공격을 한다 해도 이슬람계 프랑스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만한 방패막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외국인 혐오적 발언들이 판을 칠 수밖에 없는 형국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살고 있는 롬족이 무자비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장-마리 르펜은 이들을 일컬어 “냄새나고 거슬리는 존재들”이라 지칭하였고, 마뉴엘 발스 총리는 “롬족은 대부분의 경우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유태인들과 무슬림들의 모습은 양차대전 사이에 프랑스로 대거 이민을 온 러시아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러시아인들은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프랑스로 이민을 오기 시작했는데, 1931년에는 그 수가 7만2,000명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은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거나 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서민층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로 이민을 온 러시아인들 중에는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엘리트들도 심심치 않게 끼어 있었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 기자, 편집자, 작가들은 파리 사교계에 무리 없이 흡수되었고, 1920년대에는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러시아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성공 덕분에 프랑스 내 러시아인 전체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서 다른 이민자들과는 달리 든든한 보호막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3)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1915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있은 이후에 프랑스로 이민을 왔고 주로 단순노동직에만 종사하였다. 그 수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1931년 1만7,000명) 결과적으로 이들은 모두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였다.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인들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러시아인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과의 접촉이 가능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이러한 접촉 자체가 어려웠다.”(4) 1930년대와 비시 정부 하에서 이민 정책을 담당했던 조르주 마코의 말이다. 이처럼 사회 내에서의 위치 역시 이민자들과 그 자녀들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30년 전부터 이러한 해석 프레임은 점점 힘을 잃고 있으며, 이제는 이민자들의 문제를 출신에 의거하여 바라보는 문화적 분석이 우세하다.

 

1984년 이후 우파의 이민문제 인식 변화

 

1977년과 1984년까지의 기간을 기점으로 이민 문제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민이란 주제가 대중의 입에 빈번하게 오르내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현재 언론은 주거, 고용, 또는 경제 관련 보도에서 외국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한다. 1930년대에만 해도 우파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프랑스 유입을 반겼다.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 5명이 오베르빌리에의 숙소에서 잠든 사이에 화재가 발생하여 연기에 질식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자 <르 피가로>는 “이 불쌍한 이민자들의 건강은 누가 챙기나? 낮에는 추운 거리를 청소하고 밤에는 결핵과 이산화탄소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 불우한 자들의 운명이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이례적으로 애도를 표하였다.(5)

상황이 달라진 것은 1975년, 경제 위기가 찾아오고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직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3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민자 출신 노동자들”의 문제는 “아랍인들의 문제”, “이민 2세대들의 문제”로, 그리고 “무슬림들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회적 차원으로 다뤄지던 사건들이 이제는 민족적 편견에 의거하여 분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 7월, 리옹 외곽의 베니시외 망게트 지역에서 이민자 청년들과 경찰 간에 폭력 사건이 발생하였다.(6) 1976년과 1979년과 마찬가지로 당시 현지 언론들은 이 사건을 ‘기타 면’으로 분류하여 보도하였다. 그러나 야당 신세가 된 우파는 이 사건을 좌파 정권에 흠집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좌파 정권이 10만여 명의 불법 노동자들을 합법화시킨 직후였다. 사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임대 주택 전반의 질적 저하와 청년 실업 문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파는 ‘이민 문제’를 사회 문제로 확대 해석하기를 부추겼다. “마그레브 출신들이 많이 거주하는 구역에서는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정부는 강제 추방 제도를 폐지하면서 청소년들의 탈선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 1981년 7월 7일자 <르 피가로>에 실린 글이다. 그때부터 <르 피가로>에는 불법 노동자들의 합법화를 규탄하는 글들, 역사학자 제라르 노아리엘이 “국가 안보의 원천”이라고 지칭한 글들이 연이어 게재되었다. 불법 노동자들의 합법화로 인해 “프랑스는 침략과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1981년 9월 22일자)되었으며, “마그레브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량배 조직”(1982년 7월 5일자)과 “이민자들의 법”(1983년 3월 22일자)이 망게트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 문제는 자동차 업계의 파업을 계기로 종교적 색채를 덧입게 된다. 자동차 업계는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분야로, 업계 종사자의 절반 이상이 외국 출신의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업은 1981년 가을에 처음 시작되어 1983~1984년에 정점을 찍는다. 처음에만 해도 인민 전선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1936년 총파업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노사 갈등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화적 충돌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노조 측이 공장 내에 예배실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는 점을 들어, 정부와 언론은 파업 주동자들이 이란 아야톨라의 지시를 받았다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배실 마련 문제는 사내 평화 유지에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1970년대에 많은 회사들에서 긍정적으로 고려하던 사안이었다.(7) 1983년 1월 11일,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모로아는 파업 노동자들이 “종교적·정치적 집단의 사주를 받아 행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집단의 결성 동기는 현재 프랑스의 사회적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일갈하였다. <르 피가로> 역시 비슷한 입장을 내놓았는데, “낙관주의자들은 외국인들의 동화 능력을 믿고 있다. 과거에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문화적 혈통은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이 언제나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과시적이고 미신적 색채가 강한 포르투갈인들의 종교 행위는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양차대전 사이에는 “이국적 민족”이라 묘사되며 이탈리아인들보다 새로운 동화되기가 더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8)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은 벨기에인들보다 동화되기가 더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다.

