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잠비크의 매혹적인 노래

2015-02-02     세바스티앙 라파크

 

 

모잠비크의 매혹적인 노래

 

 

모잠비크의 독립과 그 이후에 이어진 내란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기록한 증인으로서, 거장 미아 쿠토는 현재 포르투갈어를 모잠비크의 상황에 맞추어 재창조하는 작업에 한창이다. 마치 이것이 동시대 포르투갈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는 데 도움이라도 된다는 듯이.

 

세바스티앙 라파크|기자 겸 작가

 

백인이자 모잠비크인인 미아 쿠토는 인도양 모잠비크 해협에 면해 있는 베이라에서 1955년 7월 5일 태어났다. 미아 쿠토의 직업은 생물학자지만 “집중이 되지 않을 때마다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외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을 떠올린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와 남아프리카의 나딘 고디머는 영어로, 코트디부아르의 아마두 쿠루마는 프랑스어로, 이집트의 알라 알-아스와니는 아랍어로 작품을 집필한다. 쿠토는 포르투갈어로 글을 쓴다.

카포베르데, 기니비사우, 적도 기니에서 사용하는 크레올어와는 완전히 다르고, 앙골라와 브라질에서 사용되는 열정적이고 강렬한 포르투갈어와는 유사한, 고전적이고 명확하고 간결한 언어의 창시자인 미아 쿠토. 그러나 그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겸손함으로 일관한다. “모잠비크인들과 포르투갈어, 또는 모잠비크라는 나라와 포르투갈어는 갈등과 모순으로 점철된 관계이다. 모잠비크인들에게 포르투갈어란 조심스럽고,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만, 그렇게 불신하고 경계하면서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2001년 포르투갈 파루 대학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미아 쿠토는 이렇게 말했다.(1) 미아 쿠토의 본명은 안토니오 에밀리오 라이트 쿠토. 미아는 어린 시절 고양이를 좋아하던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미아 쿠토는 불편한 위치, 의미가 숨어있는 모순을 즐긴다. “나는 아프리카 사람이지만 백인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무신론자’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시인이지만 산문체를 쓰고, 남자지만 여자 이름을 가졌으며, 과학자지만 과학을 믿지 않고, 글을 쓰는 작가지만 구전을 중요시한다.” 미아 쿠토의 아버지는 기자이자 시인이었던 페르난도 쿠토(1924~2013)로 포르투갈의 포르투 지역에서 태어나 모잠비크로 이민을 왔다. 미아 쿠토는 2,500만 명 모잠비크 인구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꼬듯이 묘사한다. “나는 멸망 직전의 종족에 속해 있다. 우리 종족은 이제 2천~3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미아 쿠토의 작품을 읽어 보면 그에게 민족의식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미아 쿠토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의 종족”으로, 이는 그가 가진 독특한 정치적 견해의 근간을 이룬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아 쿠토는 모잠비크 사람들이 백인들, 즉 메중고(mezungo)를 왜 불신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메중고들이 사용하는 포르투갈어는 왜 억압의 상징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지를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마푸투가 된 로렌소 마르케스 항구 앞에 포르투갈 범선이 사라진 지는 오래 되었지만, 모잠비크는 무려 500여 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상당히 최근인 1975년에야 독립을 이루었다. 미아 쿠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아 상실의 감정을 토로한다. 독립 이후의 불안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탐정 소설 <관목이 자라는 베란다>에서도 그렇다. “나는 늘 신부님들이 계신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그들은 나의 방식을 정해진 틀에 맞추어 재단했으며, 나의 예상과 기대도 그들의 입맛대로 조정했다. 그리고 나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나를 가르쳤다.” 모잠비크의 백인인 미아 쿠토 역시 이렇게 “포르투갈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나의 포르투갈어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이제 내가 어떤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포르투갈어의 문법은 전부 다 틀리고 모잠비크화 되었다. 그리고 바뀐 것은 비단 나의 언어만이 아니다. 나의 사고도 함께 바뀌었다.”(3)

