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7일째
발췌글-극단주의자들은 누구인가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1982), 7일째 소설의 배경은 1327년. 베네딕트파 수도원에서 의문의 사망 사건이 발생한다. 전직 심문관인 배스커빌의 윌리엄은 부르고스의 호르헤가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편에 독을 묻혀 놓은 사실을 발견한다. 당황한 늙은 사서는 웃음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발췌 1] “웃음에 관한 이 서책의 어떤 부분이 당신을 두렵게 한 건가요? 당신이 이것을 없앤다고 해서 세상에서 웃음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육체의 허무함을 의미한다네. 웃음이란 농부의 여흥이자 주정뱅이의 즐거움이지. 지혜로운 교회도 잔치나 축제 때는 마음껏 기분을 내게 해서 다른 욕망이나 야망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질 않나. 그래도 웃음이 원래 천박한 것, 어리석은 자들의 방패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네. 사도들도 일찍이, 욕정에 불타 죽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했었지. 신의 이치를 어길 바에야 차라리 식사 후에 접시와 술잔을 모두 비운 뒤 신을 희화화하면서 웃고 즐기는 편이 낫지 않겠나. 바보를 왕으로 세우고, 당나귀와 돼지의 제식에서 제정신을 잃고 시시덕거리고, 경건을 떨며 농신의 제사를 올리고…. 허나, 여기, 여기에는….” 호르헤는 윌리엄이 그에게 건넨 테이블 위의 책을 가리켰다. “여기에는 웃음의 기능이 왜곡되어 있어. 웃음은 예술로 과대평가되어 있고, 식자들의 세상의 문과 연결된 것처럼 과장되어 있다고. 철학이나 부정한 신학의 대상이 되어 있단 말이야.” [발췌 2] “웃음은 평범한 사람들을 악마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왜냐하면 바보들의 잔치에서는 악마 역시 바보로, 즉 만만한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 서책에서는 악마의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고 있어. (…) 웃음이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는 점 자체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당신을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타락한 인간들이 이 서책을 읽고는 극단적인 삼단 논법을 통해 웃음이 인간의 목적인 양 오인하겠어? 웃음은 잠시 동안 평범한 사람들을 악마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 그러나 두려움은 법, 곧 신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야. 그런데 이 서책은 악마의 불을 지펴 온 세상을 불태우려 하고 있어. 그리고 웃음을 마치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예술로 칭하고 있어. 웃는 순간 평범한 사람들은 죽는 것도 두렵지 않겠지.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다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식을 올려야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되돌아오게 마련이야. 하지만 이 서책에 읽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 죽음을 파괴할 수 있는 새롭고 위험한 열망이 탄생할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