1980년대의 좌파는 우파의 문화 담론을 정반대로 차용하여 마그레브 이민자들의 문제를 ‘마그레브 문화’로 포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던 <리베라시옹>은 1982년 9월부터 ‘마그레브 란’을 개설하여 마그레브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목을 끌 만한 예술 행사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마그레브의 행진”이라 명명한 “평등을 지지하고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행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SOS 인종 차별(SOS Racisme) 설립에 참여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차별 반대 투쟁으로 이동시키고자 하였다. <르몽드>는 “이민 2세대의 자녀들이 음악, 영화, 연극계를 점령하고 있다”(1983년 7월 4일자)고 기뻐하였고, 주간지 <마리 클레르>는 “마그레브의 선전”(1984년 4월)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엘리트 문화는 정당성을 확보한 반면 탈산업화로 인한 삶의 질적 저하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한 하위 계층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이민 관련 논쟁에서 사회적 색채는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이민자들과 그 자녀 세대는 끊임없이 자신의 “공동체”와 자신의 종교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순수 프랑스인들과 이민자들 간의 단절, 이민자 사회 내에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인종, 차별 등 이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들은 문화적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걸프전, 9·11 테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외곽 지역 청년들과 경찰 간의 대립, 프랑스 국가를 부르지 않는 알제리 출신 축구선수들 등, 아랍이나 무슬림 출신이 대거 관련된 사건들은 그 분야가 지정학이든 사회이든 심지어 스포츠이든 간에, 이슬람 문제, 이민 문제, 프랑스 내 이민자들의 상황에 관한 논쟁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무슬림의 아랍세계 연대감 커져

 

아랍 또는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은 태생적인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이민자들은 자신의 출신을 계속해서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걸프전(1990~1991)이 그 시발점이었다. 연합군의 폭격기가 바그다드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때, 일부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서방 국가들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아랍 세계와의 연대감을 표시하였다. “사담 후세인, 그는 모두에게 배척의 대상이다. 이 도시에 사는 우리도 같은 신세이다. 처음으로 우리는 부끄럽지 않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 한 고등학생의 말이다.(9) 이와 같은 반응은 비록 소수의 의견이긴 했지만, 이민자 가정 자녀들의 의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생 드니의 마그레브 사람들은 프랑스를 야유하는 알제리와 튀니지 현지의 사람들과 언제나 동질감을 느낄 것”이라고 <르 피가로 매거진>(1991년 1월 25일자)은 썼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민자 출신의 아이들은 자신의 태생과 종교에 대한 확신을 더하게 되었다. 사회학자인 스테판 보와 올리비에 마스클레에 따르면, 걸프전은 마그레브 국가 출신의 아이들이 극단주의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양한 형태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들/우리, 서방 국가/아랍 국가, 프랑스인/이민자, 부자/가난한 자 등 사회를 연속적인 대결 구도의 형식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1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랍인과 흑인이 이민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는 의견이 정계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극좌파의 의견도 갈렸는데, 일부는 “식민지 시대 이후” 이민자들의 경우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백인”의 인식도 매우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출신 인구들에 대한 현재의 대우는 식민 정책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2005년에 시작된 ‘프랑스 토착민(Indigenes de la Republique)’ 운동에서는 말한다. “식민지 출신의 이민자들은 그들이 아랍인, 흑인, 혹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비난받는다”고 이 운동의 주창자 중 한 명인 사드리 키아리는 설명한다.(11) 그에 따르면, “흑인과 아랍인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 행위, 그리고 식민지 또는 이민자 출신의 자녀에 대한 차별 행위를 경험하면서, 이민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요구 사항들을 마음속으로 갖게 되는데, 극단적 차별, 부모에 대한 존중, 이중 처벌 제도의 폐지, 그리고 무슬림의 경우에는 예배실을 갖고 히잡을 두를 수 있는 권리와 관련된 요구 사항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겉으로는 그들의 이웃인 백인들과 같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매우 다르다.”(12)