1975년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모잠비크 인구의 80% 이상이 포르투갈어를 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포르투갈어를 하지 못하는 인구의 비율이 60%에 이른다.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은 인근 국가인 남아공, 짐바브웨, 잠비아, 탄자니아가 모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포르투갈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해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2년에 열린 첫 번째 국회에서 이러한 의견은 묵살되었다. 다양한 민족들 간의 소통을 담당하는 언어이자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언어로 포르투갈어가 선정되면서, 식민 통치의 수단이었던 포르투갈어는 한순간에 정반대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미아 쿠토는 알제리 출신의 작가 카텝 야신이 남긴 유명한 문구인 “프랑스어는 과거에도 전리품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전리품으로 남아 있다”의 형식을 빌어, “포르투갈어는 더 이상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전리품이다”라고 평하였다. 미아 쿠토에 따르면, “모잠비크 정부는 국익을 높이고 내부 결속력을 다진다는 명목 하에 포르투갈어를 식민지 시대 때보다 더욱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4)

포르투갈 식민 통치 하의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의 여러 아프리카 식민지들 중 하나에 불과한 위태로운 국가였다. “모잠비크는 단지 그 장소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있는,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어 손가락 하나만 갖다 대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은, 마치 먼지로 된 시체 같았다.” 19세기 중반에 모잠비크를 여행하던 한 프랑스인 여행가가 남긴 말이다.(5) 20세기에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항구 도시에서는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에 동조하는 소수의 흑인들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륙 지방의 주민들은 여전히 반투어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1975년, 이러한 토착어들 가운데 41개가 새로운 헌법에 의해 ‘국어’로서 인정을 받았고 포르투갈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헌법에서 수화도 국어로 인정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모잠비크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43개이다. 소수 언어로는 아랍어, 인도어, 중국어가 있다. 결국 포르투갈어는 모잠비크인들의 언어가 아니라 “모잠비크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언어였던 셈이다. 쿠토의 작품은 이렇듯 전무후무한 언어적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후엔 유토피아가 탄생했을까? 1976년부터 1992년까지 계속된 내란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정부는 이 내란이 끝나는 시점에서 또다시 포르투갈어를 필요로 했다. “좋은 이야기는 총과 칼보다 더 강력한 무기였다”라고 <침묵들의 조율사>의 1인칭 화자는 깨닫는다.(6) 쿠토의 삶과 운명이 이 한 줄 안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미아 쿠토는 조국의 독립을 지지하며 잡지 <템푸(Tempo)>와 일간지 <노티치아스(Noticias)>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1980년대 초에는 현실 참여 시인이 되었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에는 보다 정당하고, 내적이고, 서정적인 울림을 전하기 위해 현실과는 상관없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7) 그는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대화를 이끌어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어주며, “침묵들을 정화”하기를 선택하였다. “여기서 침묵은 반드시 복수로 쓰여야 한다. 왜냐하면 침묵은 절대로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침묵은 음악이 되기 위한 전 단계이다.”(8) 1983년 모잠비크에서 출판된 첫 시집을 포함하여 그의 소설과 이야기가 전 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미아 쿠토는 서양 문학의 전통과 아프리카 고유의 구전성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9) “귀를 크게 열어둬라. 그것이 우리가 구전을 유지하는 비결이다”라고 자신의 소설에 썼다.(10)