“백인들”의 입장과 “소수”의 입장을 대립시키는 이러한 담론은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반한다. 만약 흑인 또는 아랍인이 차별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가난해서였을까? “외모를 기준으로 한 검문”이 청소년들과 경찰 간의 빈번한 충돌의 원인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7년과 2008년, 사회학자 두 명이 파리 지하철의 가르드노르역과 샤틀레레알역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들의 뒤를 몰래 쫓았다.(13) 총 525회의 검문이 이루어졌고, 이중 “흑인”과 “아랍인”에 대한 검문 횟수는 백인에 비해 6~8배가량 많았다. 그러나 또 다른 변수도 존재했는데, 바로 옷이었다. “젊은 스타일”, 특히 “힙합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정장”이나 “캐주얼” 차림의 사람들에 비해 검문을 당하는 횟수가 11.4배나 높았다.

물론 이러한 변수들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선 “힙합 스타일”을 즐겨 입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이민자 출신의 청소년이다. 그리고 인종 차별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와 결합하면서 더욱더 심각해지기 때문에 두 문제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피부색에 중점을 둘 것인지, 아니면 빈민층 소속 여부에 중점을 둘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정치적인 동시에 전략적인 사안이다. 프랑스 사회의 분열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강조할 경우, 마그레브 국가들과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이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사학자, 파리1대학 20세기 사회사연구소 연구원, 몬트리올 퀘벡대학 교수

 

번역‧김소연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

 

(1) 장-루 암셀, <새로운 형태의 극우-극좌 융합, 인종 차별 문제의 도래>, Lignes, Paris, 2014년

(2) 클로드 아티아스-돈푸 & 프랑소아-샤를르 울프, <이민자 출신 아이들의 운명, 악순환의 연결고리 끊기>, Stock, Paris, 2009년

(3) 엘렌느 메네갈도, <이민 연구에 있어서의 쟁점. 양차대전 사이 러시아 이민자들의 예>, 슬라브족 연구를 위한 유럽 센터의 정기간행물 제1호, Poitiers, 2011년

(4) 클레르 무라디앙 & 아무쉬 쿤트의 <프랑스의 아르메니아인들. 혼돈에서 부흥까지>에 인용된 문구, Editions de l’Attribut, <망명> 컬렉션, Toulouse, 2010년

(5) 이반 가스토의 <언론을 장악한 이민 관련 주제들>에 인용된 문구, <콩플뤼앙스 메디테라네> 제24호, Paris, 1997년 12월

(6) 망게트 사건과 자동차 업계의 파업에 관련된 인용 문구는 제라르 노아리엘의 <프랑스 내의 이민, 유태인 혐오증, 인종 차별 문제. 공공연한 이야기, 개인의 수치심(19~20세기), Fayard, <일반 문학> 컬렉션, Paris, 2007년

(7) 파트릭 베일, <프랑스와 프랑스 내 외국인들. 1938부터 현재까지의 이민 정책 변화>, Paris, Gallimard, <역사> 컬렉션, 2004년

(8) 마리-크리스틴 볼로비치-타바르의 <‘올바른 융합’의 불확실성과 모순>에 인용된 문구, <카이에 드 라 메디테라네> 제78호, Nice, 2009년

(9) 필립 베르나르, <마그레브 젊은이들, 자부심과 불안감 사이>, <르몽드> 1991년 1월 17일자

(10) 스테판 보 & 올리비에 마스클레, <1983년의 ‘시위대’에서 2005년의 ‘폭도들’까지. 이민자 출신 청소년들의 두 가지 모습>,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Paris, 2006/4

(11) 사드리 키아리, <빈곤층을 위한 정책을 위해 :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이민자들, 순수 프랑스인들, 젊은이들>, Textuel, Paris, 2006년

(12) 사드리 키아리, <프랑스 내 이민자들의 반혁명 운동. 드골에서 사르코지까지>, La Fabrique, Paris, 2009년

(13) <경찰과 소수 집단 : 파리의 정체성 심문>, Open Society Justice Initiative, New York,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