20세기 초 마리오 드 안드라드와 브라질 상파울루의 근대주의자들이 브라질 고유의 정치와 문학을 꿈꾸며 포르투갈어를 “브라질화”시켰었던 것처럼, 쿠토 역시 모잠비크가 독립 후에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포르투갈어를 “모잠비크화”시켰다. 당시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왕래가 잦았는데, 미아 쿠토는 루안다를 통해 브라질의 후앙 기마랑이스 로사, 조르지 아마두, 마누엘 반데이라를 접한 후 예술적 언어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창조해가던 이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아 쿠토가 포르투갈어를 재창조하려고 하는 노력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각종 신조어, 혼성어, 언어적 유희들을 통해 진정한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미아 쿠토는 포르투갈어로 “놀다”라는 의미를 가진 brincar와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criar를 결합시켜 brincriar라는 전혀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냈다. 모잠비크의 여러 국어에서 차용한 가장 순수한 단어들을 포르투갈어에 접목시킴으로써 쿠토는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 모델을 제시하였고 falinventar, 즉 말하고 창조하는 것의 즐거움을 주창하였다. 미아 쿠토는 이렇듯 기존 단어 속에서 매번 새로운 의미를 재발견하는 능력 외에도, 인간과 대지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고, 어린아이들의 꿈을 구체화시키고, 불행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만드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작가이다. 모잠비크 내의 독자층은 수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쿠토는 2억 2천만 명에 이르는 스페인어권 독자들과 번역본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매혹적인 노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포르투갈의 시인 미구엘 토르가가 “O universal e o local sem muro(세계와 공간은 벽이 없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미아 쿠토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간이란 독자적인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의 벽들을 무너뜨리며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일도 소명도 아니다. 나는 단순히 행복해지기 위해서 글을 쓴다. 포르투갈의 시인 소피아 드 멜루 브라이너는 고통 받는 아이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 한다. 나는 내 기준에서 고통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 잠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11) 음악적이고, 강렬하고, 창조적이고, 서정적인 산문을 즐겨 쓰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의 이야기는 현대 아프리카의 위대함과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내란이 종식된 후 모잠비크에는 꿈같은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착취하여 배를 불리는 파렴치한”들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고, 이에 미아 쿠토는 애통을 금치 못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쿠토는 서양인들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따뜻한 말을 건네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의 빛을 바래게 하는 표백제”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유리구슬이 엮인 실>에 나오는 문구이다. 쿠토는 이 표백제,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글·세바스티앙 라파크 Sébastien Lapaque

기자 겸 작가. 저서로 <다르게 여전히(Autrement et encore)> 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루소-아포니, <여행과 범죄 사이의 포르투갈어권 국가들(2001)>, <오바마가 아프리카 사람이었더라면>에 수록됨, 엘리자베스 몬테이로 로드리게스 번역, Chandeigne, 파리, 2010년

(2) <잿빛 날들의 기억>, 마리본느 라푸지-페토렐리 번역, Albin Michel, 파리, 2003년

(3) <관목이 자라는 베란다>(1996), 마리본느 라푸지-페토렐리 번역, Albin Michel, 파리, 2000년

(4) <관목이 자라는 베란다>, op. cit.

(5) 샤를르 길랭, <동아프리카의 역사, 지리, 상업에 관한 문서>, Bertrand, Paris, 1856, 르네 펠리시에가 인용함, <포르투갈의 식민지, 1844~1941>, Pygmalion, Paris 2004년

(6) <침묵들의 조율사>(Jesusalem, 2009), 엘리자베스 몬테이로 로드리게스 번역, Metailie, Paris, 2011년

(7) “Umas Palavras, Ba Correa do Lago entrevistas prosadores e poetas” 인터뷰 DVD 참조, Som Livre, 2006년

(8) <침묵들의 조율사>, op. cit.

(9) Raiz de Orvalho, 모잠비크 작가 협회, 마푸투, 1983년, Editorial Caminho에서 재발행, Lisbonne, 2009년

(10) <유리 구슬이 엮인 실>(2003), 엘리자베스 몬테이로 로드리게스 번역, Chandeigne, Paris, 2010년

(11) 브라질 잡지 <에포카(Epoca)>에 실린 인터뷰, 2014년 4월 25일,

http://epoca.globo.com

(12) <깜짝 놀란 비>, 엘리자베스 몬테이로 로드리게스 번역, Chandeigne, 파리, 2014년

<암사자의 고백>, 엘리자베스 몬테이로 로드리게스 번역, Metailie, 파리, 2